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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낭만과 계몽의 광장, 그리고 미디어/문화정치의 고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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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낭만과 계몽의 광장, 그리고 미디어/문화정치의 고민들

[토론회 발제문] '민주주의와 공영방송, 그리고 미디어 공공성'

1. 확성기 vs 다음(多音) 협연 광장

우리가 광장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광장 어디쯤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 관찰하기. 연인을 기다리기. 매스미디어 시장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매스미디어 스타들보다 더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주는 거리의 음악가들의 음악 듣고 따라 부르기. 삼삼오오 모여 앉아 술 한 잔과 함께 하는 담소. 이런 저런 주장을 펴는 사람들의 이야기 들어주기......그리고 광장을 산보하며 이 모든 것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스쳐 지나가며 듣고, 보고, 말하고, 느끼고, 찌푸리고, 웃고, 화내고......물론 광장이 범죄자를 사형시키거나 처참한 고문의 장소로 이용된 적도 많았다. 어찌되었든 광장은(그것이 크든 작든, 대도시에 있든, 시골 마을에 있든지 간에) 수 없이 많은 말과 사건, 경험을 발생시키는 생동하는 장소임에 틀림없다.

광장은 항상 정치적인 장소이다. 특히 많은 사람들의 동의와 지지, 참여가 필요한 정치적 행위는 항상 광장을 필요로 한다. 그곳에서 무엇인가가 공개되고, 비난받으며, 이에 맞선 사고와 행위가 주장되어진다. 우리는 이같은 행위를 다른 곳에서도 할 수 있지만, 그런 다른 곳에 대한 억세스는 제한되어 있는 반면, 광장은 상대적으로 억세스가 자유롭고 이곳에 참여하는 사람들 또한 '누군가에 의해 걸러지지 않은' 작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겐 광장이 필요하고, 그 광장의 자유와 해방이 필요하다. 누군가에 의해 소유되고, 통제되며,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그런 광장이 아니라 누구나, 어떤 말과 행위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그런 광장 말이다. 그렇다고 광장이 난장판은 아닐 것이다. 광장의 소중함을 아는 이들은 광장을 함부로 다루지도 않으며, 광장에서의 자기 윤리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광장에서 포옹과 키스는 하지만, 섹스는 하지 않는다(한 두 경우를 가지고 과장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런 생각에 쉽게 동의할 수 있지 않을까).

광우병을 유발할 수 있는 미국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인민들의 촛불은 서울을 비롯한 대도시의 광장과 거리를 밝히고 있다. 이 인민들의 정치적 성향, 이해관계, 계급, 성, 세대, 직업 등이 다양한 만큼 촛불의 색깔 또한 다채롭다. '어떤 촛불'이 다른 촛불들을 대표하지도 않으며, 각각의 촛불들은 그 자신의 내용으로 채워지지만 거대한 광장에서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정치적 요구를 위해 타오른다. 서로 다른 것들이 하나의 목적으로 합류해 있는 실질적인 '무명씨'들의 '자기 이름 밝히기' 연쇄 물결은 그동안 정치적 과정으로부터 배제되고 무력한 상태에 머물러있던 대다수 인민의 정치적 주체화의 계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 무명씨들은 이제 먹거리 안전 문제에 머물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에워싸고 압박하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드러내고, 토론하고, 이에 대한 입장 만들기의 장구한 정치에 참여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인민들의 촛불집회는 대운하, 공공부문 민/사영화, 의료보험 민영화, 공영방송 지키기, 교육 공공성 등의 전 사회적인 아젠다를 둘러싸고 확산되고 있다. 하나의 이슈로부터 시작해서 이렇게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에 대해 인민들의 집단적-직접적 의견 표명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제도 정치 영역 외부에 존재하는 (국민, 시민, 대중, 다중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던) 인민들, 특히 87년 이후 인민들의 집단적인 광장 정치가 점차 사라져 가던 상황에서 인민의 광장 정치의 발흥은 참으로 많은 집단을 당혹스럽게 하고 있다. 특히 자신감있게 새 정권을 출범시킨 권위주의 우파 헤게모니 블록(1)의 당혹스러움과 불안은 어떤 집단보다 더 크고 강력할 것이다.

권위주의 우파 헤게모니 블록의 당혹스러움과 불안은 권위주의 우파 헤게모니 자체의 중대한 위기가 발생할 경우, 인민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억압 행위로 전환될 가능성이 크다. 공직과 사회 요직의 '자리권'을 활용하거나, 학계와 언론계 등의 문화적 영역의 재구조화를 통해 우파 헤게모니 블록의 인적 네트워크를 확장/견고히 하고, 우파 헤게모니 저항 집단을 무력화하고자 했던 정권 초기의 계획이 (그들이 보기에) '대수롭지 않은 문제일 것 같은' 쇠고기 수입 문제에 부닥쳐 흔들리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오늘도 확성기 볼륨을 높인 채 자신들의 녹음기를 틀어대고 있다. 아침녘 징그럽게 흘러나오던 새마을 노래 그리고 그 확성기.

반면, 인민들은 이제 확성기를 조롱한다. 그들은 우파 헤게모니 블록의 확성기에 맞서, 그 확성기가 지나간 새마을 노래에나 어울린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인민들은 이제 기존의 신문과 방송, 온라인 뉴스 매체와 다양한 인터넷 사이트, 모바일과 와이브로 등의 그야말로 다매체 다채널의 교통망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활용하며 창안하면서 '다음 협연'의 정치적 광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90년대 이후 한국의 역대 정부와 기업들이 그토록 외쳐댔던 다매체 다채널의 미디어 환경이 촛불 거리와 광장을 서로 이어주고 이들 사이에서 다양한 화음과 변음들을 발생시키는 인민들의 무기가 될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촛불집회와 거리와 광장의 정치는 그동안 생활세계를 포위해 가는 전자 상업 미디어나 인터넷 미디어에 대한 비판의 시선들을 움츠려들게 하고, 당황스럽게 만들고 있다. 광우병 촛불집회 사건은 어찌되었든 언론학과 문화연구가 전자 미디어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일정한) 비판적 시각들에 도전하고 있고, 또 미디어에 대한 많은 전통적인 가설과 믿음들에 의문 부호를 던지게 하고 있다.

광우병 촛불운동은 한편으로는 ①정치적, 문화적, 생활세계적 차원에서 미디어 장 내부의 질서 재편을 가져올 것인지, 가져온다면 어떤 모습일지 ②미디어와 인민 간의 관계 이동을 가져올 것인지, ③인민과 제도 정치 집단 간의 관계 이동을 가져올 것인지에 대한 관심을 유발하고 있다. 또 우파 헤게모니 블록은 언론과 인터넷 미디어에 대한 통제 욕망을 더욱 강하게 느끼고 있으며, 이 방법을 놓고 보수 정치 집단의 고민은 더욱 커질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이 글은 광우병 촛불집회의 시작과 확장 과정을 경험하면서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인민의 정치적 공론장으로서의 가능성과 기존의 저널리즘의 양식과의 긴장과 대립성에 주목해 보고자 한다. 또 이 글은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를 매개로 확장된 광우병 촛불집회가 비판 언론학과 문화연구에 본격적으로 질문하고 있는 몇 가지 주제들을 정리해보고자 하며, 마지막으로 여전히 당혹스러운 질문으로 남을 수 밖에 없는 문제들을 제시해 보고자 한다.

이 글은 관계와 비교, 긴장과 대립의 관점에서 구성되고 있다. 즉, 촛불운동 그리고 이후의 정치적 커뮤니케이션 양식의 변화를 염두에 두면서, 미디어 간의 관계가 어떻게 변할 것인지, 또 미디어 간의 저널리즘 양식에 어떤 차이가 발생할 것인지, 그리고 이들간에 어떠한 긴장과 대립이 형성될 것인지 하는 관점을 가지고 이 글이 구성되었다.

2.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인민의 정치적 광장과 공론장의 가능성

1) 아고라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아고라(Agora)'는 '모이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의 중심에 있는 광장을 의미하며, 정치적인 광장과 시장을 겸한 공간이다. 아고라는 동시에 아고라를 가진 그리스인과 그렇지 못한 비그리스인의 구별점이기도 했다. 로마의 포룸(Forum)은 이 아고라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Daum을 위시한 많은 인터넷 포털과 인터넷 사이트들은 수 많은 누리꾼들의 정치적인 광장이자 이들을 대상으로 한 상품과 정보 시장의 공간으로서 아고라를 다시 불러내고 있지 않은가? 또 정치와 시장은 원래 한 몸에서, 한 공간 속에서 출현하고 발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까? 우리네 시장의 역사를 되짚어 봐도 그럴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시장은 뜨거운 정치와 논쟁, 토론, 거래와 타협, 협상과 양보, 새로운 정보와 소문, 속임과 이 속임수에 대한 인지, 유행과 대중 참여가 가장 활발하게 이루어졌던 공간 아닌가?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는 어느 한 명이나 소수 집단이 정치적 아르케(arche)(2)의 설립 기준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개별 시민들이 가지는 형태를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실험했다.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아르케를 배타적으로 독점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를 아르케의 다원주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르케의 다원주의는 사회적 지배계급에게는 사회의 통합성의 약화나 권력의 분산에 따른 부조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테네에서는 시장이자 정치적 광장인 아고라에서 주요 권력 원천들의 경쟁과 충돌을 통해 이 문제를 해소하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아고라를 통해 쟁론의 형태로 이루어지던 광장 정치는 아테네라는 국가의 성격을 바꿔 놓았는데, '열린 광장'에서의 정치 행위가 일상화되면서 국가는 그 누구의 사적인 소유물에서 벗어나 사회적 공간으로 변화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사회적 공공영역의 출현이 곧바로 민주정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이 사회적 공간이 극히 제한적이며 아르케를 소지하고 이를 쟁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집단에게 국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유력 권력자들과 아르케 생산 집단들의 판단과 주장에 반대하거나 참여하는(cf. 반성태, 2007, 101-102쪽) 시민들의 교통의 장으로서의 역사적 의미를 매우 크다. 특히 아고라에서의 논쟁과 연설이 청중 앞에서 이루어지고, 이때 청중들이 심판관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시민들이 정치적 소통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었다고 볼 수 없다. 오히려 청중은 이 공공영역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었을까? 아고라의 논쟁과 연설을 듣고, 판단내리는 청중이 없다면 아고라의 논쟁자들과 연설자들 또한 이 공공 커뮤니케이션 행위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도시의 건축물의 배치가 이전의 왕궁이 아니라 아고라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이 말은 도시가 공공 커뮤니케이션의 행위와 공간의 중요성을 깨닫기 시작했으며, 공공 커뮤니케이션의 활성화가 민주주의의 핵심 동력의 하나로 인식되었음을 의미하지 않을까.아렌트(Arendt)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를 설명하면서 폴리스를 하나의 도시국가라는 물리적 장소라기 보다는 '말과 (정치)행위'를 공유하는데 관심있는 사람들이 함께 사는 '인식적 공간'이라고 본다. 폴리스는 개인이 다른 사람들 앞에 또 다른 사람들이 그 개인 앞에 출현하는 공간이며, 또 인간이 다른 생명체나 무생물처럼 실존하는 동시에 그들의 외견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장소이다. 따라서 폴리스는 공적인(public) 성격을 갖는데 이 영역의 특징은 첫째, 광범위한 공시성(publicity)인데 이에 따라 사사로운 감정이나 의견들이 변형되고 탈개인화되며 탈개별화된다. 반면, 공시되지 않는 것들은 음침하고 불확실한 실존의 양태에 불과하다. 둘째, 공영역이 공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세계 속에서 개인이 사적으로 소유한 장소와 구별되는 모두에게 공통된 세계임을 의미한다. 공동의 세계로서 이 공영역의 특징은 사람들을 함께 묶는 것이며 각자 흩어지는 것을 막는 것이다(서유경, 1999, 19-21쪽).

2)아고라에 대한 저항, 아고라의 축소, 공론장의 확장

시민들의 공공영역 대신 플라톤은 아고라의 퇴출을 주장하고 나섰다. 플라톤은 아고라의 민주주의 대신 철인왕의 지혜와 판단을 지지했다. 그는 "무지한 시민들의 오판을 염려하여 정의가 무엇인지 시민들에게 알려주고 이야기하는" 철인왕의 사회적 조망과 정치적 선택을 지지했다. 인간의 배, 가슴, 머리의 담당자로서의 생산자, 군인, 지배자의 세 계급의 사회적 분화와 분업의 조화자이자 지휘자는 플라톤에게 잇어서 철인왕이었다. 그는 '무엇이 무엇인지(똥인지 된장인지)를 알고 있고, 그래서 여전히 자신을 알아야 할 정도로 무지하다'고 생각하는(cf. 반성택, 같은 책, 119-127쪽),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계승한다.

과두정과 귀족정, 왕정은 사회에서 정치적 공동체를 사라지게 하고, 마을이나 소규모 결사체만이 사회적인 것으로 남게 만들었다. 인간은 정치를 떠나 윤리나 종교에서 인간의 행복을 구하게 된다. 반성택은 이에 대해 "서양의 사상적 흐름이 정치에서 시작하여 윤리를 거쳐 종교로 귀착되었다"고 주장한다(반성택, 같은 책, 134쪽). 과거 아테네의 공론장은 서양의 근대에서도 여전히 출현할 수 없었고, 근대 중반 이후 출현하게 된 공론장은 부르주아가 주도하는 공론장이었다.

하버마스가 서술하는 부르주아 공론장은 '공적 논의'라는 매체를 통해 공권력과 정치적 대결을 벌이는 부르주아 계급의 공론장이었다. 부르주아 공중이 공권력에 대항해 내세운 통치와 감독의 원칙이 바로 공개성이었으며, 이 공개성을 통해 공권력의 지배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했다. 부르주아는 자신들의 정치적 논의에 의해 공권력을 문제시하고 이를 정지시키고자 했다. 동시에 부르주아 공론장은 사적 개인들이 그들의 새로운 프라이버시에 대한 진정한 경험을 통해 자기 계몽하는 과정을 제공한다(Habermas, 1992/2001, 79-98쪽). 서구 사회에서 부르주아 공론장과 함께 사적 영역에서 시민의 자기의식이 싹트게 됨으로써 궁정의 대의영역을 대체하고, 이성에 의해 만들어진 영역이 공론장으로 간주된다(Hartmann, F., 2000/2008, 71쪽). 그런데 부르주아의 정치 공론장은 문예적 공론장으로부터 나온다. 문예적 공론장은 본래 부르주아 공론장은 아니었다. 문예적 공론장은 궁정의 과시적 공공성과 일정한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부르주아가 자신들의 무기로 내세웠던 공적 논의의 기술은 교육받은 중산층 부르주아 전위가 궁정이나 귀족 사교계와의 교류를 통해 학습한 것이다. 궁정과 귀족 사교계는 군주로부터 근대 국가기관이 자립화됨에 따라 점차 궁정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도시에 자리잡으면서 궁정에 대한 균형추를 이루게 된다. 이렇게 해서 도시는 단지 부르주아 사회의 경제적 생활의 중심부에 머무르지 않고, 커피하우스, 살롱, 만찬회, 단체, 협회, 학회 등의 제도화된 문화적 공론장의 장소가 되었다. 즉, 인본주의적이고 귀족주의적인 사교계의 유산들이 부르주아 전위들과 만나 새로운 부르주아 공론장의 초기 형태의 초석을 놓게 된다. 유럽에서 도시의 우위는 공론장의 사회적 기능을 맡았던 새로운 제도들로 공고화된다. 또 부르주아 공론장의 초기 제도들이 궁정으로부터 분리되는 귀족사교계에 묶여 있었던 반면에, 극장, 박물관, 연주회에서 형성되는 대공중(大公衆)은 보다 확대된 부르주아적 공중을 형성했다. 그리고 독서클럽, 독서회, 도서예약 도서관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 일간지와 잡지의 판매가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부르주아 공론장의 대중적 형태들이 확장된다(Habermas, 같은 책, 98-102쪽 인용 및 참고).(3)

부르주아 공론장은 이중적인 성격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부르주아가 재화와 사람에 대한 소유자인 동시에 인간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공중이 인간의 자격으로 그들의 주체성의 경험에 대해 의사소통하는가 아니면 사적 개인들이 정치적 논의에서 소유자의 자격으로 의사소통하는가에 따라 공론장은 다른 모습을 보인다. 또 이 두 가지 형식 또는 성격의 공론장이 가지는 인적 범위는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르주아의 문예적(인본적) 공론장은 정치적 공론장의 효율성을 매개하는데 기여했다(Habermas, 같은 책, 132-133쪽).

3)인민의 정치적 야당으로서의 인터넷 아고라(4) 와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의 잠재성

부르주아 공론장이 과시적 공론장(공공성)의 모태로부터 또는 이것과의 소통을 통해 조금씩 확장되고 변형되었던 것처럼, 현재의 다양한 사람들의 광장으로서 풀뿌리/인민 공론장은 부르주아 공론장의 자양분을 흡수하고, 이것과 소통하면서 진보한 보다 많은 '인민 공중'(5)의 광장일 것이다. 그리고 이 인민 공론장들은 부르주아 전위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민들의 전위(읽고 쓰고 표현하며 주장하는 인민과 생산자 계급, 중간계급 등)의 문예적 공론장이자 정치적 공론장으로 발전한다. 인민들이 읽고, 쓰고, 표현하고, 논쟁하며, 주장하면서 공권력에 맞서는 정치적 야당으로서, 그리고 인민 감정의 표출의 광장으로 기능하는 보다 많은 인민 공론장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정치적 야당'과 '인민 감정'이라는 용어는 하버마스가 인용하고 있는 볼링브룩의 진술 속에 포함되어 있다. 볼링부룩은 자신의 기고문(1730년대의 기고문)에서 '야당에 의해 계몽되고 지도된 인민의 공공정신을 권력자의 부패에 반대하는 자유의 정신'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 공공정신 또는 '수백만의 지식'이 절대 우스운 것이 아님을 강조한다.

"모든 사람이 이성적으로 논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느낄 수는 있다."(Habermas, 같은 책, 183쪽에서 재인용)

인민의 이러한 감정들은 공통 감각/공통 감정(common sense)로서 어떤 의미에서 그릇됨이 없다. 볼링브룩은 인민 감정이 정치적 야당이나 계몽가에 의해 공공 정신으로 형성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지만, 지금 확장되고 있는 인터넷 아고라는 인민들 스스로가, 그리고 이들의 공적 숙의와 토론이 정치적 야당이자 계몽가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올바른 것과 정당한 것에 대한 직접적이고 소박한 감각과 다른 한편으로 논증의 공적 실행을 통해 의견을 판단하고 명료하게 표현하는 것, 이 양자가 공공정신에서 함께 존재한다."(Habermas, 같은 책, 184쪽)

인터넷 아고라에서 발화하고 논의하는 공중은, 하버마스의 진술을 그대로 빌자면, '더 이상 단순한 의견이나 단순한 성향에 상응하는 것이 아닌, 공적 상황에 대한 사적 숙고와 그것의 공적 토론에 상응하는 것'이다(Habermas, 같은 책, 184쪽). 인터넷 아고라의 인민들이 서로의 발화와 진술, 주장과 의견에 대해 참으로 다양한 형식의 댓글과 비판, 찬성과 반대 투표 등을 통해 생각과 의견의 공공성을 형성해 가는 것을 보라. 전통적인 매스미디어 공론장을 이미 뛰어 넘어, 그래서 '이미 벌써' 우리에겐 인민들의 아고라가 확장되고 있다.

"광장이 헌법의 토대가 된다. 계몽된 공중의 공적 논의 그 자체가 아니라 광장으로부터, 즉 구두 동의를 보내기 위해 모인 공민으로부터 여론은 그것의 공공적 속성을 얻는 것이다."(Habermas, 같은 책, 191쪽)

인터넷 아고라(더 나아가 인민들의 더 다양한 아고라)는 이 안에서 공중이 구성되는 '세계'로 지칭된다. 칸트(Kant)는 이 공론장으로부터 세계지식과 세계인을 말한다. 세상물정에 정통한 세계시민주의 탄생이다. web 2.0, media 2.0, 집단지성과 참여군중 등의 최근의 유행어들은 사실 시대에 뒤떨어진 단어들인지 모른다. 그래서 궁금하다. 다음(next) 아고라는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출현할 것인지, 그리고 이 아고라로부터 어떤 정치와 도덕이 출현할 것인지.

3. 미디어 장 내외부의 긴장과 대립, 공공성의 구조변동

우리는 한국의 인민 교통의 양식에 있어서, 그동안 여러 이유로 그 가치를 폄하했지만, 장구하지만 급격한 변환을 경험하고 있다. 특히 지배적인 언론 양식, 지배 집단의 언론 양식은 인터넷과 모바일 뉴미디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인민들의 다양한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의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왜 그럴까?

1)말하기 vs 쓰고 말하고 보여주고 논쟁하기(multimedia communication)

플라톤은 쓰기(writing)를 도덕과 진리의 관심사를 위협하는 것으로 선언했다. 반면 음성언어를 진정하고 살아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플라톤이 쓰기를 두려워했던 것은 자신의 말이 기록되고 읽혀지고 다수에 의해 평가받을까봐 그랬던 것은 아닐까? 문자를 활용하게 되면 인간이 더 이상 기억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한다고 주장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핑계같다. 그래서 데리다(Derrida)의 음성중심주의(로고스중심주의)에 대한 지적(cf, Norris, C., 1987/1999, 40-46쪽)에 공감이 간다. 말하는 사람들은 주로 누구일까? 목사, 신부, 장로, 선교사, 상인, 기업의 총수, 관리 경영직 상사, 대통령, 관료, 강사/교수 등. 여기서 '말한다'는 것은 일방향적인 말함을 의미한다. 소통으로서가 아니라 전달, 공지, 명령, 요구, 강제, 협박, 위협, 자기 정당화, 설득, 통제의 수단으로서 '말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들의 '말하기'는 권력에 기초한다. 그들의 '말하기'는 근본적으로 권력의 말하기이자, 위협과 협박의 말하기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의 '말'이 가능하면 기록되지 않기를 바랄 것이며, 위협과 협박, 권력에 기초한 말의 위력이 크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그들은 다른 '더 큰 말(더 큰 위협, 더 큰 협박, 더 큰 자기합리화)'을 찾아 내뱉는다.

반면, 글쓰기는 로고스중심주의에서 비판하는 것과 달리 현존을 기록하고, 전파하고, 소통시키려는 사람들에게 필수불가결한 수단이다(Norris, C., 같은 책, 55쪽). 데리다는 더 나아가 문자와 글쓰기를 '고아의 지위를 가지며 자신의 복지를 아버지로부터 후원받지 못하는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문자와 글은, 호부호형하지 못하는, 로고스의 권위를 위협할 수 있다. 반면에 문자와 글이 담론의 기존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자신의 독립에 대한 모든 주장을 포기한다면(cf. Norris, 같은 책, 61쪽), 권력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 반대로 권력은 그리고 지배 질서는 문자의 축출을 그 본질로 하며 이 논리는 국가의 법률과 한계를 규정한다.

인터넷 아고라와 모바일 정치 커뮤니케이션은 고아와 서자의 지위로서 글쓰기, 그리고 이로부터 형성되는 소통적 말하기, 그리고 직접 보여주기 등의 멀티미디어 인민 교통에 기초한다. 멀티미디어 인민 교통은 일방적인 권력의 말하기를 중단시키고 로고스 중심주의가 형성해 놓은 인식과 판단, 정치의 틀을 해체한다. 멀티미디어 인민 교통은 그 자체로 글쓰기이자 말하기며, 이성이자 감성이며, 육체이자 정신이며, 주체이자 객체로서 로고스 중심주의의 이항대립을 전복시킨다. 또 인민들의 글쓰기, 새로운 말하기와 보여주기의 사회 커뮤니케이션의 양식은 차이의 유희를 긍정하게 하며, 이 차이의 유희를 억압하고자 하는 권력과 마주하게 된다. 인터넷 아고라는, 그리고 next agora(아마 모바일 미디어 또는 소위 융합형 미디어가 이런 잠재성을 가지게 될 것)와 모바일은 인민들의 멀티미디어적 교통 미디어로 전유될 가능성을 확대시키고 있다. 반면, 인민 교통 양식의 변환을 읽지 못하고 자신들의 로고스 중심주의의 부활과 부강을 꿈꾸는 전통적인 지배 언론과 지배 집단의 정치와 언론, 문화적 패배의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말이 끝난 후 쏟아지는 질문과 반박을 뒤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를 앵무새처럼 반복했지만, 새로운 공론장의 인민들은 결코 '여기까지'를 말하지 않는다.

인터넷 공론장과 모바일은 지금까지 전통적인 매스미디어가 형성했던 인민과 미디어 공론장과의 관계와는 다른 관계를 형성할 가능성이 크다. 즉 인민과 엘리트 간의 지식과 정보, 주장과 의견의 이동 형태가 변하고 있는 것이다. 하르트만의 지적대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절대적인 미디어'를 물을 수 없게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네트워크의 시대에서 미디어 개념은 더 이상 인간의 의족적 확장차원에서의 도구가 아니라, 미디어 개념은 어떤 질서 원리를 나타내는 메타포인데, 우리는 이 질서 원리에 따라 공지성을 형성하고 공론장을 만들게 될 것"이며, "오늘날의 미디어 환경에서 텍스트, 음향, 영상, 신체동작, 행동사건 등의 혼합이 자기와 자아를 형성시킨다"(Hartmann, F., 2000/2008, 25쪽과 35쪽)는 그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수사술 vs 문학

쇼펜하우어(Schopenhauer)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진실 하나. "토론술은 진리를 찾는 데 관심이 없다. 이것은 검객이 결투를 초래한 언쟁에서 누가 옳은가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는 쇼펜하우어가 비판하는 토론술의 자리에 수사술이라는 용어를 넣는다. 왜냐하면 현재 우리의 제도 정치와 지배 언론은 정치와 언론을 대체해 버린 수사술의 향연장이기 때문이다. 쇼페하우어가 역설적으로 개탄하는 토론술의 목록들을 보자.

*동기부여를 통해 의지에 호소한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권위를 최대한 활용한다
*논증이 안 된 내용을 기정사실화하여 전제로 삼는다
*자기에게 유리한 비유를 신속하게 선택한다
*불합리한 반대 주장을 함께 제시해 양자택일하게 한다
*내용이 없는 말을 심오하고 학술적인 말로 둔갑시킨다
*상대방의 대답을 근거로 자기 주장의 진실성을 확보한다
*'예'라는 대답을 얻어낼 수 있는 질문을 던진다
*상대방을 화나게 만들어 올바른 판단을 방해한다
*말싸움을 걸어 무리한 주장을 하도록 유도한다
*뜻밖의 화를 낸다면 그 부분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
*상대방의 침묵은 곧 상대방의 약점이다
*상대방의 주장을 최대한 넓게 해석해 과장한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해 교묘해 반박한다
*상대적 주장을 절대적 주장으로 바꿔 해석한다
*전문지식이 부족한 청중들을 이용해 반박한다
*상대방의 말과 행동이 모순되는 지점을 찾는다
*상대방의 논거를 역이용해 반격한다
*단 하나의 반증사례만으로 상대방을 제압한다
*사안을 일반화하여 보편적이 관점에서 반박한다
*상대방의 주장을 이미 반박된 범주 속에 집어 넣는다
*틀린 증거를 빌미삼아 정당한 명제까지도 반박한다
*상대방의 궤변에는 궤변으로 맞선다
*상대방이 자신의 결론을 미리 예측하지 못하게 한다
*결론을 이끌어내는 질문은 두서없이 한다
*참 전제가 안 통하면 거짓 전제로 결론을 도출한다
*거짓 추론과 왜곡을 통해 억지 결론을 끌어낸다
*근거가 되지 않는 답변마저도 결론의 근거로 삼는다
*개별 사실의 시인을 보편적 진리에 대한 시인으로 간주한다
*몇 가지 전제들에 대한 시인만으로도 얼른 결론을 내린다
*반격당한 부분을 세밀하게 구분해 위기를 모면한다
*상황이 불리하다 싶으면 재빨리 쟁점을 바꾼다
*상대방에게 유리한 논거는 순환논법이라고 몰아 부친다
*질 것 같으면 진지한 태도로 갑자기 딴소리를 한다
*반론할게 없으면 무슨 소린지 못 알아듣겠다고 말한다
*이론상으로는 맞지만 실제론 틀리다고 억지를 쓴다
*불합리한 주장을 증명하기 힘들면 아리송한 명제를 던진다
*인신공격의 최후의 수단이다.(Schopenhauer, 1864/2003)

이같은 토론술과 수사술을 우리는 매일 경험한다. 텔레비전 토론에서, 뉴스 인터뷰에서, 신문의 사설과 칼럼에서, 대통령과 관료들의 기자회견과 담화문 등에서. 그리고 이러한 수사술은 상기한 '말하기'의 주도자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인쇄매체를 마치 말하기의 매체, 수사술의 경쟁장으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음성 매체들을 소유하고 장악하고자 한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그리고 마을 방송. 그들은 이 음성 매체들을 통해 자신들을 등장시키고 엄숙한 목소리로 인민을 꾸짖고, 닥쳐올 위험과 미래의 불안들에 대비할 것을 요구하며, 자신들의 음성의 가르침대로 행할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음성 매체들이 인민에게 주어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서 인민은 항상 해적이다(해적 방송).

다른 한편으로, 이들은 음성 매체에 비해 더 통제하기 힘든 인쇄매체와 출판물, 인터넷을 경계하고 시시각각 감시하고자 한다. 검열을 일삼고, 정보통신법과 윤리를 내세우며, 사이트 차단과 게시글 블라인딩을 요구한다. 그리고 심각하다고 판단될 경우, 잡아들인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정치 광장을 철거하려고 하고 통제와 조작의 미디어로 대체된 뉴타운을 건설한다. 이 뉴타운에는 백화점과 대형쇼핑센터가 들어서 기존의 시장을 위기에 빠트리고, 시장으로부터 공론장과 정치를 축출한다. 뉴타운은 스펙터클의 장소로서 정치와 공론이 이루어지던 시장과 광장을 동시에 소멸시킨다. 청와대와 의회, 도청, 시청과 군청, 백화점과 쇼핑센터 중심의 도시 건축과 교통망의 형성은 아고라, 공공영역, 시민들의 대중교통망을 축소시킨다. 그리고 이 뉴타운 속에서 지배 언론과 지배자들의 스펙터클화된 수사술이 넘쳐 난다.

그런데 이 수사술이 공격에 직면하고 있다. 인터넷 아고라와 거리의 모바일 발화자들은 그동안의 일방통행식 수사술의 함정을 파고들어 비판한다. 화려한 기교로 채워진 이 수사술의 허점을 밝혀내고 근거없음을 드러내며 무력화시킨다. 보수 언론인들의 그럴싸한 수사술들은 인민들의 다각적인 검증과 비판 앞에 노출되고 토론되어진다. 그리고 그들의 거짓이 드러나고 그들의 '말의 정당성'이 위기에 처한다. 인터넷 아고라와 모바일 미디어는 긴 세월 쌓여 온 지배 집단의 수사술과 그들의 스펙터클 체계를 위기에 몰아넣고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새로운 언론의 토양이 형성되고 있다.

인터넷 아고라와 모바일 미디어를 통한 인민들의 멀티미디어 교통은 언론과 문학을 합성시키고 있다. 이들은 문학적 언론 양식과 공론장을 본격적으로 사고하게 만들고 있다. 밀러(Miller)는 문학은 본질적으로 폭력적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폭력은 즐겁다고 했다(Miller, J. H., 2002/2004, 41-42쪽). 기존의 지배 언론과 지배 계급은 인터넷 아고라를 폭력적이고 평화롭지 않으며 과잉되어 있고 지나친 감정에 도취되어 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그들의 말은 일부분 맞다. 인터넷 아고라는 문학적 교통장이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고 주장하는 언론관을 무력화시킨다. 문학적 교통장으로서 인터넷 아고라와 모바일 미디어에는 수 많은 개인들의 그들의 독특한 형상과 언어로 출몰한다. 인터넷 아고라와 모바일 미디어의 인민들은 자신의 삶 자체로부터, 경험 자체로부터 어떤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의 해결책을 요구한다. 삶과 주장, 경험과 언어의 거리는 매우 좁다. 따라서 그들의 언어는 더 진솔하고 직접적이며 따라서 폭력적이다. 또 그 문제를 직접 느끼고 경험하는 주체로서 자신의 언어와 판단에 더욱 도취될 수 밖에 없는 과잉된 주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 도취와 과잉은 거짓도 아니며, 사기도 아니고, 조작도 아니다. 문학이 거짓이 아니고, 사기도 아니며, 조작이 아닌 것과 같다. 오히려 거짓, 사기, 조작은 지배 언론과 지배 집단의 것이었다. 인간은 모두 그렇게 거짓과 사기, 조작을 행할 수 있는 존재이지만, 개인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 일회적인 것과 반복적인 것, 우발적인 것과 의도적인 것의 구분이 필요하다.

인간의 정치와 사회, 문화적 변동에는 신문과 성명서, 문학 작품들의 자유로운 출판과 유통이 있었다면, 지금은 전자메일, 휴대전화, 인터넷(그리고 next media)이 여기에 덧붙여진다. 인민들은 이제 이렇게 다양한 미디어와 아고라를 통해 훨씬 더 실험적이고 가설적이며, 동시에 분석적이고 과학적인 언어와 판단의 생산적 주체가 되고 있다. 우리는 이를 '문학적 언론 주체의 확장'이라고 불러보자. 언론의 중립성과 객관성의 이름 아래 교통보다는 정보 전달, 명령의 전달자에 머무는 것이 아닌, 현실에 대한 직접적이고 다층적인 참여와 경험, 해석과 판단, 주장과 요구, 결사와 행위로 연결되는 보다 완성된 교통 양식과 언론 양식의 시적 주체의 출현이다. 그래서 18세기의 서간체 소설이 서한체적 주체성을 재현하고, 낭만시가 서정적인 '나'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으며, 19세기의 소설이 화려한 형식의 3인칭 서술 주체를 탄생시켰다면(cf. Miller, 같은 책, 19쪽), 인터넷 아고라와 모바일 미디어에서 탄생하는 '1인칭의 서한체적이고 서정적이며 동시에 자신을 객관화할 수 있는 3인칭 판단과 서술 주체의 융합된 형태의 주체성'에 관심을 기울여보자. 또 인터넷 아고라와 모바일 미디어에서 출현하는 수 많은 비평가, 이론가, 분석가, 예술가들이 생산하는 정밀한 학술 저널리즘/비평 저널리즘/문학적 저널리즘이 다른 매스미디어의 전통적인 저널리즘에 어떻게 도전하고 새로운 저널리즘 형식을 창조하는지 눈여겨 보자. 이미 우리는 저널리즘 장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변환이 시작되었음을 알고 있다. 인터넷 아고라와 모바일 미디어는 우리에게 새로운 발화와 예술과 비평의 공간 그리고 이 비평의 공간으로부터 보다 많은 언론인과 언어의 생산자들이 출현하고 있다.
지배적인 언론 양식과 지배 집단의 커뮤니케이션이 짜여진 각본과 잘 만들어진 무대위에 캐스팅되는 '출연'의 형식이었다면, 인터넷 아고라와 모바일 미디어의 융합적 교통 주제들은 끊임없이 출현했다 사라지고, 다시 출현해 특정한 연합을 만들어내기도 예측할 수 없는 정치적 주체들이다. 출연으로서의 언론과 커뮤니케이션 행위자들의 말과 생각, 행위는 예측될 수 있지만, 출현하는 주체와 그들의 연합적 교통은 어떠한 정치적 계기와 사건을 만들어 것인지를 우리는 쉽게 예측할 수 없다.

"재기와 기지로 가득 찬 이들-그리고 이 기지를 틈나는 대로 아무데나 뿌리고 다니능 이들을 경계하라. 그들은 자기 안에 어떤 악령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우울이나 음산함, 울적함이나 침묵과는 거리가 멀다. 그들을 결코 촌스럽거나 바보같이 행동하지 않는다.(중략) 길들여지지 않은 피조물은, 그 우울한 멜랑콜리의 깃을 펴고 목청을 가다듬어 노래를 시작하며, 숲에 울려 퍼지는 그 노래로 밤의 침묵과 어둠을 깨운다."(Berlin, I., 1999/2005, 88-89쪽)

이 인용문은 디드로가 낭만주의의 천재에게 바치는 찬가라고 한다. 18세기가 과도하게 치켜세운 미덕, 온건함과 합리성, 중용, 균형 그리고 이 외의 모든 것에 대조되는 것이다. 루소는 인간이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가능한데, 그 진리는 사변이나 데카르트의 논리학으로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고귀한 야만인이나 어린아이, 또는 다른 그 누가 되었든 소박하고 순수한 인간의 마음 속을 들여야 보아야 알게 된다고 주장했다(Berlin, 같은 책, 88-89쪽). 인터넷 아고라와 모바일 미디어는, 벌린의 낭만주의관에 따르자면, 21세기의 낭만주의 버전을 만들어간다. 동시에 인터넷 아고라와 멀티미디어의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의 계몽적 주체들이 형성되는데, 이들은 스스로 지성과 의지, 취미의 주체적 계기들을 경험하고 있다.

이들은 매스미디어가 발견하지 못하는 것, 지배자들이 숨기는 것 또는 일부만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진실에 접근하고자 노력한다. 정보를 추적하고, 관련된 사실과 증거들을 모으고 공유한다. 어떤 한 사람의 주장에 대해 따져 묻고 파헤치고 질문을 제기하고 진실성을 요구한다. 이들은 이러한 사실과 진실에 도달하고자 더 많은 사람과 정보, 미디어에 접속하면서 자신들의 과학과 기술을 형성하고 활용한다. '참된 것'에 대한 발견을 위한 정보와 생각의 공유 여정은 끝이 없다.

이들은 또 사실과 진실된 것으로부터 '선한 것'을 묻고 이를 주장한다. 정부와 관료의 도덕성과 진실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정부와 관료의 도덕을 요구한다. 또 인민들이 배제되는 정치적 결정의 형식적 오류를 따져 묻고 수정을 요구한다. 또 시장과 무역의 규범을 사고하며, 인간의 삶의 가치와 공공선에 대한 고민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렇게 그들은 스스로 실천이성의 주체적 계기를 공유한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지금의 지배적 상징체계를 반박하고, 지배자들의 수사를 조롱하며, 지배 언론의 모순과 허구와 능력 부족을 밝혀낸다. 그들이 원하는 세계, 만들고 싶은 세계를 표현하고, 이 표현을 위한 매체와 통로, 수단들을 만들어낸다. 그들의 촛불, 그들의 짤방, 그들의 팜플렛과 선전물, 그들의 신문과 인터넷 광고, 그리고 그들의 기호는 그들의 희망을 표현하는 예술과 비평의 행위들이다. 광우병 촛불집회와 인터넷 아고라, 모바일 커뮤니케이션과 디지털 거리 저널리즘은 우리들에게 순수이성과 실천이성, 판단력의 주체적 계기들을 만들었으며, 이것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지는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변화가 아니라 사유양식의 참된 개혁'(Hartmann, F., 2000/2008, 91쪽, 칸트의 표현을 재인용)과 사회적인 변화와 연결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기 스스로 계몽하는 것은 고독한 주체가 아니라 공중'이며, '공론장은 현재 잠자고 있는 인간의 도덕적 소질이 발휘되도록 돕는 심급'이라는 하르트만의 철학에 이르게 된다.
이성 물음비교적 자율적인 담론가치 영역칸트의 비판근대의 문화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지성 : 이론인지 : 참된 것순수 이성 비판과학과 기술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지 : 실천규범 : 선한 것실천 이성 비판법과 도덕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취미 : 미학미 : 아름다운 것판단력 비판예술과 비평

Hartmann, F., 2000/2008, 87쪽 표 인용.

3)자기 소외적 존재 vs 자기 내재적-변증법적 존재/그리고 자기 삶적 존재

플라톤이 시를 경멸했던 것은 시와 시인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플라톤은 시를 실제 사물이 아니고 부차적이고 파생적인 것이며 인위적인 것이기 때문에 추방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보다 더 핵심적인 것은 플라톤이 두려워했던 것은 시의 오염성이었다. 시가 독자들을 오염시킨다는 것. 모든 사람들이 그들 본연의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데, 시는 사람들을 상상에 빠트리고 '누구인 척, 무엇인 척'하게 만든다. 플라톤의 이러한 생각은 우리로 하여금 문학을 읽지 않아야 하는 가장 권위있는 이유를 제공한다. 그런데 플라톤의 시와 시인에 대한 혐오는 궁극적으로 육체에 대한 혐오와 관련된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육체는 정신을 이탈시키는 장이다(Miller, 앞의 책, 105-107쪽).

그러나 정신으로부터 육체의 이탈과 육체로부터 정신의 이탈은 사실 노동과 경험, 교통, 자기 투여적 삶의 과정들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지배자의 특성이다. 헤겔이 주인과 노예의 장에서 주인의 자기의식을 설명하듯이, 지배자는 사실 구체적인 삶과 경험, 교통과 노동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으며, 소외된 이들의 언론과 커뮤니케이션 행위는 현실로부터, 노동으로부터, 대중교통(그들은 대중교통을 잘 활용하지도 않을뿐더러, 대중들과의 교통에도 극히 무능력하다)으로부터, 피와 살과 가슴과 머리가 함께 작용하는 경험으로부터 떨어져 발생하는 소외된 커뮤니케이션 행위에 불과하다. 그들은 지금까지 자신들의 고귀한 정신, 높은 이상, 전문화된 지식과 수준높은 이성적 판단력을 내세웠지만, 사실 그것들은 소외되고 전도된 육체와 정신의 탈구과 어긋남을 가리는 이데올로기적 의식의 산물이다. 반면, 인터넷 아고라와 모바일 미디어의 인민들은, 그리고 거리의 디지털 시인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육체와 정신, 이성과 감성, 노동과 경험, 대중교통의 생생한 현실로부터 자신들의 공통감각과 공공정신을 만들어간다. 이들이 존재하고 언어를 생산하는 곳은 청와대, 국회, 전용 승용차, 차단된 밀실, 비밀스러운 핫라인, 특권 계급 전용 살롱이 아니라 그들의 삶이 전개되고 있는 그 현장들인 거리, 버스, 지하철, 학교, 시장, 직장, 산, 들, 바다, 오락실 등이다. 누구의 언어가 더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며, 진실되고, 합리적이며, 대안적인가?

지배 언론과 지배자들의 커뮤니케이션이 철저하게 소외되고 자기 삶과 유리된, 또는 자기 삶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람들과 사건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반면, 그래서 그들의 언어가 항상 자기 삶의 내적 과정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의 몸과 정신, 마음과 영혼, 욕망과 소망을 위반할 수 밖에 없었다면, 새로운 인민 교통의 양식들은 이들보다 훨씬 더 진일보한 것으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환영한다. 오 삶이여! 나는 백만 번이고 나아가 경험의 진실과 마주칠 것이며, 영혼의 대장간에서 내 민족이 아직 창조하지 못했던 양심을 만들어 낼 것이다."(Miller, 같은 책, 108쪽에서 재인용)

4)인터넷과 모바일 상황주의?

상황주의자들은 최후의 아방가르드 운동 그룹으로 평가된다. 이들은 이전의 아방가르드 운동 그룹보다 훨씬 더 정치적이었고, 이론적이었으며, 급진적이고 자각적이었다. 이들에 의해 예술이 공공연하게 선언되고 사회변혁과 연결되었다. 그리고 이 사회변혁의 목표의 달성과 함께 이내 사라져야 하는 것이 예술이었다. 상황주의자들은 자신이 어떤 종류의 결정과 집행이나 정치적 통제권을 행사하기 보다 정치적 참여자들의 대열형성을 고무하고 촉진하는 것에 자신들의 역할을 한정시켰다(cf. 정성철, 2007).

상황주의자들은 주로 포스터, 거리낙서를 통해 자신들의 사상과 관념들을 자유분방하게 표현했다. 인민을 사회의 비판과 창조적 과정들의 외곽으로 퇴위시키는 지배자들의 이미지, 상품의 소비를 중심으로 조직된 미디어와 소비사회 뿐만 아니라 후기 자본주의의 광범위한 제도와 기술적 장치들, 이를 통해 매개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정성철, 같은 글)의 총체로서의 스펙터클에 저항하는 상황주의자들은 만화책, 게시판, 광고판, 포르노그라피, 영화, 거리낙서의 생활 속의 모든 미디어와 표현을 통해 스펙터클을 조롱하고 넘어서고자 한다.

드보르(Debord)는 '매개(mediation)' 그 자체에 저항한다. 단순한 쇼 비즈니스나 TV가 아니라 매개 그 자체 말이다. 스텍터클의 사회에서 존재는 항상 도처에서 수동적인 소비를 고무하도록, 따라서 우리의 삶으로부터 직접적인 경험, 정서, 그리고 관계를 박탈하도록 디자인된 매개 장치들과 매개 그 자체에 대한 비판이며, 이는 궁극적으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행해지는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저항이다.(6) 그래서 상황주의자들은 '지금 여기서' 일상적인 삶을 재창안하는 것을 추구한다. 이들에게 세계에 대한 지각을 변화시키는 것은 세계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은 동일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들은 일상적이고 통상적인 것을 뒤흔들어 놓을 상황의 구성에 주목한다.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상황주의자들은 현대문화에 대한 비판, 창조성에 대한 열망, 일상적 삶의 직접적 변형을 강조한다(Marshall, P., www.shgreenpeace.net).

촛불집회의 주체들은 상황주의자들은 아니다. 이들은 상황주의 예술을 추구한 것도 아니며, 명확한 상황주의적 의식과 목표를 가졌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들은 인터넷 아고라에, 거리에, 신문과 인터넷 광고판에서 예측할 수 없었던 '상황'을 연출하고, 이 상황으로부터 다른 정치참여적 사건들을 발생시키고 있다. 이들은 '짤방'을 통해, 팜플렛과 즉석 종이판을 통해, 가면을 쓰고 분장을 하고, 신문과 인터넷에 멋지게 디자인된 광고를 통해, 정부와 관료, 보수 언론과 무책임한 지식인들의 언어와 미디어, 스펙터클의 허위를 폭로하는 인터넷과 모바일 상황주의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 과정을 통해 인민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접하게 되고, 느끼지 못했던 현실의 문제들과 모순들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앎과 느낌의 공유를 통해 자신들의 삶을 보다 주체적으로 창안하고자 하는 요구들을 쏟아내기 시작한다. 지금까지 인민들의 이러한 열린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했던 적이 있었던가? 또 인민들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스펙터클이 아닌 '상황'은 우리에게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를 단순한 조작과 소비, 관리와 기록의 미디어로만 사고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또 인민들은 그동안 차에게 빼앗긴, 또 빼앗기는 것을 문제삼지 않았던 그 거리를 만남과 산책, 문학과 예술적인 표현들로 치장하였다(중앙차선을 따라 길게 늘어진 촛불만큼 아름다운 설치예술을 어디서 볼 수 있을까). 우리는 거리를(그렇게 넓은 거리를) 여러 사람과 함께 걷는다는 것이 얼마나 상쾌하고 해방적인지를 느꼈다. 일주일에 한번 특별하고 대단한 의지를 가지고 이루어지는 산행이나 달리기 운동과는 전혀 다른 상쾌함과 만족감, 평화와 해방감을 공유하는 것 자체가 대도시 속의 인간의 삶의 가치가 무엇으로 이동해야 할지를 지각하게 되는 체험적 계기였을 것이다.

5)소수의 팔레오(Paleo) 저널리스트 vs 다수의, 끊임없이 출현하는 포스트(post) 저널리스트

기존의 미디어 체계에서 미디어의 자유는 미디어의 소유자에 속했다. 전통적인 미디어는 그들의 수용자/독자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지만, 독자와 청취자 그리고 시청자들이 그들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는 못했다. 신문, 잡지, 라디오, 텔레비전, 영화와 레코드 음악(recorded music)은 모두 일 대 다(one to many)의 미디어였다. 상대적으로 소수에 국한된 전문가들이 미디어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었고, 고질의 콘텐츠를 생산하고 유통하는데 드는 비용은 높을 수 밖에 없었다. 일리치(Ivan Illich) 또한 '연희 도구들(convivial tools)'이라는 개념을 제안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미디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때 연희 도구들이란 사람들의 참여를 촉진하는 기술들을 의미하며, '연희 미디어'에는 게시판, 전화, 컴퓨터 네트워크, 단파 라디오 등이 포함된다(Illich, 2007 ; Good의 같은 글에서 재인용). 앞으로 이와 같은 '연희 미디어'가 네트워크 미디어라는 개념과 함께 대중들의 문화적 키워드로 부상할 것은 틀림없다. 네트워크 미디어와 연희 미디어의 확장은 기존의 미디어 생산자들로 하여금 새로운 미디어의 형식과 커뮤니케이션의 대중적 양식을 사고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미디어 조직과 기구가 가지고 있었던 커뮤니케이션 권력과 통제력은 점차 인민에게 이동하고 있으며, 미디어 기구와 기업은 이러한 변화의 의미가 무엇이며, 이러한 흐름에 대처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네트워크 미디어와 연희 미디어 체계는 전통적인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미디어 모델을 급진적으로 수정 또는 변경해야 하는 상황을 창조하고 있다. 전통적인 독과점 미디어가 아무리 저항하려 해도 웹과 모바일을 기반으로 한 네트워크 미디어와 유희 미디어의 발전과 인민의 창의적인 전유를 저지할 수 없다.

또 20세기의 신문, 잡지, 라디오와 텔레비전이 우리에게 '대중문화(popular culture)'라는 커다란 화두를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가능한 범주라고 전제한다면), 문화학과 미학에 이르기까지 전 사회적인 범위에서 풀어놓은 중심 미디어였다면, 웹과 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하는 최근의 전자 미디어는 어떠한 인간 삶의 요소들과 조우할 것인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다. 이에 대해 모우라나와 윌슨은 윤리, 미학, 정신성의 중요성, 억압의 제거와 해방적 가치들의 추구, 가치와 문화 체계의 우선성, 기술적 혁신과 조작의 수단으로서의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공유와 대화의 과정으로서 커뮤니케이션(미디어)의 강조, 민족 국가 단위 보다는 전 지구적임과 동시에 개인적인 가치들의 중요성, 탈 집단화와 자존성의 강조, 전통적인 것과 현대적인 것의 합류와 비선형적 발전 사관, 자기 개발 계획과 실행에의 적극적인 참여, 상명하달식 발전 전략이 아닌 상향식 발전 전략의 선호, 자본주의와 국가 독점 사회주의의 부정과 대안적인 정치경제체계를 들고 있다(cf. Mowlana & Wilson, 1990, pp.34-35).

우리는 미시카(Missika)가 텔레비전의 세 시대의 구분으로부터 전통적인 매스미디어와 새로운 미디어 형식들 간의 문화적인 차이를 흥미롭게 사고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옛날에는 팔레오 텔레비전(paléo-télévision)이 있었다. 이것은 장관들이 주재하는 준공식 등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일반인들이 무해한 내용만을 접하도록 만전을 기했으며, 필요하다면 거짓말도 서슴지 않았다." "팔레오 텔레비전의 책임자들은 교육계에서 넘어 온 망명자들이었다. 그들은 여전히 공화국 기병의 제복을 입은 상태로 자신들의 새로운 사명의 땅이 눈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보았다. 팔레오 텔레비전의 고전시대를 살던 개인의 모습은 다음과 같았다. 한편으로는 전령 구실을 하는 텔레비전의 가르침을 받는 '학생 시청자'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심한 보호를 받는 시민이었다. 당시에 개인주의가 있었다 하더라도 통제되고 제한된 범위의 소극적 개인주의였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그는 뒤이어 '네오 텔레비전(neo-télévision)'을 묘사한다. "시청자들은 한층 더 넓어진 선택의 폭을 누리게 되었다. 이제 이들 시청자들을 유혹하는 것이 관건이 되었다. 각 방송사들은 시청자들을 사로잡기 위해 온작 노력을 경주했다. 이런 새로운 방송 구도로 인한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는 바로 참신한 텔레비전 포맷을 모색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시청자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발굴하는 작업이었다. 이로써 시청자와의 공모에 바탕을 둔 관계가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방송 메시지의 교육적, 규범적 어조는 점차 사라지고 대신 친근하고 은밀하며 계약적인 어조가 등장하여 네오 텔레비전의 바탕을 이루게 된다."(Missika, Jean-Louis, 2006/2007, 15-33쪽). 그리고 이어서 그는 '포스트 텔레비전(post-télévision)'의 출현을 알린다. "포스트 텔레비전은 자기의 개성을 인정하고 주장하려는 개인에게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제안한다. 자기 성취가 사회적 규범으로 인정된 마당에 포스트 텔레비전이 이를 반영하고 매개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누구든지 표현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전 시기에 이미 터준 물꼬를 확장해주기만 하면 된다. 텔레비전은 이제 더 이상 단순한 표현의 장이 아니다. 텔레비전은 하나의 매개체이자 코치이며 자기 성취를 주도하는 자이다(Missika, Jean-Louis, 같은 책, 48-51쪽).

현재 그리고 앞으로 인민의 생활세계와 정치적 커뮤니케이션이 전통적인 매스미디어 영역에 강력하게 도전하는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 영역에서 발전하고 새로운 양상들이 창조될 것임은 분명하다. 예를 들어,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는 미시카가 서술하고 있는 텔레비전의 역사적 세 단계와 문화적 양식의 종합체로 기능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저널리즘의 영역에서도 미시카의 세 유형이 끊임없이 경쟁하고 서로 충돌하게 될 것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여전히 소수의 팔레오 저널리스트들을 추구하는 언론사와 다수의 끊임없이 출현하는 저널리스트들의 공간을 인정하고, 넓혀주며, 이들이 저널리즘의 새로운 양식을 확장해 가는 것에 동참하는 포스트 저널리스트 언론사의 경쟁을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시선으로 읽어내야 할 것이다.

4. 결론 - 촛불, 광장, 그리고 미디어/문화운동의 새로운 계기들

1)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의 정치적 가능성과 미디어/문화운동

인터넷과 모바일 등의 네트워크 미디어적 소통 형식이 기존의 대중매체와 다름으로 인해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가능성의 하나는 공론장의 측면이다. 프레스 명찰을 달고 있지는 않지만 프레스 명찰단보다 훨씬 더 많은 뉴스와 정보, 지식과 토론을 매개하는 인터넷과 모바일 저널리스트와 이와 교통하는 인민들의 광장에서는 분명 신문이나 텔레비전이 채택하지 않거나 하지 못하는 주제들이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공개되고 토론된다. 이에 대해 슈넬은 '인터넷이 시간과 공간적인 측면에서 제한되지 않은 교환가능성을 가지기 때문이며, 주로 팬의 문화에 속하는 언어 제스추어가 발전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또 그는 '인터넷 언어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열정을 일으키는 대상에 숭배의 위상을 부여하는 열정적인 공동체의 표현양식'이며, '존경과 경탄, 철저함과 세밀한 지식이 이러한 제스추어에 속한다'는 점을 강조한다(Schnell, 앞의 책, 408쪽). 따라서 슈넬에게 인터넷은 다양하고 유동성있는 전자적 미래공간으로, 이 공간은 디지털적 사회의 공적 영역이자 의사소통과 자기서술을 위한 광장이며, 잃어버린 도회적 교환의 보상물이다. 원칙적으로 동일한 서열과 가치를 가진 참여자들이 탈중심적으로 의견을 표명하는 이해관계, 자극 그리고 욕구를 존중하는 의사소통, 즉 지배가 없고 위계질서가 없으며 조작되지 않는 의사소통을 꿈꾸는 이상에서 출발한다면, 인터넷 공론장은 이러한 이상을 과학기술에 의해 생성하고 보증하여 현실화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Schnell, 같은 책, 409쪽).

이같은 측면에서,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는 기존의 확립된 사회영역에 대항하는 공공사회를 형성할 수 있다. 미리 주어진 체계와 형태를 제외한다면, 언술형식들이 미디어에 대해 열려 있고 또 그렇게 함으로써 상호매체적으로 이용가능하기 때문에,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는 지적인 그리고 예술적인 생산력이 마르지 않는 저수조와 같은 것을 만든다. 사회적으로 형성된 현실의 한계를 설정하지 않고, 이 가상성을 새로운 형태의 현실로 만드는 것은 새로운 공공성의 발전을 가능하게 한다(cf. Schnell, 같은 책, 409-410쪽). 또 사회적 주변 집단과 전통적인 뉴스미디어로부터 배제당하는 집단들의 목소리는 인터넷이나 모바일 미디어에서 보다 자유롭고 광범위하게 나타나 국가-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는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가 정치적 계몽과 투쟁을 위한 가장 적합한 미디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인터넷의 광범위한 정치 집단들은 소수 집단으로 정보가 독점되는 것을 막고, 정치적 논쟁들을 명확하게 하며, 국가-지구적 정책 결정들에 영향을 미치고, 국가의 행동을 좌절시키거나 변화시키기도 한다. 슈넬의 이러한 인터넷 공공성에 대한 진단은 반드시 인터넷에만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미디어 2.0의 환경 속에서 각각의 미디어가 이러한 상호작용과 새로운 표현양식의 실험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미래의 전자미디어의 공론장으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같은 관심은 현대 정치학과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적인 주제가 되고 있는 인민의 역능과 관련되어 있다. 현재 열정적인 민주주의 옹호자들조차 대중의 정치적 역능에 회의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바로 이 상황에서 새로운 미디어 환경이 형성할 수 있는 다양한 정치적 가능성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기업, 정부, 분파들, 정당, 클럽, 연합체들은 인터넷 공간에 자신들의 장소를 만들고 있으며, 자신들의 특수한 용어들을 생산하고 있다. 우리는 기술을 '커뮤니케이션과 정치의 수단'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된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사유를 확장하는 보다 더 풍부해진 커뮤니케이션 문화의 발전은 문화산업의 급진적인 민주화를 통해서 가능하다. 다원적인 목소리의 표현은 글로벌화되고 파편화된 현대 문화에서 특히 필수적이다(Stevenson, N., 2002, pp.68-69).

현대 자본주의의 정치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과 환경, 직업과 경제, 정부와 국가, 지구의 운명에 대한 통제력을 더욱 더 상실하도록' 하고 있는 상황에서 정치의 장소로서 인터넷은 다른 미디어에 비해 상대적으로 더 큰 기대를 가지게 한다. 인터넷이나 네트워크 미디어는 '정치의 사회화(socialization of politics)'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사람들이 정치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경우에 따라서 제도적인 정치를 뛰어넘고 자신들의 정치적 관계들로 이 제도 정치를 대체할 것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의 협소한 이해관계와 시각을 넘어 인민의 표현과 정치적 장소로서 어떠한 미디어 정치를 함께 구성해 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2)권위적인 우파 헤게모니 블록에 대항하는 미디어 기업과 시민사회의 연합

오랜 시간 우리는 미디어 기업 특히 인터넷과 모바일 등 소위 뉴미디어 기업에 대해 의심어린 눈빛과 비판의 언어들을 생산해 왔다. 보수주의적 시각과 진보주의적 시각이 모두 혼란스럽게 섞여 비판적인 시각의 생산자들 또한 애매모호한 비판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의 인터넷 미디어와 모바일을 통한 인민들의 열린 커뮤니케이션과 이의 정치, 문화적 가능성의 목도 앞에서 전자 미디어를 통한 인민 교통망의 확장의 문제들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인민들의 자기 표현의 장애물들을 많은 부분 제거해 왔고, 매스미디어의 한계를 뛰어 넘어 새로운 공공영역의 진화를 이야기 하는 지금 이 상황에서, 미디어 기업을 어떻게 사고할 것인가? 특히 정치적 야당으로, 새로운 공공정신으로서 인민간의 연합을 촉발시킬 수 있는 인터넷 아고라와 모바일 미디어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지을 수 있을까? 미디어 자본이라는 이름으로 결국 이들이 인민을 자신들의 상업적인 목적으로 포획할 것이라는 비판들은 어디까지 타당하고, 어디까지 부정되어야 하는가? 또 우리가 별 규정력없이 사용하는 미디어 자본이라는 말을 어떻게 재규정해야 할 것인가?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 기업이 우리에게 제공하고 있는 광장, 우리를 모두 잠재적인 미디어 아울렛으로 만들고 있는 이 미디어 테크놀로지와 기업의 운동은 전통적인 미디어 정치경제학으로는 해명하기 불가능한 대상으로 부상하고 있다.

또 하나. 인터넷 미디어 기업의 소유주, 운영자, 구성원들의 성격의 차이가 인민들에게 또 다른 자기 표현과 정치적 매체를 제공할 수 있다는 가능성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Daum의 경우, Naver와 달리, 인민들의 자기 표현을 보장하고 이의 흐름들을 차단하지 않는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여당과 정부로부터 압력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이러한 압력에 미디어 기업이 극히 취약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우리에게 던지는 또 다른 질문이다. 따라서 정부와 권력에 의한 대중들에 대한 데이터 파일과 디지털 시민 프로필 감시의 심화, 인터넷 미디어에 대한 통제와 감시의 시도에 만서는 연합적 실천들이 강력하게 형성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신문사와 방송사의 종사자들이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 영역에서의 인민의 표현과 정치적 자유에 둔감할 경우, 그 결과가 다시 자신들에게 향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3)정치의 안정적 재구축과 인민 공공영역의 역할

인터넷 아고라의 폭발은 한국의 정치적 재현의 위기 즉, 대표의 위기를 드러내는 사건이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많은 발전을 해왔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상황들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민들의 삶의 외부에 존재하는 자의적인 권력 체계와 맹목적인 관료 체계, 정당과 언론이 인민을 전혀 대표하지 못한 채 이들 간의 정치경제적 연합만 강화해 온 누적적 현실에 대한 폭발이다. 그러나 이 폭발은 내적으로 극히 모순적인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면서도 FTA를 찬성하고, 자신들의 삶의 위기를 직접 느끼면서도 정치적 선택은 여전히 이 위기를 야기하고 있는 집단에게 향한다. 인터넷 아고라와 인민 광장, 촛불집회의 거리에 있는 인민들은 매우 모순적이다.

그런데 이 모순들을 뒤로 하고 제기되고 있는 정치적 전망들에 선뜻 공감이 가지 않는다. 예를 들어, 김민웅은 '21세기 아나키즘 민주주의의 출현'을 선언했다. '2008 세대'라는 표현도 등장한다. 그는 "이 세대의 중심은 다채롭고 주체적이며, 서로 연대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민주적이다"고 진단한다. 그는 또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와 다르며, 시민 각자가 매우 개성적이고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 일체의 위계질서를 부정하는 '급진적인 민주적 평등'과 '형제자매애적 연대'를 이루어내는 시민권력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 판단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번 정치적 사태에 이러한 정치적 표현과 개념들을 덧붙이는 것이 타당한지 모르겠다. 촛불과 인터넷 아고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지속적이지도 않았고, 우리가 그 성격들의 차이에 대해서도 풍부하게 논의해 본 적이 없다.

또 하나. 최장집은 최근의 정치적 사건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하면서도, 인민의 정치가 안정적으로 제도화될 수 있는 대안과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주로 현재의 기형적인 정당 정치를 극복하고 제대로 된 정당 정치의 안정화를 통해 이것이 가능함을 이야기한다. 최장집의 이같은 견해는 언론학과 문화연구자들에게도 몇가지 고민들을 던져둔다. 인민 공공영역과 정당 정치의 안정화(보수적인 뉘앙스로 읽지 않아야 한다) 또는 제도적인 정치 과정과 인민의 공공영역의 긴밀한 연결 지점을 사고하는 것이다.

4)보수 상업 언론에 맞서는 운동의 강화

언론학과 문화연구자에게 흥미로운 연구대상이 부상할 것 같다. 바로 기존의 보수 언론체계의 해체와 언론장의 재구조화의 문제이다. 이번의 정치적 사건은 그야말로 보수 언론의 영향력과 지위의 약화를 가져올 것이다. 이 상황에서 그들은 어떠한 선택을 할 것인가? 기존의 헤게모니 블록으로부터의 이탈인가 아니면 헤게모니 블록의 재강화의 전략을 선택할 것인가? 현재로서는 후자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신문방송겸영과 미디어 복합 기업으로의 전환의 지지대가 현재 헤게모니 블록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들이 전자를 선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이들의 미래는 그리 순탄치 않을 것 같다. 이제 이들의 신뢰도와 영향력은 급감할 수 밖에 없고, 또 그동안 가려져있던 언론사적 진실들이 인민들에게 더 많이 공개될수록, 이들의 과거의 영화는 급속하게 해체되어 갈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언론으로서의 기본적인 자질과 능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는 사실들 앞에서, 대중들은 과거의 보수 상업 언론에 대한 의존도를 많은 부분 탈피할 것이다.

5)physics의 정치학, 미디어/문화 운동

이번 쇠고기 협상 사태는 향후 정치가 인민들의 신체와 물리를 둘러싸고 형성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다. 물, 공기, 전기, 식품과 식량, 석유 등의 에너지, 주택, 전자 커뮤니케이션망 등이 이 물리학에 속한다. 사실 신자유주의의 가장 취약한 고리는 인민의 물리학을 위협한다는 것이고, 따라서 반신자유주의에 대한 적대가 보다 구체적이고 일상화된 형태로 등장할 것이다. 그렇다면, 언론학과 문화연구는 이 인민의 물리학을 에워싸고 형성되는 정치, 신자유주의와 반신자유주의의 문제들을 어떻게 자기 문제화 할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제기하며 인민 교통과 언론의 주제로 삼는 언론과 문화생산자들을 기대해야 한다. 그리고 이들의 발화의 공간을 확장해야 한다.

5)확실성과 진실의 욕망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의 정치, 문화, 생활세계적 가능성들에 주목하면서도 동시에 우리는 더 많아지는 미디어와 의사소통의 환경에서 사회와 세계에 대한 '확실성과 진실'의 욕망을 놓쳐서는 안 된다. 미디어와 매개 체계에 대한 우리의 고민들은 결국 미디어를 통한 세계 인식의 확실성과 진실성, 신뢰의 문제에 다다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생활세계의 과학화, 기술화, 미디어화의 과정에서 경험과 인식의 과정이 보다 피상화되고 추상화됨으로써 현실의 다층적인 관계들을 반성적으로 탐구하고, 또 미디어 체계로부터 일정한 거리두기가 요구되며, 개인들이 미디어의 도구와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하는 기술과 미디어에 대한 인간의 통제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문제는 결국 인터넷과 모바일 미디어가 정치적 공론장으로서, 공적 삶의 매개자로서 보다 폭넓은 가능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또 다른 조건들을 사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0) 이 글은 공공미디어연구소 주최로 열린 세미나(6월 5일)와 사이버커뮤니케이션학회의 특별 세미나(6월 20일)에서 발표된 글을 수정, 보충한 글임을 밝힙니다.

(1) 나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자유주의 우파 권력으로, 이명박 정부를 권위주의 우파 권력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이러한 표현은 정치학자들의 보다 폭넓은 연구와 논쟁을 통해 정의되어지기를 기대한다.

(2) 원리, 원칙, 출발점의 의미를 가지는데,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 용어는 정치 행위나 통치, 민주주의와 관련된 원리와 원칙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아르케의 기준을 왕에 두면 왕정, 일부 특권층에게 두면 귀족정이나 과두정, 개별 시민의 판단에 둘 경우 민주정이라고 할 수 있다(cf. 반성택, 2007, 100-101쪽).

(3) 하버마스는 영국의 경우 커피하우스를, 프랑스의 경우 살롱을, 독일의 경우 만찬회나 학회를 특징적인 부르주아 공론장의 형태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들 간에는 흥미로운 차이점들이 발견된다(Habermas, 같은 책, 103-105쪽 참조).

(4) 포털사이트의 토론게시판 뿐만 아니라 보다 많은 인민들이 참여하고 발화하는 인터넷 신문, 인터넷 방송, 블로그나 카페를 모두 포함한다.

(5) 재화와 사람, 권력을 소유하지 못한 집단.

(6) Joshua Glenn의 'The Death of a Situationist'라는 글인데, 이 글의 출처를 확인할 수 없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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