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호주 출신의 한반도 핵전문가이자 미 노틸러스연구소 사무총장인 피터 헤이즈의 '스토커 국가 : 북한의 핵무장과 미국 핵헤게모니의 종언' 전문이다.
북한의 핵실험 계획 발표 직후인 지난 4일 발표된 이 글에서 헤이즈는 우선 핵위협을 통해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를 이루려 했던 북한의 시도는 양측 간의 불신 등으로 인해 애초부터 실패할 운명이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으로 미국도 북한의 핵무장을 막지 못함으로써 동북아에서의 미국의 지도력이 심각하게 손상된 것은 물론 세계적인 핵확산저지체제도 크게 손상당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한국, 일본 등 역내 동맹국들을 어떠한 핵위협으로부터도 보호하겠다는 미국의 안보공약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이들 나라를 비롯해 대만, 나아가 호주, 인도네시아 등의 핵무장 가능성을 열어놓았으며 이로써 미국의 핵헤게모니는 종언을 고하게 됐다는 것이다.
헤이즈는 이어 미국이 북한의 핵무장을 막기 위해 진정한 협상을 할 용의도, 이를 저지할 강제력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 지금, 나아가 미국과 북한의 기존 태도가 '기적적으로' 바뀔 가능성이 전무한 지금, 임시변통으로나마 더이상의 사태 악화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은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기존 '한반도 비핵화선언'에 참여하는 역내 국가들에 의한 핵확산저지 노력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영향에서 자유로운 독립적인 정책분석가 및 영향력 있는 시민사회의 존재가 필수적이라는 점에서 실현가능성에 대해서는 헤이즈도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다만 북한 핵의 직접적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된 한국과 일본이 핵개발 노력을 자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결국 헤이즈로서도 현 상황에 대한 뽀족한 해결책은 없는 셈이다.
현재 미 부시행정부의 대북 정책 목표를 대북 압박에 의한 북한 지도부의 굴복 또는 붕괴로 파악하고 있는 헤이즈는 그러나 북한이 핵무장할 경우 북미간의 오판에 의한 핵무기 사용가능성은 물론 내전 등 북한이 폭력적으로 붕괴하면서 내전의 한 당사자가 한국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 가능성, 나아가 외부 국가나 테러단체에 이전될 가능성 등에 대해 경고하고 있다.
헤이즈는 특히 내전상황에서의 핵무기 사용이 가장 우려스러운 시나리오라면서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국제사회는 북한의 정치적, 경제적 상황의 안정을 위해 시급히 협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결국 대북 압박보다는 대북 지원을 통해 북한의 핵무장 철회를 유도해야 한다는 주장인 셈이다.
원문은 노틸러스연구소 홈페이지(www.nautilus.org), 또는 동아시아 전문 웹사이트인 <재팬 포커스> 홈페이지(http://www.japanfocus.org/products/details/2238)에서 볼 수 있다. <편집자>
'스토커 국가 : 북한의 핵무장과 미국 핵헤게모니의 종언'
(현 부시행정부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미 행정부는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막고, 갈수록 커져가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안전협정 상의 허점들을 메우는 데 실패했다. (미국이 남한 배치 핵무기를 철수시켰던) 1990년대 초에 잠시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한반도 핵전쟁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지난 3일 북한의 핵실험 계획 발표는 이러한 미 행정부의 실패를 웅변해 주고 있다.
냉전이 지속되는 동안 미국은 일종의 핵헤게모니 시스템을 건설하고 유지해 올 수 있었다. 이 시스템의 근간은 미국의 핵무기가 소련 및 중국 핵무기의 지역내 국가에 대한 위협을 억지해 준다는 동맹국들의 양해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미국의 동맹국들은 물론 적대국인 소련과 중국도 공유하고 있었다. 냉전기간 동안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바탕으로 동맹국들의 핵보유 열망을 잠재웠으며, 동맹국 지도자들과 공공연한 거래를 했다. 동맹국들은 미국이 자신들에게 핵억지력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이웃나라들의 핵무장을 막아준다는 보장을 조건으로 자신들의 핵주권을 포기했다.
그러나 이러한 (핵헤게모니) 시스템은, 지난 수십년간 미국의 핵위협에 시달려 왔으며 지정학적 위치 덕택으로 어떠한 외부영향 - 어쩌면 최대 동맹국인 소련과 중국이 발휘할 수도 있었을 - 으로부터도 절연됐던 북한이라는 나라에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이러한 과거의 실망스런 기록에 비추어 다음과 같은 2가지 질문에 대한 대답을 모색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어째서 미국의 핵헤게모니는 평양의 핵야망을 좌절시키는 데 그토록 완벽하게 실패하고 말았는가?
둘째, 이러한 결과는 불가피한 것이었는가? 아니면 지난 10년간의 핵대결을 통해, 뒤늦게라도 북한의 핵무기 포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교훈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미국 괴롭히기(Stalking the United States)
북한의 핵도전은 미국의 핵전략이 자신의 동맹체제 안에서 심각하게 도전을 받게 된 바로 그 시기에 시작됐다. 동맹국의 지배엘리트들은 한편으론 미국의 일방주의에 갈수록 짜증을 내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적인 핵확산저지체제가 핵무기 확산을 막아내지 못하고있는 데 대해 실망하고 있다. 북한이 핵확산저지체제에서 뛰쳐나옴으로써 미국의 핵헤게모니를 떠받쳐 왔던 미국과 동맹국 간의 거래는 사실상 무효화됐으며, 이제 우리는 이러한 변화가 동북아지역에 미칠 영향들을 보게 될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북한은 당초 자신의 핵위협을 최대 적국인 미국과의 대화,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미국과의 안보관계 형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북한과 미국의 안보협력이라는 북한의 구상은 미국에게는 너무나도 얼토당토 않은 것이라 거의 모든 미국의 안보담당 관리나 전문가(US security establishment)들은 이러한 북한의 구상을 알아차리거나 이에 대응할 수 없었다. 미국은 그저 북한에 대한 핵위협을 강화하는 전통적인 전략으로 대응했을 뿐이며, 이는 다시 북한의 핵야망을 부추길 뿐이었다. 북한이 미국의 긍정적 대응을 유도하기 위해 핵위협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면 할수록, 미국의 대응은 더욱 차가와질 뿐이었다. 이는 다시 북한의 보다 도발적인 대응으로 이어졌으며, 결국 북한의 핵확산체제 탈퇴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북한의 '스토커'전략이 실패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실패의 원인은 부분적으로 미국에게는 북한핵문제보다 훨씬 중요한 다른 관심사들이 있었고, 북한의 핵위협을 무시해도 괜찮았기 때문에 미국이 움직일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북한의 핵위협에 대응해 평양측이 제시한 조건으로 협상을 하느니, 힘으로 대응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략적 차원에서 보자면 미국과의 안보관계 수립을 위한 방법으로서 핵무기로 미국을 위협한다(stalk)는 북한의 전략은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었다. 협박은 불신을 키우고 관계를 악화시키기만 할 뿐이다. 결국 북한은 피폐하고 파산일보 직전에 상태에까지 몰렸으며 장기적인 생존전망마저 불투명한 상황에 이르렀다.
하지만 미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핵패권국가로서 북한이라는 조그만 나라의 핵위협을 극복해지 못함으로써 동북아지역에서 미국의 지도력이 심각하게 손상된 것은 물론 세계적인 핵확산저지시스템도 크게 손상시켰다. 북한의 성공적인 핵무기 보유는 동아시아 지역에서 일련의 연쇄반응을 일으킬 가능성을 제기한다. 미국의 핵헤게모니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면서 일본, 대만, 한국은 물론 장기적으로는 호주, 인도네시아, 심지어 미얀마까지 핵무장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쩌다가 북한이 핵실험을 준비하는 지경에까지 이른 것일까? 세계적인 테러와의 전쟁 및 이라크 점령에 따른 비용 증가로 골치를 썩이고 있던 부시행정부는 북한의 핵도전에 대한 대응으로 2003년 4월 6자회담을 출범시켰다. 2005년 12월까지 4차례의 6자회담이 열렸지만 북한으로부터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겠다는 어떠한 구체적 약속도 받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미국의 완고함에 부딪힌 북한은 처음에는 무기급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고 시사하더니 나중에는 점점 더 큰 목소리로 외치고 (심지어 2004년 1월에는 방북한 미국의 주요 핵과학자에게 시험해보라며 플루토늄 금속을 건네주기도 했다), 급기야 이를 '무기화'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미국은 북한과의 직접 양자협상을 거부하면서, 중국을 비롯한 역내 국가들이 북한과 핵문제를 협상하라고 고집했다.
초강대국 미국이 사실상 기권, 즉 북한과의 직접협상을 회피하자 역내 국가들도 북한과의 협상을 줄여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2005년이 되자 동북아에는 중국 및 남ㆍ북한 대 미ㆍ일이라는 구도가 뚜렷이 드러났다. 미국의 주도적 역할 포기, 테러와의 전쟁에서의 일방적 행동, 그리고 2003~2005년 동안 아무런 실질적 성과를 내지 못한 6자회담 틀을 고집하며 말뿐인 외교협상에 집착하는 미국의 태도는 미국 핵헤게모니가 최저점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내 국가들의 눈에는 미국에게는 북한의 비핵화를 달성할 진정한 의도가 없음이, 그리고 이를 강제할 능력도 없음이 명백히 드러났다.
한편 북한은 2005년 IAEA 사찰팀을 북한에서 추방하고 영변에 보관 중이던 폐연료봉의 봉인을 뜯어냈으며, 이를 재처리해 핵무기 8~10개를 만들어낼 수 있는 핵분열물질을 확보했다. 2005년 2월 북한은 핵보유국임을 공식선언했고, 3월 31일 김정일은 북한 내부를 향해 북한의 핵억지전략이야말로 한반도의 비핵화를 이룰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자랑하면서 북한의 핵무기와 민족주의를 결합시켰다. 이어 북한은 자신도 핵보유국인 만큼 미국과 동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결국 미국의 핵헤게모니를 떠받치고 있던 핵심적 거래, 즉 한편으로는 동맹국들에 대해 그들의 적대세력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을 막아주겠다는 약속, 다른 한편으로는 기존 핵보유국들에 대해 독일이나 일본 등 핵심 동맹국의 핵무기 보유도 저지하겠다는 약속 모두가 지켜질 수 없게 된 것이다. 2006년이 되자 미국이 동북아 지역에서 전략적으로 표류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반도 핵문제의 모든 당사자들에게 분명히 드러났다. 부시 행정부의 마지막 허장성세는 마약 밀수라든가 위조지폐 제조 등과 같은 일련의 지엽적 문제들과 관련해 김정일 정권의 항복을 이끌어내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북한을 6자회담으로 복귀시키기는커녕 최근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던 북한의 합법적 대외무역을 부패한 거래로 몰아넣는 역작용을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2005년 말 이후 미국은 북한에 대해 금융제재 등을 가하고 있으며 이제는 북한 지도부의 굴복 또는 붕괴를 꾀하고 있다.
억지가 아닌 다그침(Compellence, not Deterrence)
자,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대부분의 미 정책결정자들에게 자신을 동등한 협상 상대로 대우해 달라거나 지금까지 미국과의 적대관계에서 앞으로는 우호적 관계를 수립할 용의가 있다는 북한측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으로 비쳐진다. 따라서 이들은 북한의 주장을 말도 안 되는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일부는 북한정권의 범죄적 성격 때문에 그러한 전환을 불가능하다고 단언한다. 이른바 '소프라노 국가' 이론이다. 또다른 일부는 평양의 행동에 관해서는 다른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 한, '가장 단순한' 설명을 택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믿고 있다. 즉 북한 지도부는 이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전략핵무기 보유를 최고 최대의 정책과제로 추구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분석가들은 이러한 설명과 일치하지 않는 북한의 돌출행동, 또는 북한의 동기가 보다 미묘하다거나 상호모순됨을 보여주는 여러 이상징후들을 단순히 무시하고 있다. 또한 다른 분석가들은 '중립세력(non-partisan)으로서 미군의 한반도 주둔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요지의 북한 고위 간부의 발언, 심지어 김정일 본인의 발언조차도 한미동맹 또는 미일동맹을 이간질시키려는 순전히 전술적이며 전혀 신뢰할 수 없는 발언으로 치부하고 있다. 김용순을 만난 바 있는 전직 미 관리가 말한 것처럼, 북한의 발언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북한은 왜 핵무기를 가지려 하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필요하고도 유용한 일이다. 북한은 자신들이 보유한 핵무기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즉 핵무기 독트린에 대해 한번도 구체적으로 설명한 적이 없다. 제대로 시험되지 않아 신뢰성이 의심받는, 즉 열등하고 상대적으로 왜소한 핵무기를 정치군사적 자산으로 바꾸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핵무기 실험 성공에 따른 민족적 열광이 시들해진 이후, 4류 핵무기를 힘과 능력의 원천으로 만드는 일, 그리하여 실제 체제 강화에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하는 엄청난 과제에 직면한 나라는 북한만이 아니다. 인도도 비슷한 문제에 봉착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평양의 느릿느릿한(slow-motion) 핵무기 개발 행보는 북한이 전심전력으로 핵무기 개발을 추구해 왔다거나 또는 제네바합의에 따른 비교적 작은 당근 때문에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늦춰 왔다는 이론들로는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객관적 힘의 우열에 의해 미국이 북한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줄어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커져 왔다. 따라서 북한이 제네바합의에 의해 10년 가까이 핵무기개발을 지연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또한 1990년대 중반에 미국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중단시킬 수 있는 수단은 전혀, 또는 거의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설명이 제시돼야 한다.
필자의 견해로는, 북한은 핵위협을 미국에 대한 일종의 다그침으로 활용했다. 즉 자신보다 훨씬 강력한 핵강국인 미국에 대해 자신의 안보 및 체제 생존과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뭔가 대응을 하라는 요구로서 핵무기를 사용한 것이다. 이러한 위협들은 의도적으로 애매모호하게 이뤄졌다. 또한 이러한 위협을 명시적, 묵시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능력도 전혀 그 실상을 알 수 없도록 비밀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하지만 만일 제2의 한국전쟁이 발발할 경우 북한은 자신의 핵무기로 남한 또는 일본을 겨냥하든가 나아가 미국을 공격함으로써 미국의 핵심적 국익을 위협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북한은 또한 9.11사태 이후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공포심리도 활용했다. 북한이 핵물질, 나아가 핵무기 자체를 다른 국가나 테러단체 등에 팔아넘길지도 모른다는 우려 말이다. 북한에게 있어 핵무기는 약자의 무기, 절망적 상황에 처한 자의 무기이면서 동시에 그 가공할 만한 파괴력 때문에 단숨에 초강대국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무기다. 북한은 절대로 냉전시절의 악동에서 냉전 이후의 국제환경에 걸맞는 유순한 국가로 거듭 태어날 수 없다는 미국의 완고하고도 끈질긴 고정관념에 직면한 북한은 굳게 닫힌 미국과의 협상의 문을 열어젖히기 위해 핵위협을 사용한 것이다.
핵의 불평등에 대한 북한의 이러한 도전은 핵확산금지조약의 핵심, 나아가 미국 핵헤게모니의 근본적 기반을 건드리는 것이다. 지난 1991년 당시 북한 노동당 핵전략의 책임자였던 김용순은 평양에서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와 미국이 한 테이블에 앉아 핵문제를 논의해야 할 필요성을 이렇게 비유해보고 싶소. 자, 지금 테이블에 두 사람이 앉아 있는데 한 사람은 커다란 칼을 들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아무 것도 갖고 있지 않소. 그런데 칼을 가진 사람이 아무런 무기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의 호주머니를 뒤지겠다고 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오? 우리는 지금 상황을 초강대국이 핵무기도 없는 약소국에 대해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형국으로 보고 있소이다. (…) 강대국과 약소국이 있을 수는 있지만 우월한 국가와 열등한 국가로 나눌 수는 없는 법이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있을 수는 있지만, 지배국과 피지배국으로 나눌 수도 없소."
북한은 미국의 핵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고 한반도의 분단 및 전쟁에 의해 초래된 북한의 안보불안에 대응하기 위해 핵무기를 이용했다. 이른바 전형적인 핵무기의 부정적 사용의 예다. 평양은 또한 (핵위협을 통해) 워싱턴과의 안보관계 수립을 시도해 왔다. 이는 일본, 중국, 러시아 등 인접한 강대국들의 영향력을 상쇄하기 위해, 또한 인구는 자신보다 2배나 많으며 경제력으로는 50배나 되는 데다 중국 및 러시아와도 국교를 수립한 남한에 의한 흡수통일을 피하기 위해서는 먼 곳에 있는 강대국인 미국이 필요하다는 북한의 현실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러한 핵무기의 긍정적 사용이 동맹국이 아닌 적국에 의해 시도된다는 것은 미국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즉 미국으로서는 북한이 자신의 안보파트너가 된다는 것은 도대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북한의 고위 관리들이 일관되게 주장해 왔던 것이며 이들의 말을 믿지 못할 이유도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미국의 핵전략가들은 북한의 행동을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북한에 대한 이들의 고정관념이 그러한 가능성을 애초부터 봉쇄해 버린 것이다. 필자의 견해로는 평양의 다양한 화해제스처들을 무시해 버린 것야말로 미국 전략가들의 실수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지금은 사망한 김용순은 지난 1993년 북한과 미국을 갈라놓고 심각한 대립들을 일단 제쳐놓아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양측간의 대화로 핵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필요하며 또 가능한 일이다. 조선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칼에는 칼로. 떡에는 떡으로.' 이젠 칼을 버리고 떡을 쥐어야 할 때다."
물론 '우리는 미국과의 정치적 타결을 최대 정책과제로서 추구하고 있다'는 김일성, 김정일을 비롯한 북한의 최고지도자들과 외교관들의 수많은 발언을 미국이 듣지 못했던 - 혹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듣지 못했다고 믿게 된 - 사정을 설명해 줄 다른 이유들도 있다. 북한의 '대미관계 개선' 신호들은 신랄한 언사들을 동원한 북한의 반미 선동, 협상 단계들을 자르고 잘라 끝없이 물고 늘어지면서 최대한의 요구를 끝까지 고집하다 막판에 가서야 타결 짓는 북한 특유의 벼랑끝 협상전술, 그리고 동시행동 원칙에 대한 완고한 고집 등에 파묻혀 버렸으며, 설령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이 이러한 신호를 알아챘다 하더라도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게 만들었다. 북한이 자신의 북을 요란하게 두드릴수록 그들의 말은 미국에 전달되기가 어려워졌다. 이처럼 미국이 북한으로부터 듣는 것이 적어질수록 미국은, 아주 짧은 기간 동안 제한된 대북 보장을 해주는 것 외에는, 대체로 냉전시절의 고전적인 억지, 또는 다그침에 더욱더 의존했다.
지역적이며 임시변통적인 대응
워싱턴이나 평양, 또는 양자 모두의 기존 정치문화와 지향을 기적적으로 바꾸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지금, 손상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은 이 지역 국가들에 의한 지역적 핵확산저지시스템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이 시스템은 세계적인 NPT/IAEA 시스템에 부합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은 NPT/IAEA 시스템의 일부가 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역 내에서 발생한 핵위협을 감소시켜야 할 지역내 국가들의 필요에 따라 이에 부응하는 형식으로 개발돼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은 시간의 경과와 함께 북한 핵무기 프로그램의 긴박성을 완화시키면서 궁극적으로는 남북화해의 일환으로서 핵무장 해제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의 출발점은 지난 1992년 남북한에 의해 발표된 기존 '한반도비핵화선언'에 (한반도에 근접한) 중국의 일부, 러시아 극동지방, 일본, 그리고 대만을 포함시키는 것이다. 처음에는 남북한간의 기존 선언에 남북한 이외의 당사자들이 참여 의사를 밝히는 부속서를 첨부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런 다음, 다른 국가들도 선언의 공약사항 중 일부 또는 전부에 대한 준수를 약속하고, 이를 영토의 일부 또는 전부에 적용하면 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제는 한국이 비핵 공약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 이 지역 비핵화의 최대 우선과제가 된다. 또한 일본이 북한의 노골적인 핵무기 시위에 대한 대응으로 핵무기 개발을 추구하지 않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두 경우 모두에서 독립적인 정책분석가 및 보다 영향력 있는 시민사회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 미국과의 핵동맹 및 핵헤게모니 시스템에 깊이 관련돼 있고 이 두 나라에서는 그러한 결정적 요소가 결여돼 있다는 것이 드러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미국 핵헤게모니시스템 - 미국의 동맹국들을 기존 핵보유국들에 의한 핵위협에서 보호해 주며 지역내 적대국가의 핵보유를 저지하겠다는 약속에 바탕을 둔 - 에서 북한의 탈퇴가 가져올 영향은 치명적이 될 것이다.
아직도 많은 미국인들은 6자회담을 통해 중국이 책임 있는 지역강국으로 '커밍아웃'을 했고, 북한이 핵무장을 한다 한들 고립되고 봉쇄된 국가로서 결국은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점에서 어쨌거나 6자회담은 미국 외교의 성공작이라는 환상에 젖어 있다. 그러나 북한의 핵실험 이후 전개될 상호비난전 속에서도 6자회담이 가치 있는 회담인 척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실제로는 이보다 더 진실에서 거리가 먼 주장도 없다. 초강대국으로서, 또한 핵헤게모니국가로서 미국의 명성은 동아시아에서 산산조각이 났다. 사실상 미국은 헤게모니 국가로서의 역할을 포기했으며, 지역내 국가들로 하여금 자신의 방위는 자신이 알아서 하라는 식으로 방치해 버린 꼴이 됐다. 놀랄 것도 없이 지역내 국가들은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한국이 바로 가장 대표적인 예인데, 한국은 핵무장이 확실시되는 북한을 안정화시키려는 결의에 차 있으며 이제까지 미국에만 의존해 왔던 무기 구입선을 다변화하고 있다. 현재 한국은 러시아연방으로부터 상당량의 무기를 구입하면서 미국 무기제조업자들의 애를 태우고 있다.
핵무기 대응사용의 위험을 줄이려면
정치적, 나아가 국가간 행동의 국제적 기준을 잘 알지도 못하고 지킬 의사도 없는 조그만 은둔국가가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가? NPT를 탈퇴한 국가가 별 탈없이 지낼 수 있다는 사실이 NPT체제에 미칠 부정적
영향이라든가, 한반도의 분단과 불안정이 남북한은 물론 비(非)한반도 국가들에 미칠 부담 등을 제쳐놓는다 하더라도 북한의 핵보유는 앞으로 수십년간 핵 사용(next-use) 위험성을 증가시킬 것이다.
이미 필자가 지적했던 것처럼, 만일 북한이 핵 '스토커 국가'가 돼서 핵레버리지를 이용해 미국에 대해 자신을 덜 적대적인 방식으로, 보다 대접해주는 방식으로 대해 줄 것을 요구한다면 미국은 지금까지 해 온 것과 같은 북한에 대한 고립과 압박이 북한의 스토커적 행동을 악화시킬 것인가, 아니면 완화시킬 것인가를 심각하게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특히 핵의 대응사용((next-use) 위험이 긴박해졌을 때 말이다. 대개 상습범이 그런 것처럼, 북한도 미국의 태도가 진짜로 바뀌었다고, 즉 자신의 목표가 완수됐다고 생각될 때까지 핵위협을 통한 스토커적 행동을 멈추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개인 스토커와는 달리 핵위협으로 다른 나라를 위협하는 스토커 국가를 감금해둘 방법은 그리 간단치가 않다.
현재 미국은 북한군과 미군을 함께 휴전선 근방에 묶어두고 있는 안보불안이라는 맥락에서 북한 군부와 함께 핵무기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공동의 언어를 갖고 있지 못하다.
평양의 화해 제스처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거부는 더 많은 '핵 스토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즉 전쟁 위기의 순간에 북한은 창조적이고도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핵위협을 구사하거나 핵무기를 배치하고, 나아가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할지도 모른다. 북한이 자신의 핵무기 독트린을 개발하거나 실제 사용 방법을 택함에 있어 미국이나 서방 국가들의 핵억지, 위기관리 등에 대한 개념적 틀을 따를 것이라고 믿을 이유는 전혀 없다. 콘돌리자 라이스가 지난 2000년 <포린어페어스> 논문에서 밝혔던 것처럼, '만일 북한이 대량살상무기를 획득한다 해도 이를 사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핵무기를 사용하려는 어떤 시도도 국가 전체의 절멸을 가져올 것이기 때문에'라며 북한에 대해 '명백하고도 고전적인' 억지 위협(deterrent threats)을 가한다 해도 북한은 오히려 미국을 끌어들이기 위해 바로 이 위협을 역이용하려 할지도 모르며, 그에 따라 양측의 오판, 나아가 핵선제사용의 위험성을 극적으로 높일 수도 있다.
사실 한반도에서 가장 우려스러운 핵 대응사용의 시나리오는 미국 및 동맹국들과 북한 간의 전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북한 자체가 내전에 휩싸였을 때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만일 북한이 폭력적으로 붕괴될 경우, 북한의 핵무기 또는 핵물질은 남한을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도발적 목적으로 핵무기를 사용하려는 북한 내 어느 한 파벌에게 가거나, 아니면 북한 외부에 잔존해 있는 범죄네트워크에 의해 국외로 반출돼 핵야망을 가진 국가 또는 테러단체 등에 가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만으로도 북한의 정치 및 경제 상황을 안정시키기 위한 국제사회의 협력이 시급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체물을 찾을 수 없는 핵무기의 가공할 만한 위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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