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박근혜의 816일…'바람' 세졌지만 '벽' 못넘어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박근혜의 816일…'바람' 세졌지만 '벽' 못넘어

'박정희의 그늘'은 여전히 한계…'합리적' 평가 줄고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가 16일 2년 3개월의 임기를 마치고 당의 사령탑에서 물러났다. 2004년 임기 3개월짜리 임시대표로 첫 선출된 이후 총 816일간 한나라당을 이끈 박 대표는 불법 대선자금 후폭풍과 탄핵 역풍에 휘말려 휘청대던 한나라당을 30%대의 안정적인 지지율 위에 올려놓으며 국민 앞에 안정적인 리더십도 선보였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폐지, 사립학교법 개정 등 본인의 신념과 상충되는 사안들에 대해서는 극단적인 이념 공세도 불사했던 박 대표에게 '태생적 보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은 대선가도에서 여전히 숙제로 남았다.

이미지로 얻은 '박풍', 안정적 리더십으로 '업그레이드'

박 대표는 2004년 3월 23일 임기 3개월짜리 '구원투수'로 지도부에 입성했다. 취임 후 박 대표의 첫 행사는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대로변에 있던 한나라당 당사 현관에서 현판을 떼는 일이었다. '부패와의 절연'의 의미로 중소기업 전시장 터에 지어진 천막당사로 옮겨진 현판은 염창동 현 당사로 옮겨지기 전까지 84일 간 컨테이너 회의실 앞을 지켰다.

박 대표는 퇴임식에서도 "당 대표가 된 직후 당의 간판을 떼어내 찬바람 부는 천막당사로 걸어가던 그때를 잊을 수 없다"면서 "그 짧은 길이 마치 천리 가시밭길 같았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 2004년 3월, 취임직후 천막당사로 옮기던 이 순간을 박근혜 대표는 임기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꼽았다. ⓒ연합뉴스

박 대표의 말대로 "당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어려웠던 시기"에 당을 맡았지만 20여 일 후 총선 결과는 기대를 뛰어넘은 '선전'이었다. 선거 막바지에 박 대표는 "개헌 저지선인 100석만 넘게 해 달라"고 호소했으나 한나라당은 121석을 얻은 것이다.

악수를 많이 해 부은 손에 붕대를 감고서 전국을 누빈 박 대표의 바람, 소위 '박풍(朴風)'이 '차떼기당', '탄핵 주도당'이란 부정적 이미지를 상당 부분 희석시킨 것으로 풀이됐다. 당시 박 대표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를 닮은 외모와 '퍼스트 레이디' 시절부터 몸에 밴 절제된 언동으로 '부드럽지만 약하지 않고 예절과 상식을 지키는, 나라의 맏딸 이미지'란 평가를 받기도 했다.

2004년 총선에서 영향력을 발휘한 '박풍'은 그 뒤 몇 차례 치러진 재보궐 선거의 고비마다 수훈갑 역할을 톡톡히 해 내면서 박 대표의 최대 강점으로 자리 잡았다. '누구나 알아보는' 인지도를 표로 연결시키는 능력은 현재 거론되는 어떤 대선주자도 갖지 못한 박 대표만의 자산인 것이다.

그래서인지 박 대표 스스로도 "위기에 놓은 당을 맡았던 것"을 임기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으로 꼽으면서도, "그 와중에 열심히 노력했더니 지지가 올라간 것"을 또 가장 보람된 기억으로 회상했다.

그리고 5·31 지방선거 과정에서 발생한 불의의 피습사건은 단순한 인기몰이 차원이던 '박풍'을 업그레이드 하는 계기가 됐다. 지방선거에서 압승을 거뒀을 뿐 아니라, 붕대유세를 통해 열린우리당이 우세하던 대전 선거의 판세까지 뒤바꿔놓음으로써 극대화된 '박풍'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다.

이같은 탄탄한 대중적 인기를 기반으로 2년 3개월갑의 업적들은 착실하게 둔덕을 쌓았다.

박 대표는 천안연수원을 국가에 헌납하고 공천비리 중진 의원들을 단호하게 처벌하는 과정에서 '깨끗한 정치인'으로 이미지 변환을 시도했고, 한겨울 추위에도 한 달이 넘게 밀어붙인 사학법 반대 장외투쟁을 통해서는 보수 진영의 신뢰를 얻으려 애썼다.

박 대표 측은 임기동안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9번이나 바뀌었음을 강조하며 대비효과도 노렸다. "여야를 막론하고 근래에 당원들의 환송을 받으며 자랑스럽게 이임식을 거행하는 당 대표가 없었던 점을 감안하면 이것 하나만으로도 박 대표가 성공한 대표였음이 입증됐다"는 당의 평가처럼, 부침이 심한 한국 정치사에서 당원들에 의해 선출된 당 대표가 박수를 받으며 정해진 임기를 마친 것 자체가 '안정적인 리더십'으로 여겨지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정수장학회·인혁당 등 '가문의 과거사' 정면 돌파 못해

그런 반면, 2년 3개월 동안 박 대표가 보여준 한계도 분명했다.

현재 박 대표가 누리고 있는 '대중적 인기'의 뿌리가 박정희 전 대통령의 후광에 닿아 있다는 것은 박 대표 측에서도 쉽게 부인하지 못하는 사실이다. 그러나 대권에 도전하는 박 대표에게 '대통령의 딸'이란 꼬리표는 벗어나야만 하는 그늘이기도 하다.

한나라당 임태희 의원이 이날 배포한 '주요 일간지에 나타난 한나라당에 대한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보수 언론들조차 박 대표의 '수구보수를 탈피한 개혁적인 자세'에는 후한 점수를 매기면서도 '박정희의 딸'이라는 점은 집권을 위해 극복해야 할 한계로 꼽았다.

그러나 임기 중 '가문의 과거사'와 관련한 사건이 불거질 때마다 박 대표가 보여준 행태는 그가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기에 역부족임을 증명한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이다.

작년 중반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위원회가 박정희 정권의 정수장학회 강탈과 인혁당 사건의 조작 사실을 잇달아 규명해 내자 박 대표는 "정수장학회를 사회에 환원하라는 것은 엉터리 주장"이라고, 또 "인혁당 사건 조작 주장은 한마디로 가치 없는 모함"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이는 드러난 역사적 진실을 심판대에 올려놓고 재평가를 받는 정공법 대신 정치공학적 맞불 작전으로 논란을 피해가는 변칙을 택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를 넓힐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마다한 자충수로 평가 받았다.

또, 박 대표가 여권이 추진한 국가보안법 폐지와 사립학교법 개정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이를 '국가 정체성'에 연계시켜 이념투쟁으로 몰고 간 것 역시 스스로의 보수성을 극복하지 못한 장면으로 국민들의 기억 속에 남았다.
▲ 2005년 겨울, 사학법 개정 반대를 외치며 장외 투쟁에 나선 박 대표, 이 과정에서 박 대표는 보수적이고 완고한 이미지로 회귀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연합뉴스

우파 진영에서는 이 두 번의 투쟁을 '구국운동'으로 치켜세우지만 그 과정에서 박 대표와 당내 소장파는 완전히 등을 지게 됐고, 이는 향후 집권전략에도 도움이 될 리가 없다.

"국보법을 폐지하면 광화문에 인공기가 나부낀다", "개정 사학법이 나라를 망친다"는 등의 논리비약으로 일관하는 박 대표를 보면서 이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당내 소장파들은 물론 이들과 경향을 함께하는 30~40대 중도성향 유권자들의 동조를 끌어내는 일에 실패했던 것이다.

취임 당시 탄핵에 대해 합리적인 태도를 보여 소장파들의 지지를 받았고 취임 초기에는 남북문제에 대한 유연한 접근으로 중도 성향의 유권자들의 주목받았던 박 대표가 오히려 임기 중반부터는 보수적이고 완고한 이미지로 회귀함으로써 기존 지지층 외에 '플러스 알파'의 지지를 유인해 낼 수 있었던 기회를 스스로 버렸다는 얘기다.

비록 '정권 심판론'으로 대치선을 그은 5·31 지방선거에서는 여권에 표를 주고싶지 않은 중도 유권자들이 '울며 겨자먹기'로 한나라당에 힘을 실어주는 현상을 빚었지만, 이들의 표는 개인 자격으로 대권 라운드에 선 박 대표가 사학법 장외투쟁에서처럼 완고한 보수성향을 노출시킨다면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는 유동적 지지에 불과하다.

대권가도에 오르며 5·31 지방선거에서의 압승을 전리품으로 챙긴 박 대표가 태생적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 없이 과연 그 외형적 성과를 지켜나갈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