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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의 "한반도 정세 완화"는 무슨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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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정일의 "한반도 정세 완화"는 무슨 뜻?

한반도브리핑 <60> 힐 차관보 방북 이후 북한의 대응 방향

지난 7월 2일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에 올랐다. 3박 4일 동안 책과 사진으로만 접했던 보천보와 대홍단 전투 사적지도 처음 답사했다. 40여 명의 남북 학자가 함께 해서 더 좋았다. 안개가 짙게 끼어 천지에 내려가지 못한 것이 한 가지 아쉬움으로 남는다.

4년 전 8월과 9월에 갔을 때 백두산 아래 첫 마을이라는 삼지연읍은 주택개량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번에 삼지연읍, 포태구, 이명수구 등 백두고원에 있는 마을들을 둘러보니 하나같이 주택이 개변됐다. 삼지연읍 포태구의 한 마을에서는 새로운 주택단지를 조성하고 있었다.
▲ 이국적인 건물들이 들어선 삼지연읍 내 모습 ⓒ정창현

난방 문제는 마을마다 중소형발전소에서 생산된 전기를 이용해 해결했다. 베개봉호텔의 방바닥도 전기난방으로 따뜻했다. 직접 들어가 본 삼지연문화회관과 학생소년궁전의 시설은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이 없을 듯했다.

2000년대에 들어 백두산지역 개건현대화

북한 당국이 식량난 해결을 위해 내세우고 있는 '감자혁명'의 본보기인 대홍단농장을 직접 가지 못했지만 차창 밖으로 본 백두농장에는 감자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언감자떡, 언감자국수, 군감자, 감자볶음, 감자전 등 다양한 감자요리도 맛보았다.

대홍단에서 삼지연으로 돌아오는 길에 현대적인 트랙터를 보았다. 거리에서 만난 학생, 주민들의 표정은 밝았다. 마음이 흔쾌했다. 16번째 방북 중 가장 마음이 편안했다. 상전벽해(桑田碧海)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변화된 백두산지역 마을들은 앞으로 북한 농촌 현대화의 모델이 될 만하다. 남쪽의 경기도를 비롯해 여러 곳에서 지원을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자력갱생'으로 이뤄낸 성과다. 마음 한 구석으로 북한에 있는 모든 농촌마을들이 삼지연읍처럼 하루속히 변모되기를 소망했다.
▲ 주택개량사업을 끝낸 삼지연군 리명구의 산골마을의 모습이 정겹다. ⓒ정창현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북한이 느끼는 '안보 위협'이 해소돼야 한다. 그래야 북한 당국이 마음놓고 경제건설과 대외무역에 나설 수 있다. 평양에서 만난 북측의 한 인사는 "공화국은 전 주민이 모내기 전투에 나서고, 공장현대화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경제건설에 매진하고 있다"며 "올해 우리에게 들씌워진 경제제재가 풀리길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6월 21일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의 방북 결과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는 "미국도 우리를 자기 멋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라며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조만간 북미관계도 풀릴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몇 년 전부터 북한 인사들은 노동당의 결정이 내려지지 않은 사안이나 판단이 서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내 개인적인 생각인데…"란 말을 붙인다.

신뢰가 없는 상황에서 '행동 대 행동 원칙' 중요

그러나 아직 남북관계에 종사하는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성원들은 미국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다. 지난 5월 만난 민화협의 한 간부는 "우리 공화국을 대하는 태도에서 부시 행정부가 진심으로 바뀌지 않았다. 미국 안에서 인기가 떨어지고 이라크 전쟁에 발목에 잡혀 임기응변으로 변화를 꾀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그래서 '행동 대 행동 원칙'이 중요하다고 했다. 다만 미국이 한사코 거부하던 북미 직접대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에는 긍정적인 변화로 인정했다.

이번에 만난 민화협의 한 안내선생은 국내외 언론의 보도태도를 거론했다. 그는 "남쪽 언론에서는 2.13합의의 실천이나 6자회담 진행이 더디게 되는 것에 대해 우리(북측)의 책임을 거론하고 있지만 방코델타아시아(BDA) 문제 해결과정에서 분명하게 드러났듯이 미국 스스로가 풀어야 할 문제가 더 많다"라고 강조했다. 미국이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 대적성국교역금지법 대상 제외 문제들을 푸는데 정치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대부분의 국내외 언론은 '북한의 행동 여부'에 6자회담과 북미관계 진전이 달려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2.13조치가 늦어지게 된 기본 원인은 BDA문제를 한 달 안에 해결하겠다는 지난 1월 북미간 베를린회동의 약속을 미국이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평양에서 만난 북측 인사들의 말을 종합해 볼 때 북한은 북미관계가 풀려야 6자회담을 통한 한반도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 순조롭게 진행될 것으로 보는 듯했다. 이 같은 인식의 연장선상에서 북한은 베를린회동을 통해 6자회담의 구도를 북미 회담 구도로 전환시키는데 일정한 성과를 거뒀다. 최근 나타나고 있는 동북아정세를 읽은 열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올해 1월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과 힐 차관보의 베를린회동 → 3월 김계관 부상의 뉴욕 방문 → 6월 힐 차관보의 평양 방문으로 이어지는 흐름은 북한의 구상이 부분적으로 실현되고 있는 것을 반영한다. 물론 부시 행정부의 대북 인식과 정책의 변화도 무시할 수 없다. 올해 들어 북미간에는 우리 정부와 중국이 구체적인 대화 내용을 파악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상당히 깊은 협의가 오고 간 것으로 전해진다.
▲ 백두산 베개봉 언덕에서 서쪽으로 바라다 본 백두고원. 길가에는 이름모를 야생화가 한창이고, 멀리 소백산 능선이 보인다. ⓒ정창현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7월 3일 중국 양제츠 외교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최근 한반도정세가 일부 완화될 기미를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북이 말하는 한반도정세란 곧 미국과의 관계다. 북은 미국이 북한을 적대시하는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이 핵개발을 비롯해 한반도에서 일어나는 모든 불안정 정세의 근본원인으로 보기 때문이다.

의외로 6자회담의 의장국인 중국에 대한 인상은 좋지 않았다. 북 측의 학자들은 '대국주의'란 말을 써가며 중국의 민족주의적 경향과 기회주의적 태도를 성토했다. 일본의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총련) 탄압과 '납치문제'를 앞세운 일본의 대북 강경정책에 대해서는 "미국의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변하면 일본도 변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며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남측 의도적 배제 이유 없다

남쪽 정부에 대해서는 섭섭함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듯했다.

"우리가 미국과 직접 대화를 하면 남쪽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냐는 언론보도가 나온다. 분명하게 이야기하지만 남북 사이에 6.15공동선언에서 합의한 '우리민족끼리' 정신에 따라 협의해야 할 사안이 있고, 전쟁 당사자로서 미국과 청산해야 할 문제가 따로 있다."

남쪽 언론보도를 거론했던 안내선생의 말이다. 남쪽을 의도적으로 배제할 이유는 없다는 소리로 들렸다.

필자가 평양에서 돌아온 직후인 7월 13일 북한의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대표(리찬복 상장)는 '담화'를 통해 "정전협정 17항의 요구에 따라 협정 60항을 포함한 조선반도의 평화와 안전보장과 관련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해 유엔대표도 참가하는 조-미 군부 사이의 회담을 제의"했다. 한 마디로 북한과 미국의 군사당국자들이 직접 만나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방안을 논의하자는 것이다.

북측의 군사회담 제의에 대해 국내전문가들은 실현 가능성에는 그다지 무게를 두지 않고 있다. 남쪽이 배제된 것에 대해 거부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평양에서 만남 북측 인사들은 북미대화의 핵심이 '비핵화'가 아니라 '평화 보장체계'이며, 이를 위해서는 북미간에 군사적 문제가 풀려야 한다는 인식을 하고 있었다. 연례적인 한미합동군사훈련도 자주 거론되는 사안이다. 당연히 북한은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는 북미간 군사회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북간에는 이미 남북장성급회담이란 틀이 존재한다.

특히 북한의 군사회담 제안은 미국의 제안에 대한 답변일 수도 있다. 지난 7월 11일 '화해상생마당' 주최 강연에서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는 "평화체제 내용에는 57년 만에 한국전쟁의 종전을 공식선언하는 것과 남북간 국경선 수립, 1992년 남북기본합의 실행조치, 군사력 투명성 제고 등이 포함될 것이며 국경선 주변 부대나 배치된 장비의 통제 등 신뢰구축 조치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버시바우 대사가 언급한 사안들은 북측 입장에서 보면 하나같이 군사당국자간 회담에서 논의될 내용이다. 더구나 그의 발언은 힐 국무부 차관보가 "금년 연말까지 평화체제 프로세스가 시작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강조한 직후 나왔다.
▲ 장군봉에 오른 7월 2일 백두산 정상 주변은 짚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정창현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 두 축으로 진행

북의 군사회담 제안에 대해 미 국무부는 "차기 6자회담에서 북한이 이 문제에 대해 구체적으로 제안하면 논의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힐 차관보는 "평화체제는 군인들이 하는 것이 아니며 정부가 하는 것"이라고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국무부도 언급한 것처럼 지난 2005년 9월 체결된 9.19공동성명에서 관계당사국들이 별도의 포럼에서 한반도의 군사적 대치 문제를 해결하고 현 정전체제를 항구적인 평화협정체제로 옮겨가는 문제를 협의키로 적시했다. 평화협정체제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북미 군사회담은 불가피하게 거쳐야 할 통로인 셈이다.

14일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가동을 중지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 감시검증단의 감시를 허용했다. 18일 열리는 6자회담에서 미국은 북한에 핵 프로그램 신고 등의 실행 계획과 시간표를 제시할 예정이고, 북한은 대북 적대정책을 위한 미국의 행동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15일 김명길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 차석대사는 "불능화 등 2단계 약속 이행을 위해서는 테러지원국 명단 해제와 적성국교역법 적용 종료 등 미국의 상응조치들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미국은 6자회담 산하 5개의 실무그룹이 8월 말까지 상당한 진전을 이루면서 6자회담이 연말까지 실질적 성과를 내고 내년에는 비핵화가 마무리되길 희망했다. 따라서 앞으로 6자회담과 실무그룹회의는 '한반도 비핵화'와 '북미관계 정상화' 두 축으로 이뤄질 전망이다.

최근 정세의 가장 큰 특징은 과거와 달리 북미가 주거니 받거니 '신뢰 쌓기'를 통해 북미간에 '행동 대 행동'원칙이 작동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특히 연말까지 북미간에 핵시설 불능화와 평화체제 협상을 진전시킨다는 포괄적 합의가 깔려 있다는 점에서 이번 6자회담에 거는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 비가 그친 후 백두산에 뜬 무지개. '여명'을 이야기하는 북측 사람들의 희망이 담겨 있는 듯하다. ⓒ정창현

올해 만난 북측 사람들은 '강성대국의 여명', '통일의 여명' 등 '여명(黎明)'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그들은 진심으로 올해 북미관계에서 '희망의 빛'이 밝아 오길 기대하는 듯했다.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는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협정 논의 흐름이 이번에는 꼭 결실을 맺어 다음 백두산 답사 때 더욱 흔쾌한 마음으로 장군봉에 오를 수 있기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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