남자육상 트랙 1500m에 출전하는 그는 이번 올림픽 개막식에 미국 선수단 기수로 나선다. 다르푸르 사태를 두고 중국을 비판해오던 미국이 다르푸르 출신의 선수를 자국 선수단 대열 맨 앞에 내세운 것이다.
다르푸르에서 온 사내
오랜 시간에 걸쳐 다르푸르에 정착한 아랍 출신의 사람과 아프리카계 흑인들은 평화로운 공존을 이어왔다. 두 민족의 피가 섞이면서 기독교가 널리 퍼졌던 이곳은 오랜 시간이 지나 자연스럽게 이슬람 숭배 지역이 됐다.
하지만 80년대 수단을 강타한 극심한 가뭄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다. 먹을 것이 사라진 이곳에서 부족들은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기 시작했다. 수단 남부의 반란군을 골칫거리로 생각한 정부는 이들을 도와주기는커녕 무장시킨 후 반란군과 대적하게 했다. 2003년을 보내면서 정부가 지원하는 민병대로 변한 주민들과 반란군은 지역 전체에 걸쳐 서로를 약탈하고 살해했다.
로몽은 23년 전 죽음의 땅이 된 이곳에서 태어났다. 그는 겨우 여섯 살 때 반군에 잡혀 소년병 양성소에서 자라났다. 소년이 된 로몽은 총을 손에 쥐는 것을 포기하고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해 인접 국가 케냐의 난민수용소에서 10년의 세월을 보냈다. 국적을 잃어버린 것이다.
오랫동안 수단의 풍부한 유전을 탐낸 미국이 그를 도왔다. 미국은 로몽의 난민 지위를 인정했다. 이에 따라 로몽은 2001년 대서양을 건넜다. 그리고 지난해 로몽은 마침내 미국 시민권을 손에 쥐었다. 죽음의 땅에서 '자유의 땅'으로의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그를 살린 것은 두 다리였다. 두 다리를 이용해 그는 생지옥 같던 양성소를 탈출했다. 난민수용소에서도 그는 세계적인 육상선수의 꿈을 키우며 뛰고 또 뛰었다. 마침내 그는 지난 6월 열린 베이징 올림픽 미국대표 선발전 1500m에 출전해 3위를 기록하면서 꿈의 무대에 발을 딛게 됐다.
미국의 1500m 트랙부문 출전 선수는 모두 귀화한 선수다. 로몽을 비롯해 레오넬 만자노(멕시코 출신)와 버나드 라가트(케냐 출신)가 미국 대표다.
로몽의 꿈, 누군가에겐 악몽
올림픽 개막식 입장은 항상 정치적이다. 남한과 북한은 공동입장을 통해 평화적 메시지를 전파하려 애썼다.
미국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로몽을 가만 둘 리가 없었다. 8일 개막식을 앞두고 미국 선수단의 각 종목 주장들은 투표를 통해 로몽을 기수로 선정했다. 그를 베이징에 발을 딛는 미국 선수단 행렬의 맨 앞에 내세우기로 결정한 것이다.
미국올림픽위원회(USOC) 역시 선수단의 결정에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USOC는 7일, 로몽을 '평화의 메신저'로 선정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로몽은 동료들의 이 같은 선택에 대해 "내 인생에서 가장 흥분되는 날이다. 이 기분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감격했다.
미국의 결정에 중국은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로몽은 다르푸르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일을 상징하는 산 증인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로몽은 '팀 다르푸르'에 소속된 선수로 정치적으로 중국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선수다.
팀 다르푸르는 2006 동계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조이 칙이 만든 단체로 200여 명의 전·현직 운동선수들이 회원으로 소속돼 있다. 팀 다르푸르는 일관되게 '다르푸르 사태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이번 베이징 올림픽을 맞아 중국의 비도덕성을 만천하에 알리겠다는 움직임을 보여 중국 정부는 조이 칙의 입국 비자 발급을 거절하기도 했다.
중국 정부는 오랜 기간 수단 정부를 암묵적으로 지원했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중국 역시 미국과 마찬가지로 수단의 풍부한 유전을 노렸다. 중국은 수단 제1의 원유 수입국이다. 수단에는 총 20억 배럴의 원유가 묻혀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중국과 미국이 수단의 원유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상황이다. 미국은 목소리를 키우고 중국은 시끄러워지지 않도록 하자는 게 차이일 뿐이다. 미국은 지금에 와서야 법썩을 떨고 있지만 사실 오랜 기간 수단 남북간의 협상에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해 다르푸르 사태에 침묵을 지켜왔다.
수단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은 곧잘 세계 언론 지면을 채우곤 했다. 중국을 비난하던 미국이 다르푸르 출신의 로몽을 앞세우면서 자연스럽게 그는 세계인이 올림픽을 통해 다르푸르 사태를 떠올리게 하도록 했다. 결국 이번 올림픽은 중국이 그토록 막으려 노력했음에도, 개막과 함께 짙은 정치색을 띄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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