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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승부를 겨뤘던 조선의 프로페셔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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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승부를 겨뤘던 조선의 프로페셔널"

박인규의 집중인터뷰[02/05] '조선의 프로페셔널' 펴낸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

안녕하십니까? 박인귭니다. 우리는 흔히 한 분야에서 독보적인 경지를 이룬 사람들을 프로페셔널 혹은 마니아라고 부르는데요 그렇다면 조선시대에도 이런 프로페셔널, 마니아가 있었다는 사실 알고 계십니까? 특히 그들은 유교적인 사회 분위기와 신분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주체적으로 살려는 의지를 보이며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갔는데요. 박인규의 집중인터뷰에서는 설연휴를 맞아 오늘과 내일 '조선의 프로페셔널'이란 책을 펴낸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와 함께 200년 전, 자신이 믿는 한 가지 일에 조건 없이 도전했던 사람들의 삶과 열정에 대해 얘기 나눠봅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안대회 교수입니다. 안대회 교수는 1961년 충남 청양에서 태어나 85년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했고 94년 같은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영남대 한문교육학과와 명지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저서로는 《연경, 담배의 모든 것》, 《선비답게 산다는 것》,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 《조선후기 시화사》, 《7일간의 한자여행》등이 있습니다.

박인규 : 조선의 프로페셔널, 이런 책을 내셨는데요, 보통 조선, 하면 조선의 명인, 이래야 맞을 것 같은데 프로페셔널이란 영어를 쓰셨어요. 나름대로 제목 짓기 전략이 있으신 것 같은데

안대회 : 조선 하면 사람들은 일종의 선입견 같은 걸 갖고 있죠. 선비라고 해야 어울리는 것 같고. 유교적 교양 같은 걸 말해야 어울리는 것 같은데, 현대적인 의미에서 전문가, 마니아, 이런 세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18세기에 많이 등장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정신을 표현하기에 적절한 것이 프로페셔널 아닌가 생각해서 지었고요. 조선에서도 특히 18세기 19세기에 이런 현대의 프로정신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 것과 결부시켜서 그런 책 제목을 내게 되었습니다.

박인규 : 몇 년 전인가 어떤 교수님이 미쳐야 미친다. 뭐 하나에 미쳐야 어디까지 이른다, 그런 의미로 책을 내신 걸로 기억하는데요. 마니아, 전문가, 프로페셔널, 그런 표현을 쓰셨지만, 당시에는 벽이다, 치다, 그렇게 썼다면서요?

안대회 : 그렇습니다. 벽이라고 하면 일종의 못말리는 자기도 주체 못하는 고질병 같은 건데

박인규 : 음주벽, 이런 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 ⓒ프레시안

안대회 :
그렇습니다. 그건 나쁜 의미로 그렇게 쓰는데 좋은 의미로도 많이 썼습니다. 수집벽이라든지. 요즘에 어떤 한 곳에 몰입하는 미치는 그런 것을 벽이라는 표현을 많이 썼고. 치는 바보 치자입니다. 바보스럽게 한 가지 일에 몰입하는 것을 치라고. 중국 속담에 우공이산이라는 표현이 있는 것처럼, 자기가 좋아하는 한 가지 일에 몰두해서 거기서 승부를 보려고 하는 사람들을 벽이나 치 같은 말로 로 표현했습니다.

박인규 : 보통 조선시대, 그러면 정치가나 유학자, 대개 이런 사람들이 조명받게 되는데 이번 책 조선의 프로페셔널에는 열 분이 나오는데 쭉 보니까 최북이라는 화가 정도는 한 번 이름을 들어본 것 같고 나머지 아홉 분은 처음 듣는 이름들이에요. 여행가도 나오고 원예사도 나오고 기술자, 춤 추시는 분들? 이 열 분을 소개하게 된 나름대로의 기준이랄까 어떤 겁니까?

안대회 : 그 기준은 제가 설정한 기준인데요, 우리가 조선시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직업이나 취미세계와는 달리 어떻게 보면 근대적, 현대적이라 할 수 있는 지금과도 맥이 닿을 수 있는 분들을 일부러 찾았는데, 과거의 글을 읽다 보면 그런 분들이 의외로 좀 많이 나와요. 특히 그것이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18, 19세기에 시대가 후대로 가면 갈수록 많이 나오고 그런 분들은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기와는 다른 세계를,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걸 봤고. 그 분들 가운데 굉장히 유명한 분들이 있어서 기억들이 여기저기 나와서 그 분들을 관심을 갖게 됐죠. 사실 이분들 말고도 다양한 분야에 굉장히 많습니다. 시계 전문가라든지 한국의 부채 유명하지 않습니까? 부채를 잘 만드는 분들, 이런 다양한 분들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기술 부문에서도 조명할 분들이 있지만 현대적 관점에서 취미나 독특한 자기 세계를 갖고 있었던 분들을 조명하기에 따라서는 더 많이 발견될 수 있다. 그 중에서 저는 열 분 정도를 주목했던 거죠.

박인규 : 선정 기준으로 주류사회의 생활방식이나 사고방식과는 좀 다른 분들, 현대와는 맥이 닿는 사람들을 말씀하셨는데 무엇보다도 주류사회의 사고방식, 생활방식과 다르다면 그 당시에 기록을 남기는 분들과는 생각이 다를 것 같은데 그런 입장에서 보면 이런 분들 관련된 기록들을 찾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안대회 : 그렇습니다. 그 당시 기록은 기록하는 사람들이 가치있는 걸 기록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거든요. 그때 가치라는 것은 유교적인 가치거든요. 그래서 충, 효라든지 문과급제자, 가문의 영광을 성취한 그런 분들이거든요. 요즘에는 그런 것들이 가치있겠지만 여행가라든지 물건 잘 만든다든지 그 당시에는 그게 그렇게 대접을 못 받았던 거거든요.

박인규 : 좀 이상한 놈들이다.

안대회 : 그렇죠. 이상한, 쟤들은 왜 남들 하지 않는 짓을 자꾸 하느냐,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그 가운데서도 아주 특출나게 잘 하는 분들에 대해서는 18, 19세기 깨어있는 지식인들은 또 기록을 했습니다. 저는 그것이 아까도 프로정신 이야기를 했지만 기록하는 사람들에서도 18, 19세기에는 새로운 관점들이 나온다. 전통적 관점에서만 사람들 살아가는 걸 보지 않고 새로운 관점에서 사람들을 보려고 해서 이런 특이한 사람들에 대한 기록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박인규 : 아무래도 그렇다면 개인 문집을 많이 보셨을 것 같은데 저도 책을 보니까, 운심이라고 검무를 잘 추는 기생.... 박제가의 기록에 자세히 나와 있더군요.

조선의 프로페셔널에 소개된 열 분들이 그 당시의 주류적인, 일반 다른 삶을 살았다고 하셨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이 책에 소개된 열 분이 어떤 마니아랄까, 공통적인 특징들이 있습니까?

안대회 : 이 분들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하면, 그 당시 주류사회에서 추구하던 것과는 다른 길을 갔다는 점이 가장 중요한 것 같고요. 그 다음에 이들 마니아들은 자기들이 어떤 수준에 오른 다음부턴 집안에 틀어박혀 있지 않고 자기들이 갖고 있는 수준, 기술, 이런 것들을 자꾸 남한테 펼치려는 성향들을 갖고 있어요.

박인규 : 최고가 되고 싶어하고 최고가 되면 그걸

안대회 : 남한테 선전하고 보여주고 싶어하고. 또 한 가지는 자기는 이런 것들을 경제적 이득의 수단이나 출세보다는 역사와 승부하고 싶어하는 성향들을 굉장히 많이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들이 사회에서 자기들의 성취를 인정해 주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적대감 같은 것도 드러내긴 하지만 후원자라든지 동지들을 자꾸 찾아가고 그들이 인정해 주면 거기 감격해서 자신의 모든 걸 바치려고 하는 이런 성향들 보여줍니다. 그런 점이 사실 중국이나 일본, 그 동시대에는 이런 유형의 인간들이 많이 등장했는데 그런 점과는 많이 다르지 않나 생각되고. 현대 한국의 마니아도 일종의 그런 성향을 갖고 있지 않나, 그런 면에서는 시대가 2, 300년 다르긴 하지만 유사한 경향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박인규 : 뭔가 하나에 미쳐서 그것을 통해서 경제적이나 시회적인 이득을 취하기보다는 그것 자체로 한 번 뭔가 보여주겠다. 지금 말씀하신 벽, 치, 마니아, 프로페셔널. 일본에는 오타쿠라는 게 있잖아요. 오타쿠는 한 가지 분야에는 정말 속된 말로 빠삭한 전문가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일본의 오타쿠와는 좀 다릅니까?

안대회 : 제가 이런 주제를 가지고 IT업종에 있는 분과 이야기를 했는데 그 분들이 바로 제가 200년 전에 마니아, 벽과 치를 가진 분들 이야기를 했더니 어쩌면 그렇게 요즘 현대 한국사람과 비슷하냐고, 속이 후련하다고 하면서 오타쿠하고 비교를 해주는데... 일본의 오타쿠 같은 경우 한 가지 일에 몰입하는데 그걸 굉장히 숨긴답니다. 그래서 오타쿠끼리 만나도 저 사람 뭐하는지를 잘 모르는데 한국은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사람들은 자기가 뭘 하고 뭘 갖고 있는지를 남한테 선전하고 남이 알아주길 좋아하고 그러니까 끼리끼리 모입니다. 그래서 공동체의식이 굉장히 강하다고 해요. 사실 200년 300년 전의 한국의 마니아들도 그런 성향들을 갖고 있어서 여기에 어떤 민족적인특징 같은 것도 있지 않나. 그렇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박인규 : 자신의 일생을 걸로 뭔가 한 가지에 미친다. 굉장히 좋은 일이긴 합니다만 그 당시엔 별로 알아주지 않던 것 이런 것들을 하다 보면, 또 어떻게 보면 사회에서 좀 위험시하는 것도 있을 수도 있고 굉장히 어려웠을 것 같아요. 그 당시 조선의 프로페셔널들은...

안대회 : 어렵고 핍박도 많이 당했죠. 예컨대, 여행가 정란이라는 분이 있는데 더구나 양반입니다. 그러다 보니 한 마디로 미친짓 한다. 집안에 공부하고 있으면 될 걸 갖다가, 가정도 돌보지 않거든요. 그러면서 하는 것에 대해서 아주 비판적으로 보는데 이 분은 거기에 대해서 이거야 말로 내가할 수 있는 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고. 또 거기 과학자 같은 분들도 아주 백안시당하는 것이죠. 그걸 극복하기위해 굉장한 노력을 하더라구요. 그런 점에서는 상당히 열악한 상황에서 자신의 길을 갔던 분들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프레시안

박인규 :
오히려 그 열악한 상황이 그 분들의 투지를 더 불태우게 할 수도 있었겠죠.

* 여기서 잠깐 방금 들어온 뉴스속보 한 가지 전해드리겠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로스쿨 문제로 사표를 낸 김신일 교육부총리의 사표를 수리했다고 합니다. 로스쿨 문제가 잘 풀려야 될 텐데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 같네요.

조선의 프로페셔널 여기 나온 분들을 한 분 한 분 살펴봐야 할 텐데요, 지금 그렇지 않아도 말씀해 주셨어요. 조선의 여행전문가, 전문여행가 정란, 저희는 여행가 어렸을 때 김찬삼씨라고 세계여행 다니는 분을 기억하는데. 이 분은 어떻게, 사대부 출신인데 백두산에도 두 번 올라갔고. 그 당시에 백두산 올라가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을 것 같은데, 우선 어떻게 이 양반이 여행에 미쳤는지요?

안대회 : 이 분은 원래 과거시험 공부를 했고 그 당시 경상도지역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하는 신유한이라는 분을 스승으로 삼아서 문장공부를 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나이 30에 들어서서 모든 걸 포기하고 나의 길, 나의 인생이 추구해야 될 것은 여행이다 하면서 그때부터 가정도 돌보지 않고 모든 걸 팽개치고 여행에만 몰입했던 분이고

박인규 : 보통 그렇게 하시는 분들은 서자라든가 이런 분인데 그런 것도 아니죠?

안대회 : 그렇지 않습니다. 정상적인 집안이고 정상적인 공부를 다 했던 분입니다. 친구들도 다 양반들이고. 그렇게 출발을 했고요. 그 다음에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그 당시 백두산을 간다는 것은 한두 명이 가면 그건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보통 그 당시 양반들이 갈 경우엔 수십 명의 대원을 꾸려서 가면서 백두산은 등반이 아니라 탐험입니다. 그런데 이 분은 가는 길이 거의 1년 잡아서 갔습니다. 그리고 또 두 번 정도 갔고. 가면서 서해안을 통해서 동해안까지 금강산을 거쳐서 들어오는 것이라서 거의 1년 걸렸구요. 이 분은 전국의 유명하다는 산은 안 간 데가 없습니다. 특히 그 당시 산으로서 가장 가기 어려운 게 백두산과 한라산을 동시 등반하는 겁니다. 이 분은 그걸 다 했어요. 조선시대에 등반을 좋아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여행이라는 것이 일종의 취미지만 다른 많은 취미들에 비해서 그 당시도 여행은 고상한 취미라고 했기 때문에 여행을 즐긴 분이 많고 또 전문적인 여행가라고 할 만한 분들이 이 분 말고도 있긴 있습니다. 그런데 한라산까지 등반하고 백두산까지 등반하고 금강산도 여러 번 등반하고 유명한 산을 다 등반한 경우는 극히 드뭅니다. 그런데 이분이 바로 그런 분이죠.

박인규 : 백두산 등반할 때 연세도 보니까 50대 후반이었던 것 같은데, 이 분이 여행을 다니면서 기록을 남겼나요?

안대회 : 이 분이 남겼다는 것도 있고요. 아까도 한국의 마니아들 특징 얘기를 했지만 과시하고 싶어한다. 자기가 여행한다고 하는 것을 당시 유명한 문인들 화가들을 찾아다니면서 다 그림으로 남겨달라면서 그걸 첩으로 만들고 다녔습니다. 자신도 시를 쓰고. 그런데 저는 못 봤지만 그것이 남아있다고 해요. 얼마 전에 전시회에 한 번 나왔다고 하는데

박인규 : 불후첩이라고 하는 것.

안대회 : 맞습니다. 그런데 제가 갔을 땐 미리 가서 못 봤는데 마지막 날만 보여주고 말았다고 해요.

박인규 : 누군가가 그걸 개인소장하고 계신가요?

안대회 : 예. 개인소장하고 계신 것 같은데 공개는 아직 안 한

박인규 : 그런 걸 공개를 해서 안대회 교수님 같은 분이 좀 분석을 하고 그러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안대회 : 저도 늘 보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박인규 : 책에 보니까 단원 김홍도보다 스무살 위였고 정란이라는 분이. 그래서 단원, 정란, 또 한 분이 강희맹인가요? 세 분이 같이 앉아있는 그림도 김홍도가 그린 게 있던데

안대회 : 단원도라는 그림인데 전적으로 정란을 위해서 그려진, 김홍도의 그림 가운데 명작에 속하는 그림입니다. 거기에 바로 이 분하고 이 분이 데리고 다니던 종하고 타고 다니던 당나귀까지 그대로 그려져 있는 좋은 그림이죠.

박인규 : 정란이란 분에게서 여행이라는 건 그럼 어떤 의미였습니까?

안대회 : 그걸 참 말하기는 쉽진 않은데 자기 인생에서 성취할 수 있는 성취욕 같은 것들을 대변해주는 것이다. 사나이 대장부가 세상에서 할 일이 여러 가지 있는데 남들은 다 그걸 과거급제해서 입신양명하는 걸로 봤습니다. 그런데 자신은 그것이 아니라 세상을 넓게 보는 것. 넓은 세상을 보는 것. 그래서 이 분의 최종 목적은 세계를 보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까지 하냐면, 나는 설사 노비가 된다 하더라도 일본이나 중국 같은 곳을 구경할 수 있다면 가겠다. 이유는 뭐냐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 그게 안 되니까 나는 조선에 있는 모든 땅을 다 밟고 싶다.

박인규 : 그 당시의 조선시대 선비로서는 대단히 개척적이고 도전적인 정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 ⓒ프레시안

안대회 :
그렇습니다. 노비가 돼서라도 여행을 하고 싶다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는 건 대단한 도전정신이고, 그런 도전정신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게 있었는데 그런 것들이 기록에서 사라져 버린 점 때문에 그런 거죠.

박인규 : 정란의 여행벽에 대해서 동시대 선비들은 어떻게 평가했습니까?

안대회 : 주변에 있는 분들은 우려하긴 했습니다. 그 우려라는 것은

박인규 : 벼슬하고 집안을 돌봐야지

안대회 : 그렇죠. 선비가 공부해야지 왜 그러냐. 너 공부도 잘 했는데. 그런데 대부분은 다 인정했습니다. 그러면서 이용휴 같은 분은 지금 이 사람을 비웃는 사람이 나중에 이름이 남을 것인가 이 사람 이름이 남을 것인가, 이 사람의 이름이 남는다. 즉 역사의 승부에서 이 사람은 남을 것이다라고 인정을 해줬습니다. 그래서 그런 점에선 많은 분들한테 인정을 받았다고 봐야 될 것 같습니다.

박인규 : 한 개인의 도전정신을 통해서 시대를 뛰어넘어 이름을 남겼다고 말할 수 있겠네요.
여기서 우리 음악 한 곡 들으시겠는데요, 슬기둥의 고향 가는 길 들으시겠습니다.

* 슬기둥 - 고향 가는 길

박인규 : 지금 많은 분들이 고향으로 내려가고 계실 텐데요, 슬기둥의 고향 가는 길 들어봤습니다.

제가 조선의 전문여행가 정란에 대해서 말씀을 나눠봤는데,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불리는 분이 있다. 정철조라는 분이다, 말씀하셨는데 그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습니까 이 분이?

안대회 : 재능도 뛰어났지만 만능인이라고 할 정도로 다양한 분야에서 업적을 남긴 분입니다.
일단 이 분은 유명한 조각가입니다. 회화로서는 김홍도와 미름이 병칭될 정도로. 그림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서 일반인들이 많이 모르시는데 그 정도의 분이고. 그 다음 다양한 기계를 만든 기술자고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입니다. 홍대용과 쌍벽을 이룰 정도의, 그리고 문과 급제자입니다.

박인규 : 원래는 선비인데, 원래 선비면 지금 말씀하신 조각가, 기술자, 이런 건 예전엔 중인이 하는 일이라고 잘 안하지 않았습니까?

안대회 : 그렇죠. 이런 걸 하면 남들한테 질시를 받고, 사실 이 분은 남들한테 질시를 많이 받았습니다. 선비로서 그런 짓을 한다고 해서. 하지만 이 분은 그런 데 개의치 않고 학문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이 분을 인정해준 분이 연암 박지원. 초정 박제가 이런 분들이 인정을 해줬죠.

박인규 : 저희는 조선의 회화 서예 이런 건 낯이 익지만 조각가라는 말은 처음 듣는 것 같아요. 이 분의 조각품이 남아 있습니까?

안대회 : 남아 있습니다. 이 분은 뭘 조각했느냐 하면 주로 벼루를 조각했습니다.

박인규 : 아, 벼루에 무늬 같은 그런

안대회 : 그렇죠. 우리나라 벼루는 아주 단조로운 특징이 있어요. 이 분은 그때부터 귀뚜라미라든지 특이한 형태의 벼루를 조각했는데 벼루를 조각하는 특수한 칼을 쓰지 않고 가지고 다니는 조각칼을 갖고 즉시 만들었는데, 원래 돌의 형상을 잘 이용해서 만든, 그래서 강세황 같은 분은 이 분의 벼루를 대단히 아끼는 그런 이야기를 남겨놓고 있습니다.

박인규 : 정철조라는 분은 서양 문물에도 관심이 많았다던데요

안대회 : 네. 이 분은 당시 학자들한테 뭘로 널리 알려져 있었냐면 서양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분은 자신의 집 방 한 칸을 서양서만 모아 놓는 곳으로 만들어 놓고 서양서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당파가 다르고 뭐 누구라도 꼭 찾아가서 서양서를 구해서 그 안에다가 놓고서 봤고, 그 안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잘 간수했던 분입니다.

박인규 : 대단히 선구적인 지식인이었네요

안대회 : 그렇다고 봐야지요. 그래서 이 분은 회화가로도 유명한데 이 분의 그림은 서양 그림의 영향이 남아있는 걸로 저는 추정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혹시 이 분의 제자가 있습니까?

안대회 : 이 분의 제자가 벼루 제작에서도 김도산이라는 분이 제자가 있고, 또 화가로서는 신이박해 때 천주교를 믿는 화가로 해서 유명한 화가가 또 이휘영이라는 분이 또 그 분의 제자입니다.

박인규 : 조선시대에 원예가라는 것도 하나의 직업이었나요?

안대회 : 그렇지 않습니다. 원예가는 물론 직업이라고 할 만한 분도 있어요. 국화 전문가라고 해서 검은 국화를 파는 원예가가 있긴 했지만 양반이 원예가로서 나선 경우는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유박이라는 분인데 유득공 집안 사람인데 이분이 바로 과거공부를 하다가 나의 길은 원예가다 해서 예성강가에 화원을 했던 분이고. 이 당시 원예, 꽃을 좋아하는 것은 당시 굉장한 취미였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취미를 넘어서 하나의 자기 세계를 구축한 그런 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박인규 : 양반이 꽃을 좋아할 수는 있지만, 예를 들어 퇴계와 매화의 사랑은 유명한데, 직접 난이나 매화가 아닌, 유박은 주로 어떤 꽃을 키우신 분인가요

안대회 : 이 분은 전문가다 보니까 굉장히 다양한 꽃을 수집해서 자기 정원에 꽂아놓고 남을 보여줬고요. 심지어는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에 있는 외국산 품종까지 수입해서 자기 정원에 가꿨습니다. 더구나 단순히 그렇게 즐기는 데 머물지 않고 '화암수록'이라는 화훼전문서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이 분은 시문을 남겼는데 전부 꽃에 관한 거고 시조까지도 남겼습니다. 시조사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분입니다. 그런데 원래 이 분이 지은 게 아니고 다른 분이 지은 걸로 알고 있었는데 그게 밝혀졌죠.

박인규 : 양반이기 때문에 원예를 가지고 꽃을 팔거나 그러시진 않았겠네요

▲ ⓒ프레시안

안대회 :
예.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냥 즐기고 다른 사람 구경시켜 주고 자기의 학문적인 걸로 했던 거지 사실 경제적인 그런 부분은 크게 신경쓰지 않았던 게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박인규 : 어떻게 보면 상업화가 돼야 전문화가 되는 거 아닙니까?

안대회 : 그런 부분은 또 따로 있습니다. 이 당시에는 꽃이, 좋은 꽃은 상당히 비쌌습니다. 그렇게 직업적으로 원예업을 하는 분은 따로 있었고, 이렇게 취미와 학문을 연결시켜서 전문가인 분은 또 따로 있었던 게 아닌가, 그렇게 생각이 듭니다.

박인규 : 전문 여행가였던 정란, 조각가였던 정철조, 원예가였던 유박. 이 분들은 다 양반이면서도 그런 취미생활을 즐겼어요. 18세기 그때 뭔가 양반사회에 새로운 기풍이 들어와서 그런 건가요?

안대회 : 그렇습니다. 이 당시에는 지식에 있어서도 기존의 규격화된 지식이 아니라 새로운 지식을 추구했고 거기에는 서양에서 들어온 것, 중국, 일본에서 들어온 새로운 지식의 충격 같은 것도 있었고 취미에서도 그랬습니다. 기본적으로 사람과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취미 부분이 그렇습니다. 그 당시 취미라고 하면 이 원예 같은 것도 있었지만 비둘기 사육, 이건 당시 최고의 취미 중 하나였습니다. 요즘에 애완동물 기르듯이 이런 것들이 있었고

박인규 : 18세기에는 우리가 잘 몰랐지만 굉장히 알게 모르게 내부적으로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측면이 있었군요.

안대회 : 그렇습니다. 굉장히 역동적이었고 그게 19세기까지 조금 연결되는데 근대가 되면서 그것들이 단절됐던 거죠.

박인규 : 예. 오늘 얘기는 여기까지 듣고 내일 또 이어서 듣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고맙습니다.

안대회 : 고맙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 오늘은 '조선의 프로페셔널'이란 책의 저자인 성균관대 한문학과 안대회 교수와 함께 200년 전 자신이 믿는 한 가지 일에 조건 없이 도전했던 사람들의 삶과 열정에 대해 말씀 나눴습니다.

내일도 안대회 교수와 함께 하겠습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부터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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