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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정책이 아니다"

'하면 된다' 외교가 빚어 낸 ARF 성명 수정 파문

망신, 미숙, 뒷북, 난맥, 결례, 헛발질, 섣부른 외교…

싱가포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드러난 이명박 정부의 외교 행태를 질타하는 수식어들이 26일 거의 모든 언론을 장식했다. ARF 의장성명에 있는 '10.4 남북정상선언 지지' 항목을 빼기 위해 '금강산 피격 관심 표명'까지 포기해 버린 물귀신 외교를 두고 하는 말들이다.

(☞관련 기사 : '엽기적인' MB외교…'금강산 피격' 포기할 정도로 10.4선언 싫다?)

이같은 평가에는 보혁과 여야가 따로 없었다. <조선일보>는 팩트만 밋밋하게 전했지만, <중앙>은 '스타일 구긴 외교'라 평했고, <동아>도 '외교력 한계 드러냈고 남북관계의 후유증이 우려된다'고 썼다. 중도나 진보 성향의 언론들은 말할 것도 없다. 한국의 언론들이 어떤 외교 사안에 대해 이처럼 논조의 일치를 본 것은 드문 경우다.

정치권도 마찬가지였다. 민주당과 자유선진당, 민주노동당 등은 이틀 연속 대변인 논평을 내놓으며 '외교적 재앙'을 개탄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한나라당까지 나섰다. 차명진 대변인은 "(금강산 사건에 관한) 외교당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10.4선언과 산술적으로 균형을 맞춰 삭제한 것은 유감"이라고 말했다.
▲ 이명박 정부의 외교·대북정책이 또 한번 도마위에 올랐다. 이명박 대통령과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 ⓒ연합뉴스

10.4선언 들어갔다고 누가 뭐라 했나?

이는 금강산과 10.4선언 항목이 모두 들어 있는 의장성명이 나왔던 하루 전날의 반응과 확연히 다른 것이었다.

25일에도 정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없진 않았다. 북한과의 외교전에서 패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평가는 의장성명이 10.4선언에 대해서는 "강력한 지지"를 표하고, 금강산 사태에 대해서는 "관심을 표명한다" 정도에 그쳐, 표현의 강도를 따져볼 때 패배였다는 것이지, 두 항목을 다 넣은 것 자체가 잘못됐다는 건 아니었다.

의장성명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그저 '고생했네' 정도였다. 다자외교 무대에서 '금강산'이라는 양자간의 사안을 말하고 다닌다는 것이 무리수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라별로 입장이 갈릴 수 있는 '네거티브'한 이슈를 의장성명에 넣은 것 자체를 나무라는 목소리는 없었다.

10.4선언이 들어갔다고 비난한 언론도 없었다. <조선일보>의 경우 '금강산을 넣어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했을 뿐, 10.4선언이 들어간 것을 시비하지 않았다. 다른 모든 언론들은 '금강산'과 10.4선언 두 항목이 모두 들어갔다는 사실만 전할 뿐 별다른 평가를 내리지 않았다. 정치권에서도 별 말이 없었다.

악순환의 회로에 갇히다

그렇게 그냥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을, 두 항목이 다 들어간 게 외교적 패배였다는 걸 확인시켜 준 것은 다름 아닌 이명박 정부였다. 외교 결례를 무릅쓰고 10.4선언의 삭제를 꾀함으로써 원래 나온 의장성명이 한국 협상팀 입장에서 볼 때 '실패작'이었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결국 '금강산'까지 놓치면서 완패를 당했다. 오늘의 여론은 그같은 엽기 행각이 가져온 결과다.

<중앙일보>의 26일 보도에 따르면 청와대는 "금강산 문구 외에 10.4선언이 함께 포함될 경우 득보다 실이 많다"는 의견을 싱가포르 현지 대표단에게 제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종 득실을 따져 볼 때 청와대의 그런 계산은 덧셈과 뺄셈을 구분하지 못한 오산이었다.

언론의 비난이나 외교적 결례가 문제의 전부는 아니다. 그건 그저 한 차례 '푸닥거리'로 끝날 수도 있다. 여기서 보다 더 큰 문제는 이같은 행태가 북한에 던지는 메시지이다. 즉, 이명박 정부는 스스로 그토록 중시하는 '금강산 해결'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10.4선언을 거부한다는 시그널을 북한에 보낸 것이다.

이는 6.15선언과 10.4선언 등의 이행에 관해 북측과 협의할 용의가 있다는 이명박 대통령의 국회 연설과도 배치되는 것으로, 금강산 사건을 계기로 대북 강경노선을 본격화하겠다는 신호탄으로 해석되고 있다. 북한의 반응은 불을 보듯 뻔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해서 남북관계가 파탄난다면, 금강산 사건의 해결도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악순환의 회로 속에 갇힌 것이다. 이렇게 '금강산'과 '10.4선언'은 비단 ARF 의장성명에서만 삭제된 게 아니라 현실에서도 날아가 버렸다.

확성기 들고 고함만 치는 MB외교

이명박 정부가 이같은 자충수를 둔 표면적인 이유는 ARF라는 다자무대에 '금강산'이라는 양자 이슈를 가져갔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국제공조'로 금강산을 푼다는 목표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이다.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민주당의 송민순 의원은 지난 24일 "정부가 대외정책, 대북정책을 할 때는 선전적 차원이 아닌 실제 일이 되도록 해야 한다"며 "정책이라는 게 확성기로 외쳐서 되는 게 아니다"고 말했다. ARF에서 금강산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실효성이 없다는 지적이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도 24일 "남북간 문제를 국제사회에 들고 나가려고 했던 발상이 문제"라며 "집안싸움을 가지고 동네에 나가 고함을 질러대면 '너희끼리 잘 해봐라'는 식의 얘기밖에 더 나오겠느냐"고 말했다.

10.4선언의 삭제를 요구하자 '그럼 금강산도 같이 삭제하자'는 싱가포르 외무차관의 역제의는 정 장관이 지적한 '너희들끼리 잘 해봐라' 식의 태도였던 것이다.

'국내정치처럼 하는 외교'와 '국내정치용 외교'

이같은 외교 재앙을 불러 온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이명박 정부가 외교나 남북관계마저 국내정치를 하듯 접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촛불집회와 <PD수첩>을 찍어 누르듯, 이미 나온 의장성명도 수정해달라고 '떼만 쓰면' 되는 줄 아는 인식이 화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외교는 이해관계가 다른 주권국가들을 상대하는 게임이어서, 이명박 정부에게 그리 호락호락한 게 아니었다.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순진한 대일(對日) 메시지는 독도 도발을 막지 못했고, 싱가포르에서는 '10.4선언을 빼달라'고 요구하자 '그럼 북한을 고려해서 금강산도 빼자'는 답변을 들어야 했다.

또한 외교를 '국내정치용'으로 이용만 하려고 한다는 점도 지적되고 있다. 다자무대에서 양자 현안을 꺼내는 게 실효적인 건지 계산하지도 않은 채 그저 국민들에게 열심히 하는 모습만 보여주면 된다는 '막무가내' 외교, 북한에 대한 분노를 보여주는 게 정책인 줄 아는 자기만족적 대북정책이 문제라는 것이다. 송민순 의원은 지난 6월 "분노나 마음가짐(attitude)은 정책이 아니다"라는 말로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을 꼬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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