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끝 전술까지 포함해서 많은 노력을 했다. 진정성을 이해해달라"(김종훈 통상교섭본부장, 6월 21일)
정부의 협상 결과를 놓고 김종훈 본부장에 대해 '촛불 소방수'냐 '촛불 방화범'이냐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와중에 정부는 "100점 만점에 90점짜리 협상"이라고 자평한다. 23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장을 방문한 김 본부장의 모습은 어느 언론의 표현을 빌자면 마치 '개선장군'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상하다. 대한민국의 주권자는 물경 90점짜리 협상 결과를 정확하게 알 길이 없다. 정부가 합의문을 공개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지금 김 본부장은 협상결과를 '브리핑'하거나 '추가설명'하거나 '해명'할 때가 아니다. 김 본부장은 협상장에서 있었던 사실 그대로, 합의된 사실 그대로, 합의원문 그대로 시민에게 제시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 일은 하지 않고 자의적인 해석만을 강요한다.
<조선일보> 등이 인용한 외교소식통에 따르자면, "협상주도권을 상실한 수전 슈워브 대표가 눈물을 흘렸다"고도 했다. 우리측 '5단계 시나리오'에 따른 '치밀한 협상'이었으며, "단순히 통상 차원의 협상이 아니고 한미동맹 차원에서 나온 결과"라고 했다.
한미동맹의 복원이라는 엄청난(?) 성과를 늘 자랑하는 이 정부가 왜 이토록 잘된 답안지를 주인 되는 시민에게 제시하지 못할까? 고시에 대한 관보 게재 전까지 합의문을 공개하지 않겠다는 정부의 단호한 태도는 비상식적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태도야말로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인 행태처럼 돼버렸다.
# 풍경2
이번 추가합의의 모태인 '4월 18일 한미간 쇠고기 협상 합의' 때를 복기해보자. 당시 정부는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등의 '수입합의문' 공개요구에 대해 "아직 최종적 자구수정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공개를 거부했다.
그러다 5월 2일 언론을 통해 영문본이 드러나자 정부도 합의문을 공개했다. 문제는 다음에 발생했다. 입안예고된 내용과 협정 원문이 다르다는 사실이 들통난 것이다. 정부의 거짓말이 백일 하에 드러난 것이다.
국제수역사무국(OIE)에서 광우병 지위 분류의 하향 변경이 공인되지 않는 한 수입금지를 할 수 없도록, '검역주권'은 정부의 발표보다 더욱 심각하게 훼손돼 있었다. 정부가 자랑하던 '강화된 사료조치'의 내용은 '강화'가 아닌 '완화'였다.
국민을 속였다는 사실이 일거에 발각돼 버렸던 것이다. 이것이 '촛불의 사실상 출발'이었다.(참고로 캐나다에서 기른 소라 할지라도 100일 전에 미국에 들어와 도축만 하면 미국 소로 인정받는다는 조항도 그때 비로소 발견되었다. 오늘 캐나다에서 광우병 소가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되새겨보자.)
# 풍경3
다시 지난 한미FTA 협상 타결 당시로 더 되돌아가 보자. 협상 타결 후 우리 측 김종훈 수석대표는 한미FTA 협상에 대해 한미 양측에 이익이 되는 결과를 담았다고 자평하면서, 점수로는 "수를 받고 싶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협상을 끝내놓고도 단지 '번역 중'이라는 이유만으로 한미FTA 협정원문 공개는 거부했다.
이후 52일이나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협정문을 공개하고 말았다. 이것이 한글을 국어로 하는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통상교섭본부의 관행이다.
정말 양측에 이익이 되는 결과를 얻었을까? 우리는 이미 4대 선결조건으로 통해 미국 측이 요구하는 핵심적 내용들을 모두 내준 상태였다. 관점에 차이가 있지만 양측의 이익상관을 생각해보자. 우리는 공산품과 전문인력에서 장점을 가지고 있고, 미국은 쇠고기 등 1차상품과 금융/지재권 등 3차 산업에 장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역구제조치와 전문직 비자쿼터에서 협상의 성괄를 만들어야 했고, 미국은 1,3차 상품에서 성과를 만들어야 했던 것이 한미FTA 협상의 가닥이었다. 결과적으로 무역구제조치는 0점이었다. 그러면 전문직 비자쿼터 부분은?
"호주가 미국과 FTA를 체결하면서 1만500개의 전문직 비자를 얻었는데 우리는 경제규모 등으로 볼 때 그것보다는 많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007.6.30 김종훈 당시 수석대표, 한미 FTA 합의문 서명식을 마친 뒤 주미 대사관 홍보원에서 기자간담회)
"(전문직 비자의 쿼터를 별도로 확보하는 문제에 대해) 우리로서는 나름대로 약속을 받아내야 하는 그런 필요가 있었고, 미국은 미국대로 민감한 부분을 생각을 해야 하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부분에 행정부 간에는 여러 채널에서 약속이 있었다는 말씀을 드리겠고요"(2007년 7월 4일 국회 통외통위에서 열린 한미FTA추가협상 관련 보고 당시 정의용 의원의 질의에 대해 김종훈 당시 수석대표의 답변)
마치 무엇인가를 얻어낸 것 같다. 하지만 필자가 국회의원을 그만두기 보름 전인 지난 5월 14일 외교부 FTA 서비스투자과 권기창 과장의 구두답변의 내용은 이것이 허구임을 드러낸다. "(전문직 비자쿼터 부여) 권한은 의회의 권한이어서 행정부가 추가협상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거짓 희망은 절망을 낳고, 그것이 겹치면 허탈감을 낳는다.
# 풍경4
통상교섭 뿐만의 문제는 아니다. 통상교섭본부가 속해 있는 외교통상부는 늘 이래왔다. 최근 들어 보수언론이 인정하기 시작한 '전략적 유연성' 협상 때도 그랬다. 과연 '주한미군'이 한국 국민의 의지 여하에 따라 동북아 지역분쟁에 개입할 수 있을지 여부가 관건이었다.
정부는 '주한미군'은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지만, 영문은 주어가 '한국군'이었다. 8개월이나 지난 뒤 지금은 유엔 사무총장이 된 반기문 당시 장관은 관훈클럽 토론회에서 영문본 손을 들어주었다. 한마디로 주한미군은 한국민의 찬반에 상관없이 얼마든지 지역분쟁에 개입할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해 주었다.
이 외에 용산 미군기지 이전 협상에서도 정부는 미국이 미군기지 환경오염 치유비용을 미국 측이 부담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물론 거짓이었다. 갖은 핑계를 대며 합의문 공개를 늦추고, 협상의 본 내용과 발표 내용을 다르게 선전하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이다. 김종훈 본부장의 말을 빗대서 말하자면, 재협상 요구보다 훨씬 "국가의 격"을 떨어뜨리는 일이다.
정보에 대한 공개는 '섬기는 정부'를 표방한 이명박 행정부의 의무이다.(더이상 결코 이명박 정부라 칭하지 않겠다는 것이 필자의 일관된 입장이다. 행정부일 뿐이다.) 주권자인 시민은 정부가 제시한 자료를 통해 스스로 평가하고 스스로 결단을 내린다.
마지막으로 한 마디 더. 최근 언론들의 태도는 더 이상하다. 참여 행정부와 국민 행정부를 향해 그토록 외치던 '언론의 알권리'는 어디에 갔는가? 역사 이래로 미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의 시민이 이렇게 대립된 시절이 없었던 것처럼, '시민의 알 권리'와 '언론의 알 권리'가 이렇게 달랐던 적도 없던 것 같다. 나아가 '시민의 알 권리'와 '정부의 알릴 의무'가 이렇게 엇갈렸던 적도 없었던 것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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