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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도 자처 정치인들, '하수정치' 집어치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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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도 자처 정치인들, '하수정치' 집어치워라

[기고] 네티즌의 공격성은 율법적 단죄의 대상인가

탤런트 최진실의 죽음을 계기로 인터넷 상의 뜬소문이나 명예훼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이른바 '사이버 모욕죄' 신설의 필요성이 또 다시 제기되고 있는 모양이다. 역시 이 때를 놓칠세라 즉각적으로 이 법률을 서슬 퍼런 형태의 칼날로 벼려서 들고 나온 것은 현 정부의 공권력 담당자들과 여당 국회의원들이다. (이들은 언제나 '예상할 수 있는' 방식으로만 행동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희극적이다)

물론 여기에 찬성하는 네티즌들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항상 일이 터진 이후에 허둥대고, 게다가 자칫하면 선량한 국민 일반의 자유를 옭아맬 수도 있는 금기와 처벌 위주의 정책으로 실정법 만능주의를 양산하는 것은 가장 낮은 등급의 정치가 지닌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전국시대의 명의(名醫) 편작은, 그로부터 치료를 받아 완치된 고관대작이 당신이 최고라고 치켜세우자, 오히려 자신을 가장 낮은 차원의 의사라고 말한다. 그의 말인즉, 자신 집안의 삼형제가 모두 의사인데, 자신은 병이 생긴 이후에라야 고치고, 둘째 형은 병의 징후를 보고 조처를 취하며, 큰형은 미리 예방하니 큰형이야말로 천하명의요, 자신은 가장 하수라는 것이다.

국가정책을 통해 사회공동체의 안녕과 행복을 돌보는 일이 정치의 일이라면, 그에게 맡겨진 일이 사람의 건강을 보살피는 의사의 일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런데 우리 정치는 왜 이 따위 하수의 정치만을 양산하며, 게다가 그 정치를 통해 국민의 안녕과 행복도 보살피지 못하는가. 오히려 개탄스러운 일은, 의사를 자처하는 이 시대의 책임있는 정책담당자들이 국민에게 깊은 시름과 병을 만들어내는 독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 교회의 장로가 대통령을 하고, 그 사람과 한 교회에서 수십 년 종교적 우정을 다진 친구가 경제 정책의 최고책임자가 된 나라에서, 가장 비정하고 탐욕스러우며 저열한 율법의 정치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은 이 무슨 난센스인가? ⓒ프레시안

원한의 사회학

이른바 '사이버 모욕죄'에 대해 잠깐 생각해 보자. 최진실 자살의 직접적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를 정확히 알기는 어렵겠지만,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그 주요 요인 중 하나가 사이버 상에 떠도는 괴담과 악의적 소문 때문이라는 것은 어느 정도 개연성이 있어 보인다.

그러나 정말 처벌에 관한 법률을 신설 또는 강화하자는 정치인들의 주장대로 사이버 상의 악성 루머나 악의적 댓글이 그렇게 크게 염려가 된다면, 소 잃고 외양간이나 고치거나 눈 가리고 아웅이나 하는 식의 쇼맨십을 중단하고(게다가 이 법률 제안의 의도에 저열한 정치적 잇속이 한몫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 아닌가), 이렇게 확산되고 있는 사회적 '병리 현상'의 근본원인에 대해, 좀 더 진지한 숙고를 해 봐야 할 것이다.

물론 이들 중 어떤 이들은 이번 일을 계기로 최진실이 앓고 있었다고 하는 '우울증'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아, 그러세요…) 하지만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최진실의 우울증이 아니라, 정부가 색출하고 단죄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는 이 네티즌이 오히려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사실이다.

무슨 소리냐고? 인터넷 상에서 유포되고 있는 악성 루머나 악의적 댓글, 특히 연예인들에 대한 것들은 사실 특정 한 연예인에 대한 악의 때문이라기보다는, 연예인이라는 직업 일반에 담긴 대중의 질투와 시샘 때문이다.(질투와 시샘은 '동경'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이 질투와 시샘이 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갈 정도의 지나친 공격성을 띠고 있고 이것이 사이버 공간 전체에 (그들 주장대로)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면, 이는 연예인들의 삶과 악의적 댓글을 쓰는 사람의 삶 사이에 놓인 지나친 격차가 만드는 현실적 좌절감이 주요인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연예인의 삶에 대한 시샘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이런 공격성에는 원한의 사회학이라고 할 정도로, 사회적 삶 일반의 상황이 그 시샘을 도저히 보상해 줄 수 없을 만큼 지나치게 팍팍해졌다는 현실이 개입되어 있는 것 같다.

<화씨 911>로 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바 있는 마이클 무어는 콜롬비아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에서, 불특정 다수의 사회구성원을 향한 이 예민한 공격성의 발원지는 정작 한 개인의 심성 자체가 아니라, '불안감'을 확산시키고 그 불안감을 이용해 치안정치를 강화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미국 정부의 정책이라고 주장한 적이 있다.

물론 훨씬 더 앞서 20세기 초에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는 문명 속에 내재하는 불만과 공격성은 개인의 원초적 행복감을 억압하는 법의 존재 자체 때문이라고 분석한 바 있으며, 그의 성찰을 이어받아 일련의 사회철학자, 정신분석학자들은 끔찍한 유대인 학살이라는 파시즘의 등장을 총칼이 아니라, 사회구성원들이 얻지 못한 행복감의 결여와 억압이라는 정신병리학적 현상의 '필연적' 결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이 사건을 보며 우려하는 바도 바로 이것이다. 최진실의 자살 사건은 그의 우울증 이면에,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공격성과 우울증을 드러내는 역설적 증거가 되는 사건이라는 차원에서 주목을 요한다. 그리고 이것은 근원적인 차원에서 볼 때, 오늘날 우리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는 삶의 불균형과 공정성의 훼손, 노동과 공공적 가치의 실종이라는 사회적 삶의 황폐화와 분명한 연관성을 갖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이 '병리 현상'은 오늘날 세계자본주의 일반의 사회적 현상이 되어가고 있기도 하다.

공격성의 뿌리

필자는 연예인들이 버는 돈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도 가지고 있지 못하므로, 부득이하게 외국의 한 예를 들 수밖에 없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물론 이것은 우리 연예인들의 현실과도 다른 극단적인 예일 수 있다) <뉴욕타임스>의 국제 분야 전문기자 토머스 프리드먼은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에서, 미국 농구 스타 후안 하워드가 1996년 마이애미 히트로부터 처음 제의 받은 7년간 연봉은 9800만 달러였다고 밝히고 있다.(최종적으로 그는 1억 2000만 달러에 계약한다). 그런데 이 돈이 얼마나 큰 액수인가 하면, 미국 초등학교 교사 평균 급여의 3267년치라고 한다.

3267년? 무슨 공상과학 영화를 찍나? 그 시간은 과거 사건으로 치자면 예수가 탄생하기 1200년 전이고, 소크라테스 탄생 700년 전 즈음이며, 아이네이스가 트로이를 탈출했던 시기로서 그로부터 500년이나 지나서야 겨우 로마가 건국된다. 이 시기는 또한 구약의 시대로서 이집트에서는 람세스 2세의 지배에 맞서 모세가 헤브라이인들을 데리고 탈출을 감행하는 사건이 있었다. 그때 중국 대륙은 막 청동기 시대를 지나고 있었고, 한반도는 아직 신석기 시대였다. 미래로 치자면? 글쎄, 3267년 후 인간이 살고 있으려나?

굳이 우리와 아주 딴별에 사는 스타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게 단지 스타들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인의 시각으로 써진 책임에도 불구하고, 프리드먼은 이 현상을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시장에서 약탈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승자 싹쓸이(winner take all)'의 한 징후적 현상임을 뼈아프게 인정한다.

이 책에 따르면, 1960년만 해도 부유한 나라에 사는 세계 인구 20%의 소득이 빈곤국에 사는 세계 인구 20%소득의 30배였으나, 1990년대 중반에는 82배로 증가한다. 브라질은 전체 국가소득의 62%를 상위 소득계층 20%가 가져가며, 러시아는 상위 소득계층 20%의 국가소득 비중이 하위20% 계층의 11배를 차지한다.

물론 남의 나라 일만은 아니다. 우리의 경우, 2002년 이미 인구 대비 주택보급률은 100%에 이르렀으나 아직도 제 집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이 42%에 이르며(2003년 말 기준, 수도권은 50.4%), 집값은 2002년에서 2008년 사이 불과 5년 만에 두 배가 되었고(국민은행통계), 비정규직의 비율이 50%를 훌쩍 넘어선지 이미 오래이며, 상위 직업(급)과 하위 직업 사이의 임금 격차가 수천 배에 육박하는 경우도 적잖지 않다.

예컨대 삼성전자의 임원진 연봉은 50억 이상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나, 삼성과 혈연적 친연성을 가진 이마트나 홈플러스 비정규직(매장 판매원들의 대부분은 비정규직이다) 시급은 4000원 내외이고, 하루 8시간씩 꼬박 30일을 벌어도 100만원 내외이다.(현재 한국 맥도널드 '알바'의 시급은 최저임금 3770원이다)

물론 남 말할 것도 없다. 필자는 두 군데 대학 강사를 하며 공식적으로(이런저런 비공식적 '알바'를 한다. 아니, 하지 않을 수 없다) 직장으로부터 받는 급여는 한 달에 100만원이 채 되지 않으며, 연봉으로 치면 방학 기간 넉 달은 '무급 휴가'로 처리되어 지난 몇 년 동안 800만원 정도를 넘지 않았다.(월급이 아니라 '연봉'이라는 점에 주의하시라)

며칠 전 국제노동조합총연맹(ITUC)은 좀 더 구체적이고 치욕적인 발표를 했다. 2006년 기준 우리나라 저임금 노동자 비중은 24.5%로 OECD 평균 17.9%를 크게 웃돌았고, 2007년 연간 노동시간은 2261시간으로 OECD국가 중 1위를 차지했으며, 2004년 기준 인구 10만명 당 산재 사망자수는 30.8명으로 2위 멕시코의 12명보다 2배를 훨씬 넘었고, 성별 임금격차도 2004년 2005년 기준으로 연속 1위를 차지했다. 이와 관련해 고위직/관리직 여성비율 역시 OECD 가입국 중 꼴찌를 차지했으며, 공적 사회복지 지출 비율 꼴찌, 비준한 국제노동협약 수와 노동조합조직률 역시 각각 28위와 29위로 최하위 수준이었다. 이런 사회의 구성원으로 살며, 불안과 불만과 우울증과 공격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은 해탈한 도인이 아닐까?

저열한 '율법의 정치'

최근 촛불시위에서 매우 놀라운 시적 순간이 있었다. 천주교 사제단이 서울시청 광장에서 미사를 집전하던 때였다. 수십 일 동안 계속되던 국민의 애타는 요구와 절박한 기도는 교활하고 오만한 정책 담당자들에게 무시되었고, 그 무시는 상처와 병이 되어 결국 시위 현장에 폭력이라는 공격성으로 되돌아오려 하고 있었으며, 급기야 그것은 폭발 일보 직전이었다.

사제단은 미사를 집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단지 여러분을 위로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나는 그때 그 미사를 어머니와 함께 집에서 인터넷 중계로 지켜보았는데, 미사를 집전하는 신부님의 말씀에 나도 모르게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말았고, 그 눈물은 좀처럼 멈추기가 힘들었다.

반복해 말하건대, 정신분석에서 공격성은 결핍과 상처의 외적 징후로 해석된다. 때로 그것은 사회의 상황적 요인에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차원에서, 최근 자주 언급되고 있는 것과 같은 '우울증 유전자'와 같은 생물학적 요인만의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내가 보기에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확산되는 폭력적인 집단적 감수성을 특정 개인의 품성이나 교육 부재의 문제로 보는 것은 지나치게 단선적인 것 같다. 이는 문명화된 도덕이라고 할 에티켓 차원의 문제라기보다는, 훨씬 더 심각한 사회적 요인들이 결부된 '사회적 병'인 것 같기 때문이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 병의 치유에 필요한 것은 한 개인을(그러나 '네티즌'은 인터넷을 쓰는 우리 모두이기도 하다) 단죄하는 사후적이고 가혹한 일벌백계의 강압적 율법이 아니라, 사회 자체를 도덕적 기풍과 사랑의 감수성이 흘러넘치는 방향으로 전환하는 일인 듯하다. 더 간단히 말해, 우리 모두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그것은 온갖 형태의 특수이익에 매몰된 권력과 협잡의 정치, 저열한 수준의 경쟁을 통한 승자독식의 정책을 즉각 중단하고, 약자의 눈물을 닦아주고 사회적 신뢰와 공공적 가치를 복원하며, 정의를 건설하고 정신의 가치를 옹호하는 사랑과 연대와 품위의 정치를 어서 회복하는 일 외에 다른 것일 수 없다.

교회의 장로가 대통령을 하고, 그 사람과 한 교회에서 수십 년 종교적 우정을 다진 친구가 경제 정책의 최고책임자가 되며, 그들을 끔찍하게 존경하는 이가 서울의 교육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는 나라에서, 가장 비정하고 탐욕스러우며 저열한 율법의 정치가 행해지고 있다는 것은 이 무슨 난센스인가?

그들은 메시아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하는가 보다. 그럴 리가 없다. 메시아는 가난하고 핍박받는 예수의 모습으로, 무한자인 신이 유한한 인간의 모습이 되어 이미 낮은 곳으로 임하지 않았는가. 그처럼 살면서 그의 진정한 제자가 되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있을 뿐이다.

약자의 얼굴에 흐르는 가난한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고 오히려 그들을 핍박하는 이들이, 설령 예수가 눈앞에 서 있다고 한들 그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정치는 예수에 대한 가장 극단적인 모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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