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병력 투입이 초읽기에 들어간 가운데 농성장 밖은 속속 경찰차와 살수차량 등이 배치되면서 긴장감이 감돌았다. 경찰이 22일 이전에 병력 투입을 통한 강제 농성 해산을 결정함에 따라 농성장에는 속속 기자들이 들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농성장 안의 분위기는 한결 여유로웠다. 100여 명이 못 되는 조합원들은 곳곳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경찰병력 투입 상황에 대한 연습도 벌어졌다.
"무서운 것은 벌써 넘겼고 오늘은 슬프네요"
"무서운 것은 벌써 넘겼어요. 20일 가까이 있으면서 밤마다 용역들하고 신경전이 벌어졌었는걸요. 처음에는 그런 것도 정말 무서웠는데 정작 오늘은 무섭진 않고 그냥 슬프네요."
밤 10시 경, 경찰차에 의해 이미 진작에 봉쇄된 유일한 출입구에 앉아 10평 남짓하게 허용된 땅과 바깥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길을 막고 있는 경찰들을 바라보던 유진화 씨(가명)는 "이건 말이 안 된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정규직이 돼서 한 달에 150만 원이나 200만 원 받고 싶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한 달에 80만 원, 1년에 960만 원 벌게 해달라는 거잖아요. 비정규직으로라도 계속 계약을 갱신하면서 일을 하게 해달라는 건데, 그게 이렇게까지 당해야 할 일인가요?"
노조는 비정규직의 고용보장을 요구하며 지난달 30일부터 이날로 20일째 점거농성을 벌이고 있다. 17일 노사가 벌인 최종협상에서 노조는 3개 월 이상의 고용보장 요구에서 한 발 물러서 회사에게 이들의 고용에 대한 안을 내놓으라고 말했지만 회사는 이를 거부했다.
유진화 씨는 "전쟁 같다"고 했다. "나라까지 나설 일인가요?"라고도 물었다. "회사가 우리를 끌어낸다면 그건 또 모르겠다. 그런데 '일 좀 하게 해달라'는 아줌마들을 나라에서 이렇게 내치려고 하면 앞으로 누구를 믿고 살아야 하냐?"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양선경 씨(가명)도 "주변 사람들에게도 내 아이들에게도 앞으로 절대 아이 낳지 말라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어차피 이 땅에서 태어나더라도 이렇게 비참하게 살게 될 텐데 아이는 낳아서 뭐하냐"고 덧붙였다.
마흔이 넘어 난생 처음 받아보는 '진술 교육'
농성장 안의 조합원들은 겨우 100명도 되지 않았다. 밤 10시 20분 쯤 됐을까. 그 조합원들을 앞에 두고 김경욱 이랜드일반노조 위원장이 공권력 투입에 대비한 '진술 교육'을 시작했다.
'투쟁'이라는 말도 처음 들어 본 아줌마들이 농성장에서 강제로 끌려 나간 가슴 떨림으로 경찰 앞에서 불리한 진술을 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던 지도부가 준비한 '마지막 교육'이었다. 20일 동안 농성을 하는 동안 노래도 많이 배우고, 여러 사람들의 강연도 들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영화도 봤다. 이렇게 이어진 교육의 끝은 '조서 쓰는 법'이다.
김경욱 위원장 : "여기서 여러분은 뭐하셨죠?"
조합원들 : "먹고 자고 노래 불렀어요."
김경욱 위원장 : "그렇죠. 회사 기물도 하나도 안 건드렸고 아침에 일어나서 여기 청소도 하셨죠? 그렇게만 얘기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여기 왜 들어온 거죠?"
조합원들 : "위원장님이 시켜서요."
김경욱 위원장 : "그렇죠. 여러분은 이 점거농성을 결정할 수 있는 지도부가 아니니까 제가 들어가자고 해서 시작한 거죠. 그런데 그 대답을 너무 자연스럽게 하시니까 마음이 상하네요."
김 위원장의 농담에 아줌마 조합원들은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모든 쟁의조정절차를 다 거쳤으니 합법 파업 중인 거다", "조서를 다 쓴 다음에는 도장을 찍으라고 할 텐데 그 때는 단어 하나 하나 꼼꼼하게 읽어봐야 한다"는 등의 교육이 이어졌다.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겠다"는 위원장 말에 떨궈진 고개들
교육을 마친 김 위원장은 20일 동안 믿고 따라 와 준 조합원들에게 마지막 말을 시작했다.
"이곳에 공권력이 들어오는 것은 우리의 패배가 아니라 노무현 대통령의 패배입니다. 자신들이 만든 비정규직법의 폐해가 이미 다 알려졌는데 그것을 무력으로 덮는다고 본질이 달라질까요?"
아줌마 조합원들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김 위원장은 "나는 여기까지 온 것도 '기적'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단 하루도 철야 농성을 못할 것 같았던" 조합원들이 무려 20일을 버텼다.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1박2일 농성으로 준비하고 시작한 싸움이었다. 그런데 조합원들이 스스로 무기한 농성을 결정했다.
김 위원장은 그 고마움과 앞으로의 싸움을 함께 하지 못할지 모르는 미안함을 털어놓았다.
"오늘 경찰병력이 들어오면 저를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꽤 오랜 시간이 걸릴지도 몰라요. 3개월이 될지 1년이 될지…. 하지만 저는 반드시 돌아옵니다. 그때 오늘 이 자리에 계셨던 조합원들을 모두 다 꼭 보고 싶습니다."
나이 40이 넘어 '진술 교육'이라는 것을 받으면서도 사소한 농담에 웃던 조합원들이 곳곳에서 훌쩍이기 시작했다. 김 위원장을 바라보던 눈들이 모두 바닥으로 떨어졌다. 순식간에 눈물바다가 됐다.
김 위원장에게는 농성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랜드 그룹의 고소고발로 인해 체포영장이 발부된 상태다. 이날 경찰병력에 의해 연행되면 구속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오늘까지는 2라운드였다"
조합원들은 그런데 "다시 싸우겠다"고 말했다. "여기서 이렇게 쫒겨 나더라도 다른 곳으로 갈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저 일하고 싶다는 요구가 들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여기에는 "이 나이에, 어느 곳을 가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비정규직 뿐인데 다른 곳을 가면 또 처음부터 시작 아니냐"는 아주 현실적인 판단도 있다.
김경욱 위원장도 "오늘까지는 2라운드일 뿐"이라고 말했다. "홈에버에는 33개 매장이 있다. 이곳에서 쫒겨나더라도, 회사 측이 모든 곳의 영업을 중단하지 않는 한 (구속되지 않고 남은 조합원들이) 다른 곳으로 또 가면 된다"고 말했다. 민주노총도 21일 이랜드 그룹이 경영하는 뉴코아, 홈에버 등의 매장에 대한 2차 '타격 투쟁'을 계획하고 있다.
정부가 이들을 강제로 끌어내기 위해 시점을 재고 있던 순간,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가 없다"며 새로운 투쟁을 준비하겠다고 다짐하고 있었다. 마지막 교섭을 앞두고 "공권력 투입"을 시사하면서 오히려 자율교섭 타결의 길을 방해했던 정부는 이들의 계속되는 싸움을 과연 막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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