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과연 총연맹 위원장 한 사람이 길어야 2~3시간 동안 한 사업장을 방문해 인사를 하고 손을 잡는 것이 '현장 복원'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회의적인 시각도 없지 않다. 과연 현장대장정이라는 실험이 어떤 성과를 낳을지, 긍정과 부정의 양극단의 예측 모두 아직은 말 그대로 추정에 불과하다.
이석행 위원장의 현장대장정에 대한 평가를 하려면 무엇보다 그의 발걸음이 머무는 곳과 그의 손이 움켜쥐는 대상의 구체적인 실상을 알 필요가 있다. 비정규직법 시행령,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등 '중앙'에서 처리해야 할 온갖 현안이 산적함에도 불구하고, 더욱이 민주노동당과 민중경선제 도입을 놓고 신경전까지 벌이고 있으면서도 이석행 위원장은 현장대장정 일정을 빠짐없이 소화하고 있다.
서울과 지역을 오가며 이뤄지는 그 일정 속에서 이 위원장은, 그리고 민주노총은 무엇을 깨닫고 어떤 고민을 얻게 됐을까. 허세욱 씨의 분신 직후 1주일을 제외하고는 3월말부터 꼬박 두 달 가까이 현장을 찾는 가운데 처음의 고민과는 무엇이 달라졌을까.
지난 14일부터 1주일간 이 위원장을 수행해 광주지역을 방문하고 돌아 온 이수봉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장이 <프레시안>에 글을 보내왔다. 이수봉 원장은 광주에서는 이석행 위원장의 손을 반갑게 맞잡는 사람도 있었고,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 사람도 만났다고 했다. "조합원 이전에 평범한 국민들"인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길이었다고도 말했다.
또 이 원장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고용불안과 저임금의 덫에 걸려 있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을 만나는 가운데 "그들에게 어떤 전망을 줄 것인지" 걱정하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했다. 현장대장정은 이제 절반을 지났지만, 현장에서 확인한 문제들을 구체적인 전략으로 만들어내는 큰 숙제가 남았다는 점에서 아직 갈 길은 한참 멀었는지도 모른다. <편집자>
"솔직히 별로 기대 안 하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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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우선 내부 혁신을 위해서는 대의원대회부터 성사돼야 합니다. 임원선거라도 있으면 성사가 되지만 끝나고 나면 대충 빠져나가잖아요. 결국 주요한 안건은 처리도 못하고 무산되고 말아요. '혁신하자'고 해놓고 혁신위원회도 못 꾸리면 어떻게 합니까? 앞으로 대의원대회에 빠지면 명단을 공개할 겁니다. 두 번 이상 불참하면 피선거권 등 자격을 제한하겠어요.
그리고 고용보험기금은 노사가 같이 내는 돈이지요. 수 조 원이 쌓여 있거든요. 그런데 정작 생색은 정부가 내고 이 돈으로 해외연수나 가고 합니다. 이런 돈은 비정규직이나 실업자를 위해 올바른 곳에 써야 합니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면 위원장인 나를 불신임하려고 할지도 모르죠. 그러나 눈치 보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한번 하는 거 눈치 볼 거 뭐 있어요? '불신임하겠다'면 받아서 맨 마지막에 안건을 올릴 겁니다. 그리고 앞에 중요한 혁신안을 다 배치해서 통과시키고 마지막에 심판받으면 되죠. 그러면 최소한 끝까지 참석은 하겠지…. 그렇게 해서 불신임 받으면 당당히 받는 것이고…."
광주지역 현장대장정 둘째 날 기아자동차노조 간부 간담회 자리에서 이석행 위원장이 이렇게 인사말을 시작했다. 조합간부들 사이에서 조용한 웃음이 번진다. 위원장의 솔직한 말투에 조금씩 굳게 닫혔던 마음들이 열리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 한 간부가 일어선다.
"솔직히 위원장 간담회를 한다기에 별 기대를 않고 왔다. 그러나 듣다보니 이제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겠다는 생각이다. 부디 끝까지 그 약속을 지켜주기 바란다."
이제 일어서야 할 시간이다. 간담회는 최소한 1시간은 되어야 상호 조금씩이라도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해도 5군데 이상 진행하기가 어렵다. 다음 행선지는 한진택시 조합원 간담회다. 교대시간을 이용해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을 맞춰야 한다. 급한 상황이라 본부장이 직접 핸들을 잡고 총알처럼 달린다. 이동시간은 15분. 그동안 사업장 개요를 보고받고 현안을 점검한다. 최대한 짧게 설명해주고 조금이라도 잠을 자게 해야 한다. 그러나 끊임없이 들어오는 문자와 전화는 그럴 여유를 주지 않는다.
메시지가 뭐냐고? "여러분이 민주노총"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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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대장정 3일차, 오늘은 공무원들이 근무하는 구청으로 향한다. 공무원노조는 민주노총에 가입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사업장 분위기도 제조업과는 완전 딴판이다. 당연히 민주노총 소속감도 약하다. 복지과에 들어가니 다들 자기자리에서 업무에 열중하고 있다. 공무원노조 지부장이 먼저 인사말을 한다.
"지난 총회에 모두들 잘 협조해주셔서 성황리에 끝난 것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아주 중요한 손님이 오셔서 인사드리겠습니다. 민주노총 이석행 위원장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얼핏 보아서는 별 반응이 없다. 아예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 사람도 있다. 주눅이 들 만하기도 한 상황이지만 이 위원장은 넉살좋게도 인사말을 던진다.
"고생이 많으십니다.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공무원연금 문제는 공무원이 나서서 싸우면 '철밥통' 소리 듣습니다. 그래서 민주노총이 나서서 해결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민주노총은 서울 영등포의 대영빌딩에 근무하는 중앙상근자가 민주노총이 아닙니다. 현장에서 일하는 여러분이 바로 민주노총입니다. 그래서 제가 왔습니다. 오늘 제가 짧게 인사드리고 가지만 결코 잊지 않고 동지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간단한 인사말을 마치고 일일이 악수를 한다. 반갑게 인사하는 사람도 있지만 마지못해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과 악수할 때는 배로 힘든 법이다.
목소리도 갈라지고 있다. 이제 옆에 서있던 부위원장이 나선다. 먼저 인사를 하고 위원장을 소개시키면서 조금이라도 부담을 줄이려 한다. 지부장은 이번 기회에 한 곳이라도 더 안내하려고 욕심이지만 벌써 다음 행선지로 이동해야 할 시간이다.
그들도 '민주노총 조합원'이기 이전에 평범한 국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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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원장도 다소 힘든 모습이다. 사무직 노동자들은 조합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은 경우가 많고 민주노총 위원장을 보는 시각도 아직 위상이 서 있지 않다. 언론에 나온 이러저러한 부정적 이야기들에 조합원들도 영향을 받고 있다. 조합원 이전에 평범한 국민들인 것이다.
이석행 위원장은 그것을 잘 안다. 그래서 본인이 고행을 자처하고 나섰다. 잠은 노조 사무실이나 조합원 집에서 잔다. 당연히 씻는 것도 불편하고 여러 가지가 편치 않다. 수면시간은 평균 3~4시간 정도다. 새벽 2시에 끝나고 다시 새벽 4시에 시작되는 일정도 있다.
수행하는 사람들은 1주일 정도 같이 돌기 때문에 그 기간만 고생하면 되지만 위원장은 벌써 두 달째다. 어떻게 보면 가학적(?)인 고행의 길이기도 하다. "꼭 이렇게 해야 하나"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러나 현장 조합원들의 불신과 닫혀 있는 마음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좀 더 정성을 다하는 것이 필요한 일일 수도 있다.
작년에 총파업만 10회가 넘게 선언했다. 현장은 총파업 지침을 따라하느라고 허덕였다. 이제 민주노총의 투쟁은 '공문'으로는 조직되지 않는다. 무너진 체계와 기강을 다시 세우기 위해 조합원에게 다가가 호소하는 일부터 시작할 결심을 한 것이 현장대장정의 출발정신이다. 책상 앞에 앉아서는 어떤 좋은 구상도 무용지물이다. 기본이 안 서 있는데 무슨 일을 벌일 수 있겠는가? 위원장이 '총파업'이라는 말을 쓰기 싫어하는 이유다.
"내가 꼭 오겠다고 했지? 약속 지켰다!"
4일차. 이제는 중소사업장을 돌 차례다. 하남공단에 있는 작은 사업장은 광주지역 본부장도 있는지조차 모르는 사업장이다. 그러나 이석행 위원장은 안다. 발로 누비고 다니는 위원장 덕분에 본부장이 면박을 당한다. 중소기업이라 몇 군데 사업장들이 합동 간담회를 한다. 젊은 간부가 하소연한다. 암담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지금 받는 월급으로는 애들 대학에 보낼 수도 없습니다. 금속노조 소식지에 한 달에 200만~300만 원 받는 대기업 조합원의 생활이 실렸던데 그거 가지고 우리 사업장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는 뼈 빠지게 일해 간신히 100만 원 넘깁니다. 우리가 간부 입장이니 조합원들이 불만스러워 해도 같이 투쟁해야 한다고 하지만 솔직히 속이 상합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노조가 있다고 해도 20년, 30년 이렇게 전망 없이 산다는 것은…."
하루 이틀도 아니고 고용불안에 저임금의 덫에 걸린 중소기업의 노동자들에게 어떤 전망을 줄 것인가? 이 위원장은 즉답을 하기보다는 같이 답을 찾아보자고 제안한다. 뭔가 미진하다. 이 미진함은 이어진 사장과의 간담회로 이어진다. 중소기업의 사장들의 처지 역시 답답하기는 매 한가지다. 걱정하는 시간이 그래서 길어진다.
떠나기 전 한 조합원에게 농담을 건다. 풍기, ATK 등 중소사업장은 열악하다. 탄압이 심하고 작은 사업장이라 대의원이 없다. 한마디로 표가 없는 곳이다. 그래도 이석행 위원장은 선기기간 이 곳을 찾아 "반드시 당선되고 나서 오겠다"고 약속했었다.
"봐라! 안 찾아올 거라고 했지만 반드시 오겠다고 했지? 이제 약속 지켰다!"
한 여성조합원의 눈가가 붉어진다. 이제 가면 또 언제 볼지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인사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모습이다. 단지 머뭇거리며 손을 조용히 흔든다. 오랜 세월 홍안의 소녀들이 이제 눈가에 주름이 비치는 얼굴로 남아 끝까지 노조의 깃발을 지키고 있다. 이런 뿌리들이 민주노총의 뿌리이고 기반이다. 눈도 맞추지 못하고 바삐 떠나지만 왠지 쓸쓸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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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남겨진 숙제들…
오후에는 광주에서 조직이 탄탄하다는 한 제조업체를 방문했다. 과연 체계적이고 조직이 잘 짜여 있었다. 환영 현수막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고민의 흔적이 보인다.
임단투 시기라 각종 조합원 행사를 하고 있었다. 현장순방까지 마치고 조합사무실에서 잠깐 짬을 내서 회사 상황을 물어본다.
"그동안 임단투만 해 와서 이제 '경영분석' 같은 것은 조합원들이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실제 회사가 경영을 국외로 옮겨서 고용문제가 심각해질 수도 있는데 조합원들은 '골치 아픈 경영문제는 이야기하지 마라. 얼마나 더 올려줄 것인지를 말하라'고 합니다."
그동안 민주노총은 10여 년 동안 분배 문제를 중심으로 사업해 왔다. 이제 의제를 경영개입이나 소유 문제로 확장시켜나가야 한다. 그러나 그런 준비도 하기 전에 지도부가 바뀌고 전략은 실종되고 만다. 결국 "이렇게 가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바꿔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단위노조 차원에서 해결하기는 벅찬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중앙에서 힘 있게 이런 사업의 전환을 만들어내는 것도 만만치 않다. 결국 전략의 부재가 심각한 노동운동의 위기를 만들어내는 현장을 확인한 셈이다.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바로 정책연구원 사업과 어떻게 연결시켜야 할지 고민되기 시작한다.
현장대장정은 위원장 혼자서 하는 '이벤트'가 아니다. 사무실에서 지침으로 하는 사업들을 이제 현장에 내려가서 전체의 사업으로 바꾸는 과정이다. 위원장의 열정과 중앙상근간부, 지역본부 간부들의 헌신성이 하나가 되는 순간이다. 이 힘이 조합원들에게 전달되고 조금씩 조금씩 '조합원의 민주노총'으로 변화하고 있는 과정이다.
좀 더 프로그램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지금과 같은 살인적인 일정은 무리다. 좀 더 조직적으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 위원장이 돌고나면 후속 사업을 배치해 심화시키는 교육사업이나 조직사업을 전개해야 한다. 또 문제사업장에 대해 집중적으로 달라붙어 해결하는 전형도 만들어 갈 필요가 있다. 중앙과 지역본부, 그리고 산별연맹 간의 협조관계를 잘 조직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보면 아직 완성된 형태는 아니다.
그러나 현장대장정은 이미 조금씩 얼어붙은 조합원들의 마음을 녹이고 있다. 오로지 정성과 진심으로 조합원들을 대하면 그만큼 조합원들이 알아준다는 것을 확실히 느낀다.
몸은 지칠대로 지치지만 오히려 정신은 점점 더 맑아진다. 현장에서 발견한 것은 '희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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