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사회는 양극화 문제로 인하여 계층 간 위화감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또한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으로 빈곤의 문제가 드러나고 있다.
과거에는 빈곤이 교육수준이 낮거나 주거가 불안정하거나 질병이 있거나 일자리가 없거나 하는 특정한 부류의 소외계층에 해당하는 문제였지만, 지금의 빈곤은 정상적인 노동을 하고 정상적인 가족을 이루고 있음에도 가난한 사람들이 늘어나는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는 기존의 빈곤한 계층이 더욱 빈곤해지는 동시에 중산층의 몰락과 새로운 빈곤층의 유입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불안정한 일자리, 낮은 임금, 누적되는 금융채무와 가계부채 등으로 대다수의 노동자와 서민들이 빈곤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빈곤의 문제는 더 이상 소수의 문제, 특정한 현상이 아니다. 이제 빈곤은 사회구조적인 맥락에서 이해하고 풀어가야 한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4일 서울 정동 프란체스코성당 교육관에서 빈곤사회연대, 금융피해자 파산지원연대, 빈곤과 차별에 저항하는 인권운동연대를 비롯한 빈곤 및 인권 분야 시민사회단체와 금융피해자(신용불량자)들의 자발적인 모임인 신용불량자클럽 등이 공동으로 토론회를 열었다. '빈곤의 또 다른 얼굴, 금융채무의 사회적 책임을 말한다'라는 주제로 열린 이번 토론회는 빈곤 문제의 구체적인 실태로 드러나고 있는 신용불량자, 즉 금융채무 불이행자들이 겪는 고통과 금융채무의 사회적 책임의 문제에 대한 대안적 해법을 모색하는 자리였다.
토론회 참석자들은 금융채무의 책임이 개인에게만 돌려지는 한국사회의 현 상황을 짚어보고, 금융채무의 책임이 한국사회의 구조적인 요인에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자 했다. 또한 금융채무의 문제가 '빈곤과 양극화'와 관련해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론화되지 못하는 현실에서 빈곤이 구체적인 고통으로 나타나는 지점인 금융채무의 문제가 새롭게 조명됐다.
특히 토론회에 앞서 열린 '금융피해자 인권증언대회'에서는 금융채무로 인한 고통 속에서 일상적으로 사회적 차별과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는 금융피해자들이 직접 나서서 자신들이 겪어 온 사회적 차별과 인권침해에 대해 문제제기하고 발언했다. 이들은 그동안 금융채무로 인해 생활고를 겪었을 뿐 아니라 '신용불량자'라는 사회적 주홍글씨의 낙인이 찍히는 바람에 사회적 차별과 인권침해를 감내해야 했다.
'금융채무 불이행자'라는 표현보다 '신용불량자'라는 표현이 여전히 사회적으로 더 널리 사용되는 것도 문제다. 이는 단지 용어선택의 문제인 것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사회적 차별이라는 폭력을 반영하는 것이고, 금융채무의 책임을 온전히 '개인'에게만 지우는 우리 사회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IMF 사태 이후 생겨난 생계형 채무자들 가운데 채무변제 능력을 상실한 금융채무 불이행자들은 '금융피해자'이기도 하다. 그들이 채무불이행자가 된 것은 사회구조적인 조건 때문이었다. 또한 그들은 정규직 노동시장에서 소외되는 등 일련의 사회적 차별을 겪고 있고, 불법추심 등 인권침해까지 당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생계형 자살과 가족 집단자살이 급증하고 있지만, 이런 문제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개인에게 '도덕적 해이'의 책임을 묻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서 300만 명이 넘는 노동자, 서민들이 개인으로서는 책임질 수도 없는 금융부채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그들의 가족까지 합하면 어림잡아 1000만 명 이상이 금융부채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IMF 사태 이후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결과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불안정한 일자리, 낮은 임금, 구조적인 고금리가 초래되고, 이로 인해 노동자와 서민의 가계는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더구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금융대출에 대한 개인의 변제능력을 약화시킨 반면 은행과 카드사들은 각 개인의 변제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경쟁적으로 공격적 영업에 몰입했다.
길거리 카드발급, 미성년자 카드발급 등 이른바 '묻지 마 카드발급'에 앞장서 온 은행과 카드사 등 여신기관들의 기형적 영업행위가 노동자, 서민의 가계를 몰락으로 몰고 갔다. 여기에 정부도 한몫 거들면서 신용카드 복권제와 세수 확대를 위한 신용카드 활성화 정책 등을 전개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카드사의 현금서비스 한도제한 폐지, 신용카드 발급조건의 완화 등 금융채무를 양산할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정책과 장치들이 도입됐고, 고금리를 제한하는 이자제한법은 폐지됐다.
그 결과 국민의 상위 23%를 제외한 나머지 국민들은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상대적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등 소득분배 구조의 악화가 초래됐고, 금융채무로 고통받는 노동자, 서민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금융피해자들과 빈곤 및 인권 분야 시민사회단체들은 이번 토론회에서 '금융채무의 사회적 책임'을 내걸었다. '빚진 죄'로 인해 말로만 듣던 추심업체와 금융자본의 채무이행 독촉에 시달리며 불면의 밤을 지새워야 했던 '신용불량자'들은 이제 '금융피해자'라는 자기의식을 갖고 '금융채무의 사회적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하루하루 쌓여만 가는 추심업체의 독촉장과 언제 걸려올지 모르는 추심업체 직원의 불호령에 간과 쓸개를 다 내놓으며 머리를 조아리던 2등 국민으로서의 '신용불량자'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금융채무에서 헤어나기 위해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이어 온 눈물겨운 삶. 이것이 신용불량자들의 보편적인 모습이었다. 금융채무를 갚으려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금융채무 문제가 더 이상 개인이 책임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그리고 '금융채무는 사회적, 구조적 맥락에서 이해하고 사회적으로 책임져야 할 사안'임을 인식한 금융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이번 토론회에서 제기된 '금융채무의 사회적 책임'이라 함은 채무탕감 정책으로 실시되고 있는 파산제도와 개인회생제 등과 같은 법, 제도의 도입만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금융채무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는 일체의 사회적 이데올로기, 금융자본 및 여신기관의 입장만 대변하는 정부의 태도, 그리고 금융피해자를 둘러싼 반인권적 사회적 차별의 문제와도 관련되는 것이다. 또한 최근 정부와 여당에서 강행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구조조정의 일환인 비정규직 관련법과도 관련성이 있다.
토론회에서 제기된 주장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정부가 직접 '개인부실채권'을 매입하는 방식으로 개인채무를 탕감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여신기관의 무리한 기형적 영업행위로 인해 미성년자, 장기실업자, 전업주부, 대학생, 기초생활수급자 등 저소득 계층에 속하는 소액채무자들의 채무가 여신기관의 입장에서는 부실채권이 돼 버렸다. 이런 소액채무자들은 채무상환 능력이 없다는 점에서 탕감의 대상이 돼야 한다.
2005년 정부가 추진한 기초생활수급자 채무 유예정책에 따라 자산관리공사가 인수한 개인부실채권의 채권매입가격률은 1.98%에 불과하고, 2차 배드뱅크인 희망모아가 작년에 배드뱅크의 경험을 살려 결정한 채권매입가격률은 4.51%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여신기관의 개인부실채권이 가령 100만 원이라면 그 중 기껏해야 2만~5만 원 정도에 그 채권이 자산관리공사나 희망모아에 양도된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가 적은 예산으로도 이런 개인부실채권들을 일괄 매입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IMF 사태 이후 정부는 부도위기에 처한 기업들을 회생시키기 위해 공적자금을 대대적으로 투입했다. 따라서 저소득 계층에 속하는 소액채무자들의 개인부실채권을 해소하는 데 정부가 공적자금을 투입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소득능력이 취약한 저소득 계층 소액채무자에게 분할 방식으로 상환을 강제하는 신용회복위원회나 배드뱅크 등의 프로그램은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 배드뱅크는 본격적인 상환이 시작된 지 9개월 만에 1개월 이상 연체자율이 50%에 이르렀고, 그 중 3개월 이상 연체로 인한 탈락자의 비율이 21.3%로 나타났다. 신용회복위원회의 워크아웃의 경우에는 탈락률이 18.6%다(2005년 8월 기준). 개인파산제도도 생활형 소액채무자의 경우에는 채무원금이 소액이기 때문에 이용하기 어렵다.
토론회에서 제기된 두 번째 방안은 현재 활성화되고 있는 개인파산제도를 법률적, 제도적으로 더욱 개선하자는 것이다. 개인파산제(소비자파산제)는 변제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개인의 경제적, 사회적 재건을 돕기 위한 제도로, 미국과 일본 등 선진국들에서는 보편화된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개인파산제가 이미 40여 년 전(1962년 파산법 제정)에 도입됐음에도 그동안 유명무실하다가 최근에야 활성화되고 있다. 법이 '징벌적 성격'을 완강하게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산선고를 받은 개인에 대해 우리 사회는 취업 및 자격 상의 불이익을 안겨준다. 또한 개인파산법은 주채무자가 면책되어도 보증인에 대해서는 면책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해 개인파산을 신청하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는 이 제도를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은 면책이 되는데 자신을 위해 보증을 서준 사람은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원래 보증인은 채무에 대한 책임에서 부차적인 위치에 있다. 그런데 금융자본이 발달되면서 보증인 자체가 독립된 채무를 진 사람인 것처럼 법이론이 바뀌었다. 물론 금융기관으로서는 보증인의 신용까지 평가해서 대출금액을 정하는 것이라고 강변하겠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는 사람조차 보증인이 되는 현실에 비추어 보면 이런 논리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주채무자가 면책되는데도 보증인이 면책되지 않는다는 것은 상식에 반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개정된 통합도산법마저 보증인의 책임을 면제하지 않고 있어 매우 실망스럽다. 개인파산을 통해 주채무자가 면책되면 보증인도 자동 면책되도록 법이 다시 바뀌어야 한다.
토론회에서 나온 세 번째 대책은 채권자나 채권추심업자의 과도한 '빚 독촉'에 대한 금융피해자들의 기본권 보호장치를 두자는 것이다. 채권자나 채권추심업자의 과도한 빚 독촉에 견디다 못한 채무자들의 자살과 가정파탄이 잇따르고 있다. 금융피해자들이 빚 자체보다도 과도한 불법추심으로 인한 심리적 고통과 정서적 불안에 더 시달리면서 범죄와 자살로 이어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려면 현재 미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공정채권추심법'과 같은 법이 우리나라에도 시급히 도입돼야 한다.
심야 전화 추심이나 직장방문 추심 등은 현행 대부업법과 신용정보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에 의해 형사처벌 대상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 채권추심이 횡행하는 것은 수사당국의 미온적인 자세 때문이다. 이런 현실을 고려할 때 지금과 같은 정부의 소극적 자세가 유지되는 한 불법 채권추심을 근절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비인격적이고 강압적인 불법 채권추심을 추방하기 위해서는 채권추심의 세부적인 방법과 불법 채권추심에 대한 처벌이 구체적으로 명시된 공정채권추심법이 조속히 제정돼야 한다.
금융피해자들과 빈곤 및 인권 분야 시민사회단체들이 넘어야 할 산이 많다. 금융자본과 정부는 '금융채무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금융피해자들의 주장에 대해 귀를 열지 않고 있고, 많은 국민들도 이런 주장에 대해 낯설게 느끼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금융피해자들이 겪는 고통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금융채무의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사회적 책임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주장은 개인의 무능함과 무책임을 옹호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채무의 고통을 못 이겨 자살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사람을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채무의 고통과 개인의 절망을 오로지 개인의 문제로만 치부하는 한국사회의 지금 모습은 사회적 무책임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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