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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우리당에 기회는 올 것인가?"

[기획] 신자유주의 회피하는 민주연합은 공허

<프레시안>과 네트워크형 싱크탱크인 코리아연구원은 '2007 대선과 진보개혁진영, 평가와 제언'을 주제로 공동기획을 준비했습니다.

모두 3편으로 구성된 이번 기획의 첫 번째 주제는 '열린우리당에 대한 평가와 전망'으로, 박상훈 후마니타스 주간이 썼습니다. 이 글은 코리아연구원(www.knsi.org) 홈페이지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편집자>

정당 명칭의 후진성

열린우리당이라는 당명만큼 한국 정당정치의 후진성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한나라당이라는 당명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보수정당의 국가주의적 면모를 드러내는 측면은 있다. 언젠가 한 외국인 교수가 집권당의 이름인 '열린우리'가 무슨 의미인지를 물었는데 '오픈'과 '아우어'라는 영어 단어 이상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한나라당(The Grand National Party), 민주당(The Democratic Party), 하다못해 자민련(The United Liberal Democrats)조차 정당의 영문표기가 쉽게 가능하고 그 당명을 소재로 해당 정당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우리파티(The Uri Party)'라는 고유어를 공식명칭으로 하는 열린우리당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한국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토착어 같은 당명을 보고 소수 원주민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인가 라고 생각할지는 몰라도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의 집권당 이름이라고 상상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인지 가끔 외신 중에는 조롱조로 '웁스파티(OOP's Party, Our Open Party)'라고 표기하는 경우가 있다.

민주주의에서 당명은 정당의 이념적 책임성을 대표하는 것이다. 사회당, 사회민주당, 노동당과 같이 진보정당 계열뿐 아니라 기민당, 보수당, 공화당 등 보수정당 역시 당명에서 자신들의 이념적 지향 내지 지지기반의 특성을 표현한다. 이로부터 유권자는 해당 정당의 정치적 실천을 평가하고 책임을 추궁하는 최소한의 준거를 갖게 된다. '열린우리'는 어떤 이념성을 표현하고 누구를 대표하고자 하는가? 분명 이 당명은 현대 민주주의 정당이론에서 벗어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사라지는 거대정당

한국정당사에서 열린우리당만이 갖고 있는 기록이 하나 있다. 그것은 순수하게 선거만으로 획득한 과반수 의석(earned majority)을 가졌다는 데 있다. 적어도 민주화 이후 유일한 사례다. 그것도 창당된 지 1년도 안 된 신생정당이 이뤄낸 성과였다. 그 이전까지 어느 집권당도 과반수를 획득하지 못했고 그래서 선거 후에 정당통합이나 연합정부 혹은 거래를 통한 의원 빼내기 등의 방법을 동원해 인위적 과반수(manufactured majority)를 만들어야 했다. 선거만으로 여대야소를 만들었던 유일한 정당인 열린우리당이 지금 한국정치에서 사라져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지난 2월 14일의 열린우리당 전당대회는 이 점을 잘 보여주었다.

당시 전당대회를 앞두고 가장 큰 관심은 정족수를 채울 수 있을 것인가에 있었다. 원래 재적 대의원수는 1만2000명. 하지만 당 사무처가 탈당의원이 속한 지역을 '사고 당'으로 처리하는 방법을 써 재적 대의원수를 9000명으로 줄였다. 참석한 대의원은 6617명. 형식적으로는 정족수를 크게 넘긴 것이지만, 1년 전인 2006년 2월 18일 전당대회 참석 대의원 9229명에 비해서는 매우 크게 줄어든 참여였다.

전당대회 안건처리 방식 역시 흥미로웠다. 표결은 투표가 아닌 박수의 방법으로 처리하고 이의제기가 있을 경우에만 반대와 기권을 거수하게 하고 나머지는 찬성으로 처리하자는 것이었다. 이런 비정상적 절차를 사전에 '법적 검토'까지 거쳐 확정해야 했다는 사실 만큼 열린우리당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애초부터 이번 전당대회는 전당대회를 여는 것 자체에 목적이 있었을 뿐이며, 이견이나 갈등의 표출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조차 갖지 못한 상황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더 비극적인 것은 아무도 이런 절차나 형식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를 낼 의욕조차 갖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전당대회에서 정세균 의원이 당의장 단일 후보로 출마했다. 사회자의 안내에 따라 5분간 정견발표을 했고, 이어 무투표-무개표-박수통과의 절차로 35초 만에 당선을 확정했다. 그밖에도 최고위원을 선임하고 대통합신당 추진을 신임 당 지도부에 일임하는 등 여러 안건이 통과되었다. 하지만 대통합의 방향이나 내용, 대상을 둘러싼 논의도 없이 모든 결정은 박수의 형식을 띤 만장일치의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이로써 새로운 지도체제에 합법성을 부여하는 형식적 정당성은 부여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중요한 것은 전당대회가 당의 단결과 사회적 영향력을 재조직하는 계기가 된 것은 전혀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도적 지도체제를 만드는 데 성공한 대신 당의 기초와 정신은 사라진 셈이다. 권위주의 시기도 아닌데, 집권여당이 이처럼 토론과 경합이 없는 요식행위로서의 전당대회를 치르게 된 것, 그리고 전당대회 이후 당 안팎에서 누구도 이 사실에 대해 긍정적 평가든 비판적 평가든 말하지 않게 된 것은 오늘날 열린우리당, 나아가 오늘의 한국 민주주의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현재 열린우리당에서는 정세균 당의장 이외에 누구도 위기극복을 위한 절박함을 보여주지 않는 것 같다. 정세균 당의장이야 개인의 정치적 자산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라도 당의 위기 극복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나머지 모든 세력은 기회주의적으로 눈치를 보고 계산을 하고 있을 뿐이다. 열린우리당은 사실상 기능정지 상태다. 혹자는 당을 해체하고 싶어도 해체할 힘조차 없다고 말한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정당 만들기'에 실패

오늘의 열린우리당이 직면하고 있는 어려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강한 대선 후보가 없다는 데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물론 이런 행위자 중심의 설명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설명이 다 된다면 의외로 해법은 간단할 것이다. 외부에서 누군가 인기를 모을 만한 후보를 데려오는 것이다. 한 사람으로 안 된다면 여러 사람 데려와 경쟁의 장을 만들면 될 것이다. 열린우리당 내의 여러 사람들이 오픈 프라이머리라고 하는 당내 후보결정 방식의 도입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정당과 정당체제에 관한 교과서를 집필했던 알란 웨어(Alan Ware)가 지적하듯, 어느 정당이든 크게 세 차원에서 기능한다. 첫째는 '정부와의 관계에서의 정당'의 차원이다. 가장 중요한 변수는 집권당이냐 반대당이냐 하는 차이이지만, 이 차이 안에서도 수많은 변이가 존재한다. 양당체제 하에서 정당들의 기능양식이 다르고 다당체제 하에서 그 기능양식 역시 다르다. 정부형태가 대통령제냐 내각제냐에 따라 다르고, 대통령과 같은 정치지도자의 개성적 특성이 정당의 기능양식을 다르게 만들기도 한다.

둘째는 '유권자 속의 정당'의 차원으로, 그 핵심은 정당들이 동원하는 갈등의 내용이 무엇이냐에 대한 것이다. '민주 대 독재'와 같이 민주화 이행기의 정치균열이 정당들의 행위양식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반면 민주화가 공고화되면 될수록 정당의 사회적 혹은 계층적 기반을 둘러싼 갈등이 더 커지고 한 사회의 정치경제적 내용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 것인가를 둘러싼 이념적 차이가 부각된다. 이 경우 신자유주의냐, 복지국가냐, 사회적 시장경제냐 하는 등의 논쟁은 자연스러운 일이 된다. 이때 정당의 계층적 지지기반이 강한 정당과 그렇지 않은 정당의 기능양식은 동일하지 않다.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이념적 대표체제가 포괄적인 특성을 갖는 경우와 일본이나 한국처럼 보수독점적인 특성을 갖는 경우에도 정당의 기능양식은 무척 다르다.

셋째는 '조직으로서의 정당'의 차원이다. 정당의 조직적 결속이 강한 경우와 그렇지 못한 경우의 정당의 행위양식은 동일하지 않다. 정당에 따라 일반 당원과 지지자 같은 기층 레벨의 지지기반에 더 의존하기도 하고, 반대로 정치엘리트 간 거래와 협상을 더 중요시하기도 한다. 정당 내 결정구조가 안정될수록 정당의 행위양식은 훨씬 예측 가능한 반면 정당의 역사가 짧고 당내 권력분배의 방식이 불안정할수록 정당의 행위양식에서 우연적 계기는 커지게 된다.

정당이 기능하는 이 세 차원에서 조망해볼 때 지금의 열린우리당은 거의 최악의 상황이다. 집권당인지 아닌지도 불분명해졌고, 열린우리당이 대표하는 균열의 내용도 모호하고 안정된 지지기반도 존재하지 않는다. 더 큰 문제는 지도부와 정치엘리트, 활동가, 당관료, 평당원, 지지자를 연결하는 통합적 정당조직의 모습을 갖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정당체제란 '정당 간 경쟁과 연합의 패턴'으로 정의된다. 지금 열린우리당은 대통합신당을 말하는데 그렇다면 그것은 기존의 정당 간 경쟁과 연합의 패턴을 근본적으로 바꾸겠다는 의미가 된다. 현재와 같은 당의 현실에서 대체 그럴 힘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의아하기만 하다.

현대 정당연구 분야에서 가장 활발한 업적을 보여주고 있는 피터 마이어(Peter Mair)는 '정당체제는 급격히 변하나 정당조직은 서서히 변한다'고 말한 바 있다. 3년 전 열린우리당은 대통령이라는 개인에 초점이 두어진 '탄핵반대'라는 대규모 정치균열이 가져온 정당체제의 '급격한 변화'에 힘입어 성공했다. 열린우리당의 성공은 피터 마이어가 말하는 정당체제의 '체제적 특성(systemic logic)'을 반영한 결과였다. 그런데 지금 열린우리당은 또 다시 그 체제적 특성 내지 논리에 의해 희생될 운명 앞에 서 있다.

무엇보다도 그 이유는 대통령 개인에 초점을 둔 정치체제의 주기적 악순환 구조를 견뎌낼 수 있는 정당조직을 창출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당정을 분리하고 기간당원제를 실시하고 원내정당화 하는 등 뭔가 새로운 제도적 실험을 한 것처럼 보였지만, 누가 보더라도 열린우리당은 '노무현의 정당'이었다. 당의 지지도는 대통령의 지지도를 따라 움직였고 그에 따라 선거패배와 비상지도체제는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정당의 지도부는 순환적으로 내각에 호출되었는데 그 어떤 경우도 당의 결정이 아니라 대통령의 결정이었다. 당 지도부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때로는 수동적으로 때로는 전략적 이득을 생각하며 이를 따랐을 뿐이었다. 열린우리당 내의 가장 큰 갈등이 이른 바 '친노'냐 '반노'냐와 같은 대통령을 둘러싼 것이 된 것은 이런 성격의 정당조직이 직면하게 된 필연적 귀결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열린우리당의 향후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정세균 체제'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인가?

사라진 민주대연합의 꿈

열린우리당이 한국정치의 독립변수로 복귀할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전당대회에서 정세균 의장이 약속했던 것처럼, 민주대연합을 목표로 한 대통합신당을 만들어 정권재창출을 하겠다는 주장이 어느 정도 권위 있는 목표로 통용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민주대연합을 모토로 열린우리당과 그 지도부가 개척할 수 있는 정치-사회적 공간(hunting ground)이 있어야 할 것이다. 열린우리당은 어떤 공간을 공략할 수 있는가? 무엇으로 그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그간 민주대연합의 의제는 냉전반공주의에 기반을 둔 권위주의 정치세력의 집권에 대한 두려움에 의존한 바 컸다. '반창연합'이니 '반한나라당 연합'이니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였다. 다른 누구보다도 호남은 이러한 반권위주의 연합 전략의 중심적 지지기반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현실에서 또 다시 반한나라당 민주연합과 같이 두려움을 동원한 안티전략이 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현실이 아니다.

노무현정부 시기의 경험은 민주파의 해체를 가져왔다. 대연정 시도와 한미FTA 시도는 결정적이었다. 이 과정에서 열린우리당은 그 어떤 독자적인 정치적 공간을 확보하지 못했고, 하려 하지도 않았다. 열린우리당이 한국정치의 독립변수가 아닌 지는 이미 오래 되었다. 그런데 지금 다시 대통합신당을 만든다면 대체 어떤 지향과 내용을 조직할 수 있을까?

그간 정부가 추구한 신자유주의 성장주의가 한국사회에 미친 충격은 양극화, 빈곤화, 불평등 심화 등으로 표현되듯 매우 컸다. 그러나 당내 세력의 다수가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를 지지하는 상황에서 열린우리당이 이 이슈에서 새로운 대안적 경로를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고 신자유주의적 보수 라인을 적극적으로 내세울 수도 없다. 그 경우 그나마 남아 있는 지지기반은 완전히 붕괴될 것이다. 실제는 신자유주의 개혁노선을 실천해 왔는데 이를 정치의 언어로 전면화할 수 없는 모순적 상황이 지금의 열린우리당 모습이다.

경향적으로 열린우리당 내 여러 세력이 느슨한 합의를 유지하고 있는 개혁성은 이른 바 남북관계와 같은 평화이슈이다. 그러나 이 이슈의 사회적 동원력은 매우 약하고 더구나 한나라당 후보군 역시 이 이슈에 대해 적응하려 하지 갈등적 상황을 만들려 하지도 않는다. 열린우리당이 최근 들어 스스로를 평화개혁세력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지만 대개의 경우는 스스로를 어떻게 해서든 개혁적이라고 합리화하는 한 방편에 그칠 뿐이다. 그 어떤 개혁적 정조를 덧붙인다 해도 신자유주의적 경제노선에 대한 문제를 회피하고는 민주연합의 주장은 공허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본질적으로 정당은 균열이다. 지금 열린우리당이 대표하고 개척할 수 있는 균열의 공간은 거의 없어 보인다. 민주연합, 대통합이라는 그저 낡은 정치언어만이 그들의 시한부 운명을 잠시 가리고 있을 뿐이다.

민주파는 해체되었다. 젊은 세대든 호남이든 지지기반도 분해되었다. 모든 출발은 이러한 현실에 대한 자각으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제 진보든 개혁이든 대안이 되고자 하는 세력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이 어떤 경제, 어떤 시민사회, 국가역할을 만들어 갈지를 말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공동체의 규범과 개인의 복리가 어떻게 결합될 수 있느냐는 문제로부터 정치적 삶의 심미적 내용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는 정치세력만이 대안정당을 만들고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계층적 이념적 내용 없는 정치경쟁의 시대는 종결되었다. 그래서 무이념의 대통합만을 내세우는 것으로 자신의 일을 하고 있다고 믿는 열린우리당에게 기회가 만들어지기는 어려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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