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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가에 느닷없이 등장한 흑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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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정가에 느닷없이 등장한 흑진주

오바마 스토리 <하> '바위' 같은 아내 미셸

"부부가 같은 걸 좋아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부부는 증오하는 대상이 같아야 한다. 오바마 부부에게 공통의 증오 대상은 미국이다."

최근 "어른이 된 뒤 처음 진정으로 이 조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게 됐다"라는 미셸 오바마의 발언이 도마에 올랐다. 악의에 찬 한 논객은 오바마 부부가 미국을 사랑하기는커녕 극단적인 반미주의자들이라고 낙인찍어 버렸다.

이 말이 논란이 되자 미셸은 "조국이 아니라 정치과정을 잘못 말한 것"이라며 즉각 해명했다. 그러나 오바마가 현재의 기세를 몰아 민주당의 대선후보가 된다면 이 발언은 두고두고 입방아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일종의 설화(舌禍)다.
▲ 오바마 부부 ⓒ로이터=뉴시스

미셸의 연설을 보았는가

미셸의 말이 문제가 됐던 경우는 그 전에도 몇 번 있었다.

"오바마는 잘 때 코를 골고 발 냄새를 풍겨 우리 딸들이 아빠 침대에 들어가기 싫어한다. 양말을 아무데나 벗어놓기도 한다. 빵에 버터를 제대로 바를 줄도 모르고, 냉장고 안에 넣지 않아 녹아버릴 때도 있다."

너무나 소탈하고 솔직한 말이었으나, 일부 언론들은 미셸이 남편을 조롱하고 무시한다고 치고 들어왔다. 오바마 부부는 그냥 웃어 넘겼지만 그 후부터 선거 참모들은 미셸의 단어 선택에 신경을 곤두 세웠다.

힐러리가 오바마를 누르고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다면 그를 지지하겠냐는 질문에 "생각해볼 문제"라고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도 실수였다. "민주당원으로서 힐러리를 지지해야 한다"라고 말한 부분이 편집되어 버려 졸지에 '경쟁 후보의 속 좁은 아내'가 돼버렸지만, 그 후 오바마 캠프는 미셸과 관련된 언론 대응에도 적극 나서기 시작했다.
▲ 미셸 오바마의 연설 장면 ⓒ로이터=뉴시스

원고 한 장 없이 하는 미셸의 연설을 보면 눈이 번쩍 뜨인다. (그 말 잘한다는 토크쇼의 여왕 오프라 윈프리도 오바마 지지연설을 할 때면 원고를 본다) 한 편의 잘 짜인 연극과도 같은 장면을 연출하며 수많은 청중들을 쥐락펴락 한다. 대학 강단에 선 적은 있지만 정치라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흑인 여성이 어떻게 저런 연설을 할 수 있을까.

청중과 지지자들은 신랄하고, 거침없고, 풍자적이고, 유쾌한 말의 향연에 환호하고, 낄낄대고 때론 눈물을 흘린다. 대부분 남편과 따로 움직이지만, 같이 있을 때는 오바마의 연설에 앞서 '바람잡이' 역할을 해도 손색이 없다. (☞미셸 연설 장면 동영상 보기)

그러나 한 번 제대로 연설을 하기 시작하면 무려 40분간 교육 문제에서부터 이라크 전쟁까지 수많은 이슈를 얘기하다 보니 언론들이 제목으로 뽑기에 좋은 실수가 나오기 마련이다. 미셸의 '말실수'가 잦은 것은 그처럼 자유롭고 솔직한 스타일 탓도 크다.

미셸의 지인들은 "공석에서나 사석에서나 똑 같은 모습이다"라거나 "가식이 전혀 없다"라고 입을 모은다. 하버드 로스쿨 지도교수였던 데이비드 윌킨스는 "일반적으로 학생들은 어떤 결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거나 논리적 기교를 부리지만, 미셸은 언제나 입장을 뚜렷하게 표명했다"라고 회고한다.

미국에서 흑인 여자로 산다는 것

이렇게 자신만만한 미셸의 태도는 그냥 생긴 게 물론 아니다. <뉴스위크>는 자신의 능력과 인종, 계급, 그리고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끊임없는 갈등을 극복하며 얻어진 것이라고 평가했다.

시카고 사우스사이드에서 태어난 미셸은 '침대가 하나밖에 없을 정도로' 가난하지만 화목한 집안에서 살았다. 어머니는 전형적인 전업주부로 자식들에게 헌신했다. 시청 수도국 직원이자 민주당 지역구 위원장이었던 아버지는 과묵하고 엄격했다.
▲ 한때 유명한 농구 스타였던 미셸의 오빠 크레이그 로빈슨 ⓒ로이터=뉴시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미셸은 모든 면에서 뛰어났던 오빠의 후광에 가려 잔뜩 위축되어 있었다. 현재 브라운대학 농구부 감독인 오빠 크레이그는 훗날 농구 스타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지만 공부 또한 잘 해 명문 프린스턴 대학에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그에 비해 미셸은 공부를 잘 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뛰어나진 못했다. 오빠를 따라 프린스턴에 입학 원서를 낼 때도 지도교사의 만류를 뿌리쳐야 했다.

백인과 특권층 자녀들이 많은 프린스턴은 어린 흑인 여학생에게는 녹록치 않은 곳이었다. 어떤 공식적인 인종차별적 제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백인 학생들은 흑인 친구들은 그저 소수자우대제도(affirmative action) 덕택에 입학한 아이들이라고 여겼고 따라서 곧잘 무시했다.

미셸이 프린스턴을 나오며 쓴 사회학 졸업논문은 <프린스턴 대학 흑인 졸업생들과 흑인 공동체>였다. 눈에 보이지 않은 차별이 얼마나 공고히 버티고 있었고, 그에 대한 미셸의 인식이 어땠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미셸은 그 논문에서 "프린스턴은 과거 어느 곳에서보다 내가 흑인임을 인식하게 했다"라면서, 개방적이라고 알려진 캠퍼스에서 자신은 학생이 아니라 한 사람의 방문객에 불과했다고 썼다. 졸업 후 들어간 하버드 로스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프린스턴에서의 경험에 익숙해진 그는 그런 현실을 무디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흑인과 여성이라는, 미국에서 살기에 불리한 조건 두 가지를 딛고 미셸은 마침내 성공했다. 고향 시카고로 돌아와 유명한 로펌 '시들리 앤 오스틴'에 취직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프린스턴이나 하버드에서와는 달리 오바마 선거 운동에는 여성이자 흑인이라는 조건이 오히려 플러스 요인이다. 그렇다고 미셸이 흑인과 여성들의 마음을 직접 자극하는 전략을 택하진 않는다. 오바마에 비해 그런 얘기를 좀 더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입장이긴 하지만, 미셸도 가급적이면 '통합'을 말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니 속을 후련하게 해줄 말을 잔뜩 기대했던 흑인 여성 유권자들로부터 야속하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래도 미셸은 흑인들이 대부분인 유세장에 나서더라도 "피부색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우리는 미국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식이다.
▲ 오바마의 지지자인 오프라 윈프리가 진행하는 토크쇼에 나간 오바마 부부 ⓒ로이터=뉴시스

그러나 일종의 성공신화를 가진 미셸의 자신만만함이 약점이 될 때가 있다. 설교를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지난 1월 애틀랜타에서 열린 흑인들의 모임에서가 그랬다. 미셸은 늘 그렇듯 자신의 성공담을 얘기했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이미 성공한 흑인들이 모였던 그 자리에서 굳이 그런 얘기를 할 필요는 없었다.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미셸이 너무 젠 체하는 게 아니냐고 뒷말을 했다.

앞만 보고 달려온 삶을 돌아보게 한 오바마

지금은 미셸이 오바마의 지주지만 원래는 오바마가 미셸의 지주였다. 미셸은 오바마보다 두 살 어리지만 대학 졸업 후 바로 로스쿨에 갔기 때문에 직장생활은 선배였다. 시들리 앤 오스틴에 인턴사원으로 들어온 오바마를 달리 보게 된 것은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계속 이어가던 공동체조직가 활동 현장에 따라간 뒤부터였다. 오바마가 지역 주민들을 모아두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과 만들어져야 할 세상"의 차이를 좁혀야 한다고 연설하는 모습을 보고 미셸은 그만 반해버렸다.

그 와중에 미셸에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생겼다. 아버지, 그리고 '자유 영혼'을 가졌던 한 친구의 죽음이었다. 슬픔에 빠져 있던 미셸은 좋은 학교, 좋은 직장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자신을 돌아보며 이제는 사회적으로 의미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게 된다.
▲ 결혼식 날 버락의 어머니와 ⓒ로이터=뉴시스

미셸은 로펌을 그만두고 자신이 나고 자란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선택 뒤에 올 '배고픔'을 생각하니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둘이 결혼해서 아끼고 산다면 수입이 적어도 살 수 있지 않겠냐는 오바마의 설득이 없었다면 감행할 수 없었을 꿈이었다.

둘은 마침내 결혼과 동시에 퇴직을 하고 사회사업의 길로 뛰어 들었다. 미셀은 시카고 시청에서 2년을 근무한 뒤, '공공동맹'이라는 비영리단체에서 청년지도자 양성 과정을 담당했다. 그 후 시카고대 의대 의사들을 빈민지역에 파견하는 프로그램을 추진했고, 작년 가을까지 시카고대 의대에서 지역사업 담당 부총장을 지냈다.

밸런타인데이 유세 일정을 모두 취소한 까닭

경선 초반 미셸은 오바마에게 마음을 쉽게 주지 못하는 흑인들의 표심을 돌려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는 그런 미셸이 '끝장을 보는 사람'(the closer)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대선 레이스에 뛰어들기 전 자금 모금과 힐러리 격퇴 전략의 청사진을 캠프에 요구한 미셸은 만족스런 답변을 듣자 직장까지 집어치우고 선거 운동에 뛰어들었다. 남편의 안전은 그가 무엇보다 중시하는 문제다.

하지만 그런 미셸이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은 따로 있다. 오바마가 현실감각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오바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현실적인 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틈만 나면 일깨워준다.

오바마가 선거전에서 졌을 경우, 혹은 정계를 은퇴했을 경우, 보다 빨리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계산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미셸은 오바마로 하여금 보통 사람임을 깨닫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인 이상은 보통 사람들의 눈높이에 맞춰져야 하며, 그들이 원하는 변화를 잊지 않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 오바마의 가족 ⓒ로이터=뉴시스

그를 위한 미셸의 전략은 두 딸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는 유세장에 가급적 딸들을 데려간다. 아버지와 딸들의 물리적 거리를 가깝게 해 주기 위해서다. 그것도 안 되면 노트북으로 화상전화를 하도록 해 오바마가 두 딸의 아버지임을 늘 알게 한다. 밸런타인데이에는 유세 일정을 모두 취소시키고 시카고로 데려와 딸들과 시간을 보내게도 했다.

오바마는 그런 미셸을 "나의 바위"라고 말한다. 자신을 든든히 지탱시켜 주고, 현실이라는 땅에 뿌리박게 해주는 바위. 무엇 때문에 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지를 알게 해주는 바위다. 남편의 뒤편에 서서 억지 미소나 보내며 액세서리 역할이나 하는 정치인 아내의 모습을 거부한 미셸. 미국 정가에 느닷없이 등장한 이 흑진주의 미래는 그의 남편 오바마만큼 주목된다.

오바마 스토리 <상> 오바마, 아버지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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