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행사는 그동안 각국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돼 오던 야스쿠니 신사 참배 반대운동이 한데 결집되어 동아시아 평화운동의 하나로 자리잡았음을 알리는 계기라는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이번 행사에 참석한 김두진 한양대 문화인류학과 강사는 15일까지 진행되는 도쿄의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소식과 그 이후 홋카이도에서 진행될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한 공동워크샵', 일제강점기 강제연행자의 유골 발굴 현장 소식 등을 <프레시안>과 관련 행사의 공식 블로그(http://blog.daum.net/peacetown)를 통해 전할 예정이다. <편집자>
그들의 귀혼(歸魂)이 평화의 시작
2006년 8월 13일 일본 도쿄 한복판에서 마침내 평화의 촛불이 타올랐다.
그동안 각국에서 산발적으로 진행되어 오던 동아시아인들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 반대운동이 올해 일본 도쿄와 오사카에서 열리는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을 계기로 동아시아에 평화를 정착시키려는 큰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번 행사는 "어둠의 야스쿠니에 평화의 촛불을! 촛불행동"이라는 제목으로 8월 11일부터 15일까지 닷새 동안 일본 도쿄와 오사카 등지에서 진행되고 있다. 11일은 한일 국회의원들이 내각부에 야스쿠니신사 참배의 중단을 촉구하도록 일본국회 주변에서 촛불집회를 가졌으며, 12일에는 도쿄 도키와(常盤橋) 공원에서 집회를 열고 긴자(銀座) 주변에서 캠페인 활동을 벌였다. 오사카에서는 10일 "아시아 민중과 함께 8·15를, 고이즈미 야스쿠니 참배를 허용 않는 오사카집회", 11일 "합사를 거부하는 소송과 함께하는 모임(가칭)" 등이 있었다.
일본의 전통명절인 오봉(우리의 추석에 해당) 연휴이자 일요일인 13일, 도쿄에서는 오후 3시부터 일본교육회관에서 '도쿄대집회' 행사를 갖고 도심을 행진했다. 먼저 일본교육회관에서는 다카하시 데츠야 도쿄대 교수,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장, 긴죠 미노루 오끼나와 야스쿠니위헌소송원고단 단장, 가오친 수메이 대만입법원 의원, 이희자 태평양전쟁보상추진협회 회장 등이 각 지역의 역사적 경험을 나누고 그 고통을 평화의 염원으로 승화하는 연설을 해 강당을 가득 메운 1000여 청중의 박수를 받았다.
동아시아 민중들의 새 평화연대 가능성
이어 펼쳐진 대만 원주민 음악공연단, 한국의 음악패 굴렁쇠, 재일한국인 가수 박보 씨의 콘서트로 행사의 분위기는 달아올랐고, 여세를 몰아 도쿄 도심을 가로질러 행진을 했다. 행진의 선두에는 큰 소리로 "신사 반대"를 외치는 대만에서 온 참가자 300여 명이 섰고, 그 뒤를 한국에서 온 200여 명의 참가자들이 이었다. 일본의 양심적 시민들과 비록 적은 수이지만 일본에 거주 내지 체류 중인 서양인들도 함께 대오를 이뤄 뒤를 따랐다.
한국측 참가자들은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 한국 사무국이 모집한 학생들과 뜻있는 시민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본에서 유학 또는 여행 중인 인사들 가운데 모임 소식을 듣고 참가해 일본의 과거사 반성과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기원해 박수를 받은 이들도 있었다. 이날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모든 참가자들이 촛불을 든 모습이었는데, 최근 몇 년간 국내의 각종 집회에서 익히 보여준 우리의 평화시위 방식이 세계적으로도 호응을 얻을 수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평화시위를 바라보는 일본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지나치는 호기심 수준이거나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지만, 개중에는 위안부 문제 등이 '날조'되었다며 오히려 행렬에 다가와 욕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다. 특히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우익인사들은 격렬히 항의하기도 해 한때 충돌이 우려되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 경찰이 행진 대열과 우익인사들의 사이를 잘 막아내 별 문제 없이 행사가 끝났다.
필자는 행진 중에 스페인에서 온 '나쵸'라는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행사의 의미를 충분히 알고 있다며 휴식 중인 친구들과 헤어져 행진에 동참하는 중이라고 했다. 또 아키모토 미노루라는 일본인 남자는 행진 중에 일본 기업의 한국지사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쟁의에 관심을 가져줄 것을 당부하는 유인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또 한국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한 일본인 여성은 최근 일본사회가 보수우경화하면서 사회진보를 위한 운동의 기운이 많이 약해지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평화를 갈망하고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시민들의 교류는 이처럼 밑에서부터 건설되고 있었다. 대중문화산업의 교류만이 '교류'인 것처럼 선전되는 이 마당에 '국가와 기업'이 꿈꾸는 것과는 전혀 다른 연대가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8월 14일에는 정오부터 메이지공원에서 콘서트와 장터 및 전시회, 일제의 침략에 희생당한 사람들을 위한 굿판 등이 열리고, 역시 전날처럼 오후 9시까지 촛불행진을 가졌다. 15일에는 오전 8시 30분부터 국적과 민족을 초월하여 이번 공동행동에 참가한 모든 단체들이 행진을 하며 대단원의 막을 내릴 예정이다.
이번 행사를 통해 야스쿠니반대공동행동이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한 새로운 축제마당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점이 무엇보다 가장 큰 수확이다. 특히 그동안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본의 양심적 운동진영과의 교류, 그리고 정당한 삶의 기회를 빼앗긴 아시아의 많은 사람들과의 연대는 동북아시아에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 민족주의(ethno-nationalism)에 대항하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의미가 매우 크다.
한편 야스쿠니 신사 앞에는 각국의 취재진이 12일 밤부터 고이즈미 총리의 참배 여부에 촉각을 곤두세우며 진을 치고 있었다. 과연 일본 정치인들은 국제적 우려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침략 만행을 미화시키는 신사참배라는 '정치적 쇼'를 계속할 것인지 일본 안팎의 세계의 주목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는 결국 15일 오전 야스쿠니를 찾아 임기 말까지도 세계의 양심과 정의를 거스르는 행태를 계속했다.
유골이 말하는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이번 공동행동이 끝나면 필자는 홋카이도로 날아가 '동아시아의 평화로운 미래를 위한 공동워크샵'에 참석하고, 일제강점기에 강제 연행되어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사망하여 암매장된 유골을 발굴하는 현장을 참관할 예정이다.
강제연행자들의 고통에 찬 삶과 죽음, 그리고 그들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려는 양심적인 일본인들과 한국인들의 노력은 이미 지난 1997년과 2001년간 두 차례의 작업을 통해 8구의 유골이 발굴하여 그 중 1구를 유족들에게 돌려주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강제연행자 문제에 대해 피해자와 가해자인 한일 양국의 정부가 보여 온 태도는 너무나 닮아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들이 반세기 이상 암매장된 채 있었다는 것도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이 그렇게 죽어간 배경에는 그 당시 세계를 지배하던 제국주의, 국가주의의 책임 못지않게 평화를 지속시키려는 노력이 부족했고 또 국제 사정에 무지했던 탓이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동북아시아의 정세에 둔감하며 평화를 향한 외침에 소극적인 모습이다.
100년 전 동북아시아 사람들이 전쟁의 기운을 눈치 채지 못하고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졌던 것과 같은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연예인의 '쌩얼'이 전쟁을 막을 수 있는가? 사회에 대한 넘쳐나던 관심을 가졌던 386세대는 자신들의 활동력을 왜 다음 세대에게 전해주지 못하고 있는가? 우리는 평화를 위한 교육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국력' 신장의 신화를 여전히 다음 세대에게 주입하고 있는가?
야스쿠니에 안치된 전범들은 동아시아에서도 변방으로 취급되던 일본을 세계 최고의 강국이 되게 한 사람들이다. 일본인들의 야스쿠니에 대한 참배는 한국인들의 광개토대왕에 대한 향수와 사실은 같다. 보다 더 크고, 더 강한 나라에 대한 집착인 것이다. 그러나 민중의 삶은 나라가 잘 되는 것과는 그다지 상관관계가 없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월남전이 한국 경제발전에 도움을 줬다지만 많은 월남참전군인들은 고엽제의 후유증조차 국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제 동북아시아에도 독일과 프랑스처럼 미래지향적이고 통합적인 역사를 만들기 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할 때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가 '국가'를 잊고, '인간'을 생각할 때가 되었다. 그 첫 걸음은 야스쿠니신사라는 빗장을 푸는 데서 시작할 만하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의 아이들에게 평화와 공존을 가르치는 소중한 경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평화는 평화로울 때 지켜야 한다. 지금 동아시아는 평화를 위한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야스쿠니신사는? 야스쿠니신사는 국가 유공자들, 특히 전몰자들을 국가의 신으로 격상시키는 과정에서 탄생한 근대 일본의 상징물이다. 야스쿠니신사는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것뿐 아니라 일본의 국교라 할 수 있는 신도(神道)의 총본산격으로 근대 일본인들의 정신적 구심체인 천황에 버금가는 역할을 하고 있다. 문제는 이곳에 동아시아 민중의 삶을 도탄에 몰아넣은 1급 전범들의 위패가 있으며, 일본 정치인들이 일본인들의 내셔널리즘을 강화하기 위해 주변국들의 중단 요구에도 불구하고 참배를 강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이곳에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전쟁에 참여한 동아시아 각국의 민중들까지도 일본의 부흥에 공헌했다 하여 합사(合祀)되어 있다. 현재 조선 출신 합사자는 2만636명, 대만출신 합사자는 2만7656명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이들에 대한 합사가 정당하지 않으므로 취하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은 1978년 대만의 한 관광객이 문제를 제기하면서부터였다. 야스쿠니신사의 강제연행자 합사 및 취하 문제는 현실정치가 문화적 관념 및 상징과 얼마나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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