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기 한국노동연구원장은 11일 열린 <프레시안>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기획 연속강연 '민주화 20년, 한국사회 어디로 가나'에서 87년 20년, IMF 10년을 넘어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 가기 위해서는 "재계가 새로운 패러다임과 발전전략을 주도해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까지의 대립적인 노사관계를 넘어 전투적인 노동조합을 변화시키고 경영계에서 늘 주장하는 '상생의 노사관계'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재계가 먼저 노동조합에 대한 지금과 같은 인식과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영기 원장은 "노사관계와 노동시장 개편은 기업경쟁력과 시스템경쟁력 제고의 핵심 과제로 공권력과 법에 의존해서만 이뤄질 수 없다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사가 함께 고민해야 할 것은 '조용한 노사관계'가 아니다"라고도 덧붙였다.
"과감한 노동시장 유연화와 개방이 지금의 위기의 대안일까?"
87년 6월 항쟁은 같은 해 7~8월 '노동자 대투쟁'을 불러왔다. 처음으로 "차별과 비인격적인 대우 그리고 저임·장시간근로 등을 타파하고 사회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킬 수 있는 유일한 대항권력"으로써의 노동조합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후 전투적인 노동조합운동은 "작업장 민주화" 뿐 아니라 고율의 임금인상을 이뤄냄으로써 "동시에 그들 관점에서의 경제민주화를 실현"하고 있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흘렀다.
최영기 원장은 "87년 이후 20년의 성년식을 맞았지만 노사관계가 성숙단계에 진입했다는 주장을 찾아보기는 어렵다"고 주장했다. "정치경제 일반에 대한 평가보다 훨씬 더 혹독하고 강도 높은 노동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으며, 현재의 노사관계는 성장잠재력을 갉아먹고 투자를 위축시키는 요인이라는 주장이 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는 것.
실제 노동조합의 파업 등 쟁의행위나 임금인상 요구는 외환위기 이후 전사회적으로 확산된 '경제위기론' 속에 집단이기주의의 인상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조합원의 이익만 앞세우며 투쟁만능의 횡포를 부리는 비생산적인 집단으로 매도"돼 있는 것이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비정규직 철폐'와 같은 노동조합의 구호는 사회적 힘을 얻지 못하고 심각한 사회문제가 된 양극화와 비정규직의 해법도 정규직 노동자들의 양보에 있다는 주장을 대통령까지 나서서 설파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하지만 최 원장은 "이런 분석에는 민주화 20년이라는 인식만 있고 지난 10년 간의 'IMF 체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은 빠져 있다"며 "과연 '87년 체제'의 보수적 수정, 즉 더 과감한 노동시장 유연화와 개방을 통한 경쟁으로 지금의 고용위기와 양극화 그리고 빈곤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인지 회의적"이라고 전망했다.
최 원장은 "지금 한국정치경제에 필요한 것은 '87년 체제'의 경직성과 높은 갈등성향 그리고 'IMF 체제'의 불안정성과 단기 성과주의를 동시에 극복하는 새로운 패러다임과 혁신"이라고 강조했다. 그 방향은 "사람과 시스템의 경쟁력을 높이는 투자와 사회적 합의에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조직노동에 대한 정부의 태도는 옳았을까?"
"경제가 어렵다"고들 누구나 말하는 시대다. 줄어들 줄 모르고 늘어만 가는 청년실업, 정규-비정규직으로 나뉘는 사회 계층의 양극화, 여기에 또 '중규직'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내는 현재의 갈등구조 속에 사람들은 "언제는 경제가 안 어려웠던 적이 있었냐"는 농담까지 하는 지경이다. 그러면서 노동조합의 임금인상 요구 등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과연 오늘 우리 경제가 '위기'라고 한다면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정부와 재계의 대응은 올바르고 미래지향적인 것일까?
전노협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조직노동을 배제·억압하고 앙시앙레짐(Ancien Regime, 낡은 체제)을 강화"한 노태우 정부의 선택에서 김영삼 정부는 "주요한 사회세력으로 성장한 조직노동을 인정하고 타협적으로 문제를 해결해 보려" 했지만 최 원장은 이런 시도 역시 실패했다고 분석했다.
임금 합의, 노동법 개정 등을 거치면서 조직노동과의 새로운 관계설정을 시도했지만 김영삼 정부 역시 "노동진영과의 진정한 타협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1996년 노동법을 막무가내 통과시키면서 김영삼 정부는 "배제와 탄압의 과거 패러다임으로 회기"했다.
IMF 체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98년 이후 진행된 구조조정의 성격과 급진성"으로 인해 "사회적 합의기구로 출범한 노사정위원회는 노동계의 불참·탈퇴 등으로 파행을 거듭"했고, "1995년 이래 안정세를 보이던 노사분규건수도 1998년 이후 급격히 늘었으며 그 형태가 과격화됐다."
"재계, 그동안 어떤 자기 희생과 양보도 한 적 없다"
오늘날에도 노사분규는 여전하다. 최근에는 특히 더 열악한 계층인 비정규직을 중심으로 극단적이고 과격한 형태의 노사분규가 증가하고 있다.
과거 전투적 노동운동의 양태가 비정규직 및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최근에만 하더라도 대형유통업체 홈에버에서 일하던 600여 명의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계약해지와 차별에 맞서 열흘이 넘도록 매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고 있다.
최영기 원장은 "노동문제를 제대로 풀지 않고서는 지속가능한 성장 모형을 창출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새로운 성장모형의 창출은 노동과의 타협을 통해 생산성 향상과 고용창출의 새로운 길을 찾아나설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최 원장은 "일련의 혁신과정을 거치기 위해서는 노사관계 혁신과 노동시장 유연화라는 과제를 피해갈 수 없다"고 말했다. 임금·직무체계를 성과와 직무에 기초한 체계로 개편하는 것과 함께 현장 노동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통한 지속적인 혁신과 생산성 향상의 길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문제는 이런 "사람 중심의 '하이 로드(High Road)' 전략으로 전환하기 위한 노사관계의 새로운 계약은 재계가 주도해야 한다"는 데 있다. 재계가 노동진영에 대한 지금과 같은 인식을 탈피할 때만 비로소 가능한 일인 것이다.
최 원장은 "재계는 (지금까지) 자기 기업의 노사안정에만 몰두하고 전체 노사관계 선진화와 신뢰구축을 위한 투자나 재계 공동의 타협 전략을 제시한 바가 없다"며 "90년대에 시도됐던 여러 차례의 사회적 타협 사례에서 재계는 어떤 자기희생과 양보도 한 바가 없다"고 평가했다.
최 원장은 네덜란드나 스웨덴, 일본의 예와 우리나라의 재계의 태도를 비교하며 "그동안 재계가 제시해 왔던 선진화 전략은 '노동시장 유연화'와 '법과 원칙의 확립'에 한정돼 왔다"며 "이런 정책은 실익은 적고 불신만 키워 노사관계를 경직시키는 부작용을 초래하며 오히려 필요한 것은 각급 노동단체를 상대로 대대적인 대화공세를 펼치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재계여, 대대적인 대화공세를 펼쳐라"
최근 민주노총은 이석행 위원장의 취임 후 삼성 등 5대 재벌 총수들에게 '만남'을 요청한 바 있다. 하지만 민주노총 소속의 '힘 센' 노동조합이 있는 현대를 제외하고는 모두 민주노총의 대화제의를 거부했다.
최영기 원장은 이런 태도로는 지속가능한 시스템으로의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최 원장은 "그동안 재계는 사회적(지역·업종) 차원의 노사관계 관리를 거의 방치함으로써 지역·업종 노동단체의 개별기업에 대한 개입을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최근 노동계에 불고 있는 '산별전환의 바람'에 대해서도 재계가 "산별노조나 산별교섭의 선악이나 호·불호를 떠나 현실을 인정하고 체계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재계의 역할로 "사람중심의 비전과 경영철학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조건 비용을 줄여 이익을 내려는 '구시대적인' 경영철학을 버리고 "제대로 된 기업지배구조와 건전한 노사관계, 공정한 원·하도급관계와 사람에 대한 투자, 그리고 지역사회와 환경에 대한 책임 등의 원칙을 지키며 인력의 고급화와 노동자의 마음을 사는 제2세대형 기업가 정신의 고양이 필요하다"고 최 원장은 강조했다.
"재계가 사회적 대화를 주도하기 위해서는 노동조합 비판에 초점을 맞추기 말고 근로자들의 마음을 사는, 근로자들이 절실히 원하는 것을 갖고 일반 근로자를 상대로 대화해야 한다"는 것이 87년 20년, IMF 10년을 넘어서기 위한 한국사회에 던지는 최 원장의 '충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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