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두 사건은 삼성의 경영권 불법 승계 의혹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삼성은 이날 판결로 경영권 승계를 둘러싼 법적 걸림돌이 치워지는 결과를 맞게 됐다. 하지만 법원의 이날 판결이 삼성의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불거진 다양한 비리 의혹을 불식시키지는 못했다. 오히려 "사법 정의가 땅에 떨어졌다"는 비판까지 나오고 있다.
비자금 조성, 불법 로비, 경영권 불법 승계…삼성 비리 의혹 전체에 대해 면죄부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지난해 제기한 삼성 비리 의혹은 크게 세 가지였다. 비자금 조성, 불법 로비, 경영권 불법 승계다.
이 가운데 앞의 두 가지, 즉 비자금 조성과 불법 로비 의혹에 대해서는 조준웅 특별검사팀이 무혐의 혹은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정황은 뚜렸했다. 또 김용철 변호사는 자신이 직접 법조계에 뇌물을 뿌렸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특검은 이를 무시했다.
그래서 조준웅 특검은 "삼성 특별검사가 아니라 '삼성 특별변호사'"라는 비아냥을 종종 들었다.
그리고 남은 의혹이 '경영권 불법 승계'였다. 이마저도, 법원은 16일 판결을 통해 면죄부를 줬다. '의혹'은 모두 없었던 게 됐다.
법원은 이날 양도소득세 포탈 혐의에 대해 '일부 유죄'를 인정했지만, 이는 애당초 '의혹'이 아닌 명백히 드러난 '사실'이었다. 재벌 문제에 대해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사실만 수용할 뿐, 합리적 논거에 바탕한 '의혹'은 파헤치지 않는다는 사례가 한국 사법부 역사에 하나 더 추가됐다.
이로써, 김용철 변호사가 지난해 인생을 걸고 감행한 양심선언은 물거품이 됐다. 특검의 수사 결과와 법원의 판결이 나오는 과정에서 김 변호사는 줄곧 배제됐었다. 판결이 나온 직후, 김용철 변호사는 "할 말조차 없다"라고 했다.
삼성 재판부, 기존 법원 판결을 뒤엎다
하지만 특검과 법원이 내놓은 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발 목소리는 더 높아졌다.
법원 스스로 일관성을 해친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이날 에버랜드 CB 사건을 무죄로 판정한 이유에 대해 "기존 주주들이 인수권을 부여받아 비서실 지시에 의해 실권한 경우라도 에버랜드 지배구조 변경이나 기존 주주의 손해를 스스로 용인해 에버랜드에 대한 배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재용 전무에게 에버랜드 CB를 헐값에 몰아준 것은 기존 주주들이 자발적으로 실권한 결과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같은 혐의로 기소된 허태학·박노빈 씨(에버랜드 전·현직 사장)에 대해 1, 2심 법원이 유죄를 선고한 것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절차상 요건 갖추지 않은 게 '중대한 하자가 아니다'라고?"
이날 재판부가 법원의 기존 판결을 뒤엎은 대목은 많다. 허태학·박노빈 씨 사건에 대한 항소심 재판부는 "CB 헐값 발행을 결의한 에버랜드 이사회가 정족수 등 절차상 요건을 갖추지 않아서 '무효'"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번 재판에서 재판부는 이사회가 절차상 요건을 갖추지 않은 문제에 대해 "중대한 하자가 아니다"라고 결론 내렸다.
삼성SDS BW 헐값 사건 역시 마찬가지다. 지난 2004년 국세청과 삼성 사이에서 진행된 삼성SDS BW에 대한 세금 소송에서 법원은 '주당 5만3000~5만4000원'을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거래에 의해 형성된 객관적인 교환가치'라고 판단했다.
그런데 이번 재판에서 재판부는 특검 측이 기소 근거로 삼은 주당 5만 5000원의 장외거래 가격에 대한 입증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삼성SDS 주당 가격의 정상치를 얼마로 잡느냐에 따라 'BW 헐값 발행에 따른 배임 죄' 여부가 판가름 난다. 정상적인 주당 가격이 낮게 책정되면, 삼성 측은 BW 헐값 발행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삼성 측이 주장한 가격인 주당 1만 5501원을 인정한다고 해도, 여전히 손해가 발생해서 '무죄' 판결은 나올 수 없다. 재판부가 책정한 가격이 삼성 측이 주장한 가격보다 더 낮다는 뜻이다. 재판부가 '무죄' 판결을 이끌어내기 위해 BW 가격을 짜맞췄다는 의혹이 불거질 수 있는 대목이다. 게다가 재판부의 이런 판단은 삼성SDS와 같은 IT(정보기술) 기업의 적정 주식 가액은 미래수익가치를 기준으로 평가돼야 한다는 대법원의 판례를 무시한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0억 원 이상 탈세, 실형 선고…465억 원 탈세, 집행유예?
유일하게 '유죄'가 인정된 양도소득세 포탈 혐의에 대해서도 논란이 분분하다. 재판부는 공소시효 등을 이유로 특검은 당초 이 전 회장 등을 기소하면서 1128억여 원의 양도소득세를 포탈한 혐의가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원은 공소시효 등을 이유로 465억여 원에 대한 포탈 혐의만 인정했다.
그런데 이 정도 규모의 세금 포탈이라면 집행유예가 아니라 실형을 선고하는 게 법에 부합한다. 특정경제가중처벌법에 따르면 연간 세금 포탈 규모가 10억원이 넘으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게 된다. 그리고 3년 이상의 징역형을 받게 되면 집행유예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사건의 불법의 정도가 징역형의 실형을 선고할 정도로 중하다고 볼 수 없는 사안"이라며 작량감경을 통해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했다.
양도세 포탈만 유죄…"차명재산이 상속재산으로 공식 인정받게 됐다"
다른 의혹에 대해서는 모두 면죄부를 준 재판부가 유독 양도소득세 포탈 혐의만 인정한 게 결과적으로 삼성을 이롭게 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판결이 나온 직후, 오순정 회계사는 이렇게 설명했다.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보유한 차명재산이 상속재산이 아니라면, 즉 증여받은 재산이거나 비자금 등을 통해 조성한 재산이라면, 증여세가 부과돼야 한다. 그런데 조준웅 특별검사팀은 뚜렷한 증거 없이 이를 '상속재산'으로 규정하여 버렸다. 그리고 법원은 이 재산에 대한 양도소득세 포탈을 인정함으로써 차명재산이 '상속재산'이라는 논리를 정당화했다. 이로써 이 전 회장 측은 차명재산을 정상적인 상속재산으로 보장받게 됐고, 수조 원 대의 증여세 부담도 피하게 됐다."
비자금 의혹에 눈 감았던 특검이 이건희 전 회장의 차명재산을 상속재산으로 규정했고, 법원이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는 설명이다.
차명 계좌와 비자금 의혹은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그런데 차명재산이 상속재산으로 공식 인정되면서, 비자금 의혹 역시 희석되는 결과가 생겼다. 특검의 수사는 비자금 의혹을 비켜간 데서 끝나지 않고, 비자금 의혹을 덮어버리는 결과로 이어진 셈이다.
"재벌 총수 앞에 무력한 사법부의 권위를 존중해 줄 국민은 이제 없다"
재판부의 이날 판결을 비판하는 목소리는 이밖에도 다양한 곳에서 나왔다. 경제개혁연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참여연대 시민경제위원회 등은 이날 성명에서 "그동안 재벌 총수 일가의 범죄에 대한 '봐주기' 판결들을 통해 사법질서를 어지럽히고, 국민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던 사법부는 오늘 드디어 한국의 재벌총수 일가가 치외법권 지대임을 공식적으로 확인하였다"라며 "법원은 스스로 한국의 사법부가 더 이상 사법정의를 추구하는 조직이 아니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선언했으며,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행위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라고 밝혔다.
이어 이들은 "재벌 총수 앞에 무력한 사법부의 권위를 존중해 줄 국민은 이제 없을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기사 속 그림은 16일 재판을 참관한 손문상 화백이 그린 것입니다. 손 화백은 방청석 맨 앞 줄에서 선고 공판 당시 풍경을 스케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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