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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조약법상 쇠고기 합의는 무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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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국제조약법상 쇠고기 합의는 무효다

[기고] 한국은 무효 선언, 미국이 재협상 요청해야

"성급하게 이뤄진 협상은 재협상을 부르는 법이다.(A negotiation done in haste invites renegotiation later on.)"
  
  협상에 임하는 이들을 위한 경구다. 한미 쇠고기협상의 과거와 미래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기도 하다.
  
  기존 협상에 잘못이 있다면 재협상을 통해 바로잡는 것은 당연하고 필수적인 수순이다. 국가간 협정의 경우도 여러 이유로 무효화되거나 재협상하는 예가 비일비재하다. 재협상 문제를 연구해온 제스월드 샐라큐스(미 Tufts대 교수)에 의하면, 국가간 동맹협정 중 33 ~ 70%가 파기됐다고 한다.
  
  샐라큐스 교수는 협상학의 권위지인 <협상저널>(Negotiation Journal, Oct. 2001)에 기고한 논문에서 기존 합의를 깨고 재협상을 하게 되는 요인을 크게 두가지로 분류했다. 첫째, 합의 자체에 결함이 있는 경우다. 둘째, 협상 후 사정이 크게 변해 합의를 이행할 수 없거나 큰 손실을 입게 되는 경우다. 이번 쇠고기 협상은 이 두가지 모두 해당된다. 왜 그런지, 정부가 그렇게 중시하는 국제규범을 기준으로 살펴보자.
  
  조약에 관한 국제법적 규범은 비엔나협약이다. 이 협약이 규율하는 '조약' (Treaty)이란 "문서 형태로 체결되고 국제법에 의해 규율되는 국가간 합의"를 말한다. 한미간 쇠고기 합의 역시 이에 부합하는 일종의 '조약'으로 비엔나협약의 적용 대상이 된다.
  
  비엔나협약은 이미 체결된 조약을 무효화(invalidation) 혹은 종료(termination)시킬 수 있는 요건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이중 어느 하나에만 해당해도 그 조약을 무효화할 수 있다. 검토 결과, 이번 합의는 최소한 다음 세가지 점에 해당돼 무효화-파기 요건이 충분한 것으로 나타났다.
  
  근본적 사정 변경으로 쇠고기합의 효력 종료 가능
  
  첫째, 사정변경의 원리다. 비엔나협약 제62조는 사정의 근본적 변경(fundamental change of circumstances)이 있을 경우 조약을 종료시킬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계약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사정변경의 원리'는 대단히 까다롭게 적용하는 것이 국제 관례다. 비엔나협약상, 조약을 무효화할 정도의 '사정 변경'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다음 네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돼야 한다.
  
  (1)조약 체결 당시 존재한 사정일 것, (2)체결 당시 당사국이 예견하지 못한 근본적 변경일 것, (3)그러한 사정의 존재가 해당 조약의 본질적 기초를 구성하고 있을 것, (4)그러한 사정의 변경이 해당 조약상 의무의 범위를 급격하게 변환시키는 경우다.
  
  이번 쇠고기협상 타결 후 전국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국민적 저항사태는 위 네가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킨다. 이번 합의에 따라 미국에서 수입될 쇠고기는 대다수 국민이 알게 모르게 섭취하게 되며, 그 수입위생조건은 국민들의 식생활과 건강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대 사안이다. 다른 상품과 달리, 합의내용을 국민들이 수용해야만 실질적으로 유효할 수 있는 사안이다. 따라서 이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과 수용 여부는 이번 합의의 본질적 기초를 구성하는 사정에 해당한다.
  
  그런데, 현재 80% 이상의 국민들이 이번 합의에 반대하며, 수용을 거부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의 상징인 맥도날드조차도 "30개월 이상의 미국 쇠고기를 사용하지 않는다"며 한국 국민을 안심시키려고 할 정도다. 이명박정부는 협상 당시 예견하지 못했던 이러한 국민적 저항사태로 인해 장관 고시를 거푸 연기하는 등 사실상 의무이행 불능(default) 상태에 빠졌다. 합의 이행의 주체인 정권의 존립마저 위협받는 실정이다.
  
  이런 점들은 비엔나협약상 '사정 변경'의 네가지 요건을 모두 충족시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조약을 종료시키기에 충분한 사유다. 지금 사태는 협상 무효 차원을 넘어 더 심각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어서 문제일 정도다.
  
  조약체결권 관련 국내법 위반으로 무효화 가능
  
  둘째, 조약 체결권 문제다. 비엔나협약 제46조는 조약체결권과 관련, 국내법을 위반하고 체결된 조약은 무효화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번 합의 및 장관 고시 내용이 대한민국의 검역주권 일부를 제한-양도한 것이란 점은 공지의 사실이다. 아울러 헌법, 가축전염병예방법, 세계무역기구협정의 이행에 관한 특별법 등을 위반하는 것이라 보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은 위헌소송을 제기했다.
  
  장관 고시의 위헌성 여부는 헌법재판소에 의해 판결될 터이나, 조약체결권 위반은 그와 관계없이 명백하다고 할 수 있다. 헌법 제60조는 주권의 제약에 관한 조약의 경우 그 체결-비준에 대해 국회가 동의권을 갖도록 하고 있다. 그 외에도 기존 법체계와 어긋나는 중대 사안이 포함된 협정을 농림부 차관보가 서명하고 농림장관 고시로 발효되도록 한 것은 분명한 월권이요, 국내법 위반이다. 따라서 조약 무효화 사유에 해당한다.
  
  기만 또는 착오에 의한 합의로 무효화에 해당
  
  셋째, 기만 혹은 착오에 의한 합의란 점이다. 이번 합의의 핵심은 미국측이 사료금지 강화조치를 공포할 경우 한국은 30개월 이상 소까지 전면 수입하도록 한 것이다. 협상 타결 일주일만에 미국 정부는 이 조치를 공포했는데, 그때까지도 한국정부는 그 내용을 제대로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농림부의 오역파동으로 드러났다. 미국측은 곧 공포할 법규 내용이 3년전 예고한 것에서 달라졌음을 한국측에 알려주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은 채 타결한 셈이다. 이는 협상의 신의성실 원칙에 어긋난다. 나아가, 송기호변호사가 지적한 대로 기만행위에 해당한다(<프레시안> 5/14, '기망의 협상'). 비엔나협약 제49조는 상대 국가의 기만적 행위(Fraud)가 있었을 경우 무효화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만일 미국측의 기만이 아니라면, 한국측의 착오란 얘기가 된다. 비엔나협약 제 48조는 협정의 본질적 기초가 되는 사안에 대한 착오(Error)가 있었을 경우 무효화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단, 스스로 빚은 착오가 아닌 경우다. 한국 협상단은 미 정부가 이전에 예고했던 그대로 사료금지조치를 공포하는 것으로 알고 협상을 타결한 것으로 드러났다. 물론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서명한 한국 협상단의 책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착오를 유발한 주 요인은 미국측에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측에 알려주지 않은 채 법규 내용을 변경-공포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측의 기만이든 한국측의 착오든, 최소한 둘중 하나는 성립된다는 결론이다. 어느 쪽이든 비엔나협약에 의거, 합의 무효화에 해당된다.
  
  무효화 요건 충분, 재협상 요청은 미국이 해야
  
  비엔나협약 상 조약 파기의 요건 중 하나만 해당돼도 무효화할 수 있는데,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최소한 세가지나 해당된다. 한국측이 이번 합의를 무효화할 수 있는 근거가 충분하다는 얘기다. 따라서, 한국 정부는 이번 합의의 무효 및 종료를 선언하고 미국측에 통고해야 한다. 그 다음 재협상을 할지 여부는 미국측이 알아서 할 일이다.
  
  제 돈 내고 쇠고기를 사먹는 한국측으로선 기존의 수입위생조건과 검역규정에 따라 수입하면 그만이다. 아쉬운 쪽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다. 재협상 요청은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 할 일이다. 미국이 재협상을 요청하면 그때 한국측이 응할지 말지 판단하면 된다.
  
  다시 강조하건대, 지금 이명박정부가 할 일은 이번 합의가 무효임을 당당하게 선언하는 일이다. 그것만이 우리 국민의 안전과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다. 정부가 그렇게 중시하는 국제규범에 따르는 길이기도 하다. 꼼수와 편법, 미봉책으로 대충 넘어가려 하다간 사태를 악화시키고 국민들의 불신과 분노만 키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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