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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견문"검색결과 (전체기사 중 136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
방글라데시는 왜 가난한 나라가 되었나?
다카 : 혁명 도시 방글라데시는 혁명 국가였다. 68 혁명이 산출한 유일한 현실 권력이었다. 민족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세속주의를 표방했다. 일괄 '인민 민주주의'를 추구했다. 국명도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이라 했다. 더불어 근대적인 국민 국가였다. 종교적인 근대 국가를 표방한 파키스탄과 척을 졌다. 종교에 바탕을 둔 또 다른 신생 국가로는 이스라엘이 있었다. 파키스탄 건국이 1947년이고, 이스라엘은 1948년이다. 1971년 방글라데시는 성/속 분리, 정/교 분리를 공식화했다. 이슬람이라는 보편 문명 대신 민족 문화를 앞
이병한 역사학자(=치타공)
2016.08.02 09:43:23
68 혁명이 낳은 나라, 방글라데시
벵골 르네상스 다카 공항의 출구를 나오자마자 숨이 턱, 막혔다. 열기와 습기가 동시에 덮쳐온다. 40도 더위는 이미 익숙해졌다. 30도만 되어도 청량하다고 느낀다. 그런데 북인도 내륙부의 그 타는 듯한 더위가 아니었다. 푹푹 찌는 찜통 더위다. 괴롭기로는 후자가 훨씬 더하다. 매번 새 도시에 가면 하염없이 마냥 걸어 다니는 습관이 있다. 사전 정보 없이, 선입견 없이, 그곳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보는 의례이다. 부러 저녁나절에 서너 시간을 걸었는데도 온통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깔끔한 성격이 아님에도 두세 차례 씩 속옷과 티셔츠를 갈
이병한 역사학자(=다카)
2016.07.26 09:28:36
1962년, 중국이 인도를 먹다 뱉다
갤브레이스의 '인도견문록' 이곳저곳 다니며 남들이 쓴 여행기도 종종 읽는다. 잠들기 전 침실용 독서로 딱이다. 인도만큼 여행기가 많은 나라도 없지 싶다. 방랑벽을 자극하는 나라임에 틀림없다. 멀리로는 러디어드 키플링부터 꼽을 수 있다. 오리엔탈리즘의 원형과 전형을 확인시켜준다. 키플링을 전복시킨 영국인도 있었다. 조지 오웰이다. 글로써 모국 대영제국의 허위를 서늘하게 까발렸다. 그럼에도 여전히 거리감이 없지 않았다. 영국과 인도, 유럽과 아시아의 간극은 메워지지 않았다. 오카쿠라 덴신의 인도 여행기와 결정적인 차이점이라 하겠다. 그
이병한 역사학자(=카슈미르)
2016.07.19 07:31:25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지옥, 카슈미르
비대칭적 분할 체제 펀자브와 이웃한 카슈미르도 쪼개졌다. 분할의 양상은 한층 복잡한 것이었다. 기층과 상층이 크게 어긋났다. 종교와 국가를 균질화하는 '두 민족' 이론이 적용되지 않았다. 무슬림이 다수임에도 인도에 편입된 영토가 훨씬 넓었다. 카슈미르의 3분의 2를 인도가 차지했다. 파키스탄은 도저히 수용할 수 없었다. 미수복된 '이슬람의 땅'을 되찾고자 했다. '자유 카슈미르'로 해방하려고 했다. 인도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카슈미르는 초대 총리 네루의 고향이기도 했다. 세속주의 인도를 과시할 수 있는 최적의 보루였다. 결국, 분
이병한 역사학자(=스리나가르)
2016.07.12 08:06:32
강간하고 또 강간하고…1947 '지옥열차'
붉은 강 파키스탄의 라호르는 전혀 낯설지가 않았다. 국경을 넘었다는 실감이 덜했다. 겨우 한 시간 남짓 걸렸을 뿐이다. 시차는 고작 30분이었다. 하지만 거리는 가깝되, 거리감은 적지 않았다. 일주일에 단지 두 번의 항공편만 있을 뿐이다. 연결망이 뜸한 것이다. 그런데도 방금 비행기를 타고 떠나왔던 델리와 몹시 흡사했다. 무굴제국과 대영제국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도시 외양부터 비슷했다. 시장 풍경도 어딘가 친숙했다. 거리에서 파는 음식부터 흘러나오는 노래까지 내가 석 달을 살았던 마유르 비하르의 뒷골목을 연상시켰다. 인도의
이병한 역사학자(=라호르)
2016.06.28 07:23:21
20세기 최대의 분단 국가, 인도와 파키스탄
파열 20세기 최대의 분단 국가는 남/북한도, 남/북베트남도, 동/서독도 아니다. 단연 인도/파키스탄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무굴제국과 대영제국의 경험을 공유하는 형제국이자, 세 차례나 전쟁을 치른 적대국이기도 하다. 규모부터 압도적이다. 인도는 13억, 파키스탄은 2억이다. 두 나라 모두 대국인데다, 핵무장 국가이기도 하다. 富國(부국)은 아닐지언정, 强大國(강대국)에는 모자람이 없다. 여기에 파키스탄에서 떨어져 나온 방글라데시도 1억을 넘는다. 남아시아가 대분할되지 않았다면, 인도는 진작 중국보다 훨씬 큰 나라였을 것이다. 그러
이병한 역사학자
2016.06.21 07:26:53
인도의 진짜 독립 영웅은 간디가 아니다
도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대영제국의 위신은 완전히 무너졌다. 그렇다고 인도인의 마음이 국민회의로 쏠렸던 것도 아니다. 1942년 '인도를 떠나라(Quit India)' 운동 이후 국민회의는 유명무실했다. 간디와 네루 등 지도부가 수감되면서, 사실상 활동 중지 상태였다. 종전 당시 인도인들의 영웅은 국민회의가 아니라 인도국민군이었다. 대영제국에 협력하며 유라시아를 동분서주했던 그 인도군(Indian Army)이 아니다. 그 반대편에 섰던 이들이다. 그래서 최초의 '국군(India National Army)'이기도 했다. 대영제국에
2016.06.14 09:18:20
인도가 일본에 먹혔다면, 역사가 바뀌었다!
제국의 폐허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다. 영국은 승전국이었다. 그러나 무색했다. 대영제국은 해체되었다. 인도부터 떨어져나갔다. 인도는 대영제국의 기틀이었다. 최대 식민지 인도 없이는 대영제국이 성립할 수 없었다. 인도를 정복했기에, 인도양을 장악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으로 해가 뜨는 대일본제국만 파산했던 것이 아니다. 해가 지지 않는다 했던 대영제국 또한 저물어갔다. 민주주의 대 전체주의의 대결이었다는 기왕의 지배 서사로는 포착되지 않는 지점이다. 비중으로 따지자면 대영제국의 몰락이 더 크다고도 할 수 있다. 세
2016.06.07 04:37:42
美 국민 스포츠 요가, 올림픽도 접수?
요가의 세계화 나는 요가 마니아이다. 2007년 입문했으니, 올해로 9년차이다. 책 읽고 글을 쓰다보면 목과 어깨가 자주 굳는다. 근육이 뭉치면 머리도 탁해지기 십상이다. 흐릿한 정신으로 쓰는 글은 아니 쓰는 것만 못하다고 여긴다. 타개책으로 삼은 것이 요가 수련이었다. 효과가 톡톡했다. 요가 한 시간이면 말랑말랑하게 풀어줄 수 있다. 한창 때는 술자리에서 슬며시 빠져나와 요가를 하고 돌아갈 정도였다. 여유가 있는 날이면 서너 시간 씩도 했다. 못해도 1년에 300일은 했을 것이다. 지금껏 근 3000시간을 수련했다는 말이 된다.
이병한 역사학자(=델리)
2016.05.31 07:14:07
<타이타닉>은 인도양에서 침몰했다
봄베이와 뭄바이 작년(2015년) 가을 부산 영화제에 다녀왔다. 2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였다. 나는 인도 영화를 몰아서 보았다. 개막작부터 주바안이었다. 카슈미르의 소녀도 챙겨보았다.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접경지, 남아시아 대분할 체제의 상징적인 장소이다. 꼭 방문할 곳으로 꼽아두고 있었다. 영화제는 10월이었고, 인도행은 11월이었다. 시운이 좋았던 것이다. 그 후 매주 한 편씩 인도 영화를 챙겨 보았다. 콜카타와 첸나이, 뭄바이와 델리 등 여러 곳에서 보았다. 장소만큼이나 언어도 다양하다. 힌디어 외에도 벵골어, 구
이병한 역사학자(=뭄바이)
2016.05.24 08:05: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