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국민이 무섭지 않은가!"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국민이 무섭지 않은가!"

[현장] 수만 명 거리로…"우리는 美 쇠고기 수입 허락하지 않았다"

"너희가 불법이다."

경찰과 시민이 거리에서 맞서는 사회, 경찰과 시민이 서로 '불법'이라며 욕하는 사회, 경찰이 초등학생의 길을 가로막고, 초등학생이 경찰에 분노하는 사회.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지 불과 석 달이 지난 2008년 5월, 밤마다 서울 시내에서 볼 수 있는 대한민국의 모습이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장관 고시가 발표된 29일, 분노를 참지 못한 4만 명의 시민이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모여 촛불을 들었다. 촛불 집회에 이어 거리 행진이 진행됐다. 이날 경찰은 시민을 자극하면 안 된다는 판단 때문인지 굳이 거리 행진을 막지 않았다. 차량으로부터 행진 대열을 보호해줄 폴리스라인도 설치하지 않았다.

경찰이 골목 하나하나 철통처럼 수비한 곳은 청와대로 가는 길이었다. 따로 지도부가 없는 행진 대열은 서울시청에서 시작해 명동-을지로-종로1~5가-을지로를 지나 다시 광화문사거리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경찰은 이미 지하철 출입구까지 봉쇄하고 행진을 막았다.

골목마다 전경들은 깜깜한 거리에서 귀가하려는 이들조차 이유없이 가로막았다. 귀갓길이 가로막힌 시민들이 방패 앞에서 연좌 농성을 벌이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끝까지 막아냈으면 좋겠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 장관 고시가 발표된 29일, 분노를 참지 못한 4만 명의 시민이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모여 촛불을 들었다. ⓒ프레시안

"절실한 위기감, 그리고 무기력을 느낀다. 이제 정말 알아서 피하는 길밖에 없나. 시민들은 평화롭게 반대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도 그렇게 행동에 나서도 바뀌는 게 없다. 달리 표현 방법이 없으니까 이러는 것 아닌가."


각각 10살과 7살 자녀의 손을 잡고 시청 앞 광장 잔디밭에 앉은 김낙희(41) 씨와 박은실(36) 씨는 이날 처음 촛불 집회에 참가한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애들도 TV로 경찰의 진압을 보고선 '오늘 막대기 들고 가야돼?'라고 묻더라"며 "너희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나온 거고, 평화롭게 의사를 밝히면 된다고 일러줬다"고 말했다.

임신 9개월의 몸을 이끌고 홀로 촛불 집회에 참석한 전경미(32) 씨는 "매일 TV와 인터넷으로만 보다가 오늘은 꼭 와야할 것 같아서 왔다"고 말했다. 그는 "장관 고시를 본 소감? 화밖에 안 난다. 정부가 200명 넘게 연행한 걸 보면 말은 다 한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최소한의 여지가 남아있다고 본다. 새로운 고기가 수입되진 않았으니까. 끝까지 막아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참가자들은 '지난 한 달간 우리와 함께 고생한 기자들에게도 격려의 함성을 한번 보내달라'는 사회자의 말에 환호를 보내면서도 즉시 "조·중·동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잊지 않고 덧붙였다.
의료봉사, '예비군 봉사'…"촛불은 우리가 지킨다"

연일 거리 행진과 강제 진압이 이어지면서 자발적으로 등장한 자원 활동팀도 눈에 띄었다.

노란 조끼를 입은 30여 명의 의료 봉사팀을 인솔하던 한 시민은 "다음 아고라에 게시판에서 집회 현장에 부상자들이 많다는 소식을 봤다"며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며 의료 봉사를 제안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그는 "특별히 지원을 받은 곳도 없는데, 시민들이 우리를 보면 약을 사들고 온다"며 약품으로 차 있는 구급 의료함을 가르켰다.

군복을 입은 예비군 참가자도 이 같은 자원 활동팀의 일원이었다. 역시 다음 '아고라' 게시판에서 보고 자원 활동팀을 꾸리게 됐다는 이들은 "주 목적은 경찰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일"이라며 "비폭력을 유도하고, 싸움이 벌어지면 말리는 역할을 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행진 내내 행렬 맨 끝에서 인간띠를 만들어 참가자들이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도록 도왔다.

호소, 환호…거리에서는 2MB 혼자 '왕따'
▲ 거리 행진을 벌이고 있는 시민들. 행진 대열은 1㎞가량 길게 이어졌다. ⓒ뉴시스

촛불 집회가 끝나고 오후 8시 30분부터 이어진 행진에는 대부분의 촛불 집회 참가자가 동참했다. 대열은 1㎞가량 길게 이어졌다.

이날은 직장이 끝나고 참석한 '넥타이 부대'와 아이를 무등을 태우거나 등에 업고, 또는 유모차를 끌고 나선 '가족 단위 참가자'가 많았다. 나란히 함께 촛불을 들고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는 노부부들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퇴근 시간 거리에서 행렬을 지켜보는 시민을 향해 "민주 시민 함께 해요", "협상 무효, 고시 철회"등의 구호를 외치며 동참을 호소했다. 실제로 거리에서 지켜보다가 행진 대열이 나타나자 촛불 하나, 피켓 하나 없이 동참하기도 했다.

정치학을 전공하고 있다는 대학생 서지혜(25) 씨와 조미현(24) 씨는 "정치학을 공부하는 학생으로서 민주적 절차 없이 쇠고기 협상을 강행한 데에 분노를 느껴 나왔다"고 말했다. 이날 장관 고시를 보고 처음 집회에 나왔다는 이들은 "뉴스를 보고 경찰이 무섭기도 했는데, 막상 이렇게 사람들과 함께 행진하니 가슴이 뜨거워지고 설렌다"며 손수 만들어 가지고 온 손피켓을 치켜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뒤늦게 행진에 합류했다는 이모 씨는 "9시 뉴스에서 장관 고시를 보고 뛰어 나왔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강모 씨는 "사실 진작에 이렇게 많이 나왔어야 한다"며 "점점 더 많은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명박에 대한 솔직한 심정을 듣고 싶나"라며 "차라리 중국에서 돌아오지 않기를, 아니면 못 돌아오기를 바라는 심정"이라고 덧붙였다.

지켜보던 시민들 중에서는 박수를 보내거나 경적을 울려 지지를 보내는 이들이 많았다. 택시 운전사 신모(63) 씨는 "참 장하다"며 "(행진 때문에) 운전 조금 못 해도 괜찮다"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근무 중 휴식하러 나왔다가 행렬을 지켜보던 박모 씨는 "솔직히 이렇게 반대하는 사람이 많을 줄 몰랐다며 "누가 이런 일을 만들고 있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자신을 '386세대'라고 말한 박 씨는 "1987년에도 이랬는데, 오늘은 그때만큼 사람들이 많다"며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지 몇 달이나 됐다고 이렇게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나"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때와 비슷해, 큰일이네"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이도 할머니도 행진, 행진…"이게 바로 평화 시위"
▲ 이날 서울시청 앞 광장 촛불문화제에는 '우리가 무섭지 않은가'라고 적은 피켓을 든 여고생 9명이 참가자들의 많은 박수를 받았다. 이들은 참가자들을 가로 막고 있는 경찰 부대 앞에서 행사 내내 말없이 피켓을 든 채 시위를 벌였다. ⓒ프레시안

네 살배기 아이와 함께 광화문 사거리에 도착할 때까지 행진에 동참한 박은경(38) 씨는 "사실 행진은 가장 약한 방법 아니냐"라며 "생각이 서로 다른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같은 걸 외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며칠간 계속된 경찰의 강제 진압에도 불구하고 아이와 함께 참석한 이유에 대해 "무섭다기 보다는 오히려 그 앞에서 평화 시위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정말 시민이고, 여성과 아이같은 가장 약한 사람들이 나와서 이렇게 외치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역시 행진을 끝까지 마친 신모(69) 씨는 "하나도 힘들지 않다"며 "너도 나도 나와야 된다. 살기 위해"라고 말했다. 그는 "국민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그런 사람들은 대체 어떡해야 하나"라며 "경찰은 무섭지도 않다"라고 강조했다.

이날 거리 행진 역시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계속됐다. 참가자들은 광화문 사거리 앞에서 경찰에 가로막히자 안국역-창덕궁 앞 등지로 행진을 한 뒤 다시 광화문 사거리로 집결해 집회를 계속했다.

참가자 누구도 자신을 '과격한 행동을 저지르는 범법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에 어긋나는 태도를 보이는 쪽은 오히려 시민의 목소리를 외면한 정부, 그리고 시민 대신 청와대만을 철통처럼 수비하려는 경찰이었다. 이날, 정부는 스스로 5만 명 가량의 또 다른 시민을 등돌리게 만들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