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라는 단어는 한국에서 '구호'에 가깝다. OECD 가입을 추진한 김영삼 정부부터 한미FTA 체결을 위해 전력을 기울이는 현 정권까지 '세계화'의 당위성에 대해서는 토를 달지 않았다. 그래서 한국 밖의 세계 역시 '세계화'를 당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통념일 뿐, 사실과 다르다는 지적도 곳곳에서 나온다. 신자유주의 금융 세계화의 흐름이 표준으로 삼고 있는 나라인 미국이 실제로는 강력한 보호무역주의 성향을 띠고 있다는 점, 그리고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 역시 보호무역주의 성향을 띠고 있다는 점 등이 주된 이유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은용수 상임연구원이 지난 13일 <프레시안>에 "세계화가 주춤하고 있다"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도 이런 내용이었다.
앞서의 기고문이 소개된 뒤, 은 연구원은 독자들에게서 약간의 오해가 섞인 질문을 종종 받았다고 한다. 보다 상세한 설명을 위해 은 연구원이 다시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주춤하는 세계화' 지적이 '쇄국정책 옹호론'은 아니다
필자가 "세계화가 주춤하고 있다"는 제목으로 지난 13일 <프레시안>에 기고한 글에 대한 몇몇 독자들의 반박성 질문이 있었다. 질문의 핵심은 이렇다.
세계화가 주춤거린다고 수출로 먹고 사는 한국이 문을 닫고 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리고 그럴수록 늦기 전에 미국 시장을 선점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한미 FTA 체결 추진은 바람직한 결정이지 않는가.
우선 지난 13일자 기고문의 요지를 다시 밝혀두는 것으로 첫 번째 오해를 풀어보자. 그 글은 "한국이 세계화 속에서도('세계화'의 실체가 있건 없건) '쇄국정책'을 고수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대외무역이 늘어나고 소위 말하는 국가와 지역 간 상호의존도(inter-dependency)가 커지더라도 결국 중요한 것은 자국의 '내수시장'인 것이고, 그것의 확대 방안으로 '한반도 경제공동체'를 모색해보자는 것이 글의 고갱이였다.
흔들리는 미국 소비시장…한계에 다다른 적자와 부채
이제 두 번째 질문에 답을 해보자. 질문의 요지는 한국정부가 한미 FTA 체결을 밀어붙이면서 내세운 논리와도 같다.
즉 다른 나라보다 먼저 미국이라는 거대시장을 선점해서 이득을 취하자는 것인데, 이는 매우 실리적으로 들리면서 최소한 레토릭 차원에서 대중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고 보인다.
그러나 과연 '미국의 거대 시장'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존재한다면 앞으로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선점해야할 만큼 건강한 시장인가라는 매우 근본적이며 또 회의적인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런 회의적인 의문은 미국 내에서조차 나오고 있다. 미국 경제정책연구센터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미국 수입시장은 앞으로 10년에 걸쳐 3천억달러 이상 축소될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미국의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에 기인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미국 통계국 자료에 따르면, 미국의 지난해 경상수지 적자액은 무려 7635억달러이며 이는 국내총생산의 6.5% 이르는 규모다. 여기에 일부 국내외 경제학자들은 2009년에 이르면, 적자 규모가 국내총생산의 10%를 넘을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이는 곧 미국 달러 가치의 폭락을 의미하며, 이에 따라 미국 금리가 상승되고 자산가치가 폭락하면서 결국 수입을 감소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만들어지게 된다. 거대시장이 무너지는 것이다.
여기에 버팀목 되어야할 미국의 재정수지 또한 3000억달러 이상의 적자를 기록하고 있고 총 부채규모는 8조달러를 넘으니 미국경제의 펀더멘털에 의심이 가는 것은 당연하다.
여기에 최근 미국 부동산 시장이 붕괴조짐을 보이면서 주택공실률이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으며, 주택값이 폭락해 소비자들의 구매력이 사라지고 있고 모기지 대출 상환 불능도 급증하는 추세다.
한 마디로 미국의 거대한 소비시장을 겨냥해 우리가 먼저 달려가 물건을 팔고 이득을 취하겠다는 '미국 거대시장 선점론'은 매우 위험한 환상일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 대비책 절실…내수와 수출 균형 맞춰야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미국의 내수시장 축소는 한국의 수출길이 막히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경기침체와 금융시장의 붕괴로 이어진다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모든 경제학자들이 막대한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에 우려를 나타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실제로 최근 한국경제학회에서 개최된 학술대회에서는 미국발 경제위기를 우려하는 논문이 발표되었으며, 한국은행 주최로 열린 토론회에 참석한 배리 버클리대 교수도 미국의 막대한 경상적자에 따른 금융위기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따라서 미국발 세계경제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대비책을 세워야만 한다. 1997년 외환위기로 막대한 사회적 비용을 치러야만 했던 경험을 또다시 되풀이할 수는 없다.
문제는 지금의 수출주도형 경제성장모델이 외부여건에 매우 취약한 구조적 한계를 갖고 있기에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뤄내기 어렵다는 데 있다.
내수시장이 확대되어 수출시장과 균형을 이뤄야만 하며, 그래야 고용이 확대되고 외부의 충격을 흡수, 완화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외환 보유액 70% 가진 아시아…AMF 창설, 서둘러야
그러므로 '한반도 경제공동체'는 내수시장 확대방안의 차원으로 심도있게 논의돼야 한다. 더불어 제2의 금융위기에 대비하여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에 더욱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다.
지난 2000년 치앙마이 이니셔티브(CMI)를 계기로 한중일 3개국과 아세안 회원국들은 역내 금융위기 발생에 공동대응하기로 합의한 바 있다.
그리고 2007년 3월 현재, 외환 보유액 상위 1~8개국 가운데 1개 나라(러시아)를 제외한 7개국이 모두 아세안+3회원국이며, 이들 7개국의 외환 보유액은 세계 외환보유액의 70%에 이른다.
요컨대, 미국 주도의 금융질서에서 이제는 아시아가 목소리를 내고 역내 금융협력을 할 수 있는 조건이 충분히 마련돼 있는 것이다.
여기서 한국정부는 아시아금융협력이 현실화할 수 있도록 중국과 일본간 조정자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하며, 아시아통화기금 창설을 위해 아세안과 한중일의 허브 역할을 자처해야 한다.
동시에 수출주도형 성장전략을 대폭 수정하여 내수시장을 활성화하고 외부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는 정책을 개발해야 한다. 동시다발적 FTA 체결은 그 뒤에도 늦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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