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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견문"검색결과 (전체기사 중 136건의 기사가 검색되었습니다 )
걸프만의 '극장국가'들, 그리고 페르시아의 굴기
1. '세계의 절반' 천 년의 古都(고도)이다. 반(半)천 년으로 절반을 가른다. 셀주크 투르크의 수도가 된 이래 첫 번째 오백 년은 구시가에 흔적을 남겼다. 사파비드 제국의 수도가 된 이후 다음 오백 년은 신시가라고 불린다. 이스파한의 백미라면 아무래도 신시가 쪽일 것이다. 16세기와 17세기, 세계 문명의 절정을 구가했던 이슬람식 계획도시의 정수를 선보인다. 비단 사파비드의 제도(帝都)만으로 그치지도 않았다. 서아시아의 오스만 제국과 남아시아의 무굴 제국이 이스파한을 통하여 연결되었다. 이스탄불과 델리를 잇는 가교형 제국이 사파
이병한 역사학자
2017.01.17 14:15:32
1979년, 중동의 혁명이 전세계를 바꿔놓았다
1. 혁명 100만이 아니었다. 200만도 훌쩍 넘었다. 자그마치 600만에 달했다. 테헤란의 도로를 가득 메운 600만 인파가 단 한 명의 귀환을 목 놓아, 손꼽아 기다렸다. 아야톨라 호메이니이다. 이맘이, '선생님'이 돌아오신 것이다. 1964년 추방 이래 15년만의 귀국이었다. 1979년 2월 1일의 일이다. 이란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세기적인 사건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1949년 중국 혁명에 필적한다. 아니 기왕의 20세기형 혁명과 일선을 긋는 21세기형 혁명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지난 백년, 반체제 이념을 대
2017.01.09 08:30:10
'이슬람의 집' 찾아가는 대반전, 물꼬를 트다
1. 재생 : 포스트-오스만 증후군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 아랍연합공화국의 첫 당사자가 이집트와 시리아였던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혁명 직후 나세르가 처음 통합하길 원했던 나라는 수단이었다. 나일강을 공유하는 이웃국가였다. 영국이 그어둔 작위적인 국경선을 지우고자 했다. 그러나 수단이 수긍하지 않았다. 일국으로 홀로서기를 고수했다. 반면 시리아는 달랐다. '역사적 시리아', '대(大) 시리아'의 기억이 선명했다. 프랑스가 주입한 딱딱한 국경이 어색했다. 1947년 아랍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토착적인 정치집단이 등장한다. 바로
2016.12.23 11:44:59
혁명가 나세르, 100년 간의 '아랍夢'
1. 나세르 56 공항은 그 나라의 얼굴이다. 첫인상을 좌우한다. 상징적인 이름을 딴 곳이 많다. 인도에 입성했던 콜카타는 찬드라 보스 공항이었다. 이란의 테헤란에는 이맘 호메이니 공항이 있다. 터키의 이스탄불 공항에도 아타튀르크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이집트의 카이로 공항에는 별다른 명칭이 없었다. 의아한 마음이 일었다. 20세기 세계에 명성을 떨친 아랍인으로는 나세르가 단연 으뜸이기 때문이다. 비단 공항만이 아니었다. 카이로 시내를 걸어도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이나 대로를 찾기 힘들었다. 베트남의 호치민 영묘, 파키스탄의 부토 영
2016.12.15 10:44:50
'100년의 수난' 끝에 '제2의 두바이'?
100년의 주박 '아랍의 봄'은 이미 새로운 단계로 진입했다. 독재에서 민주로, 라는 얕은 이론이 통용되지 않는다. 기성의 인공 국가 자체가 녹아내리고 있다. 중앙 권력이 흐물흐물해지고 있다. 지난 100년 아랍에 이식되었던 유럽의 국가 간 체제, 더 정확하게 말해 '독재 국가 간 체제'가 붕괴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와 시리아의 국경선을 돌파하여 '시라크'를 창출한 IS가 대표적이다. '이슬람국가'라는 국명이 상징하듯 '이슬람의 집'의 복원을 표방한다. 20세기의 신부족주의(민족주의) 시대를 거두고 탈민족주의, 신 칼리프 시대를
2016.12.08 10:21:56
지중해에도 '분단 국가'가 있다
지중해와 해중지 유라시아 견문 2년차, 처음으로 배를 탔다. 바다를 건넜다. 地中海(지중해)였다. 땅으로 둘러싸인 바다이다. 아랍과 유럽이 마주본다.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가 연결된다. 海中地(해중지), 물 사이에 뭍도 있다. 섬이 점처럼 흩어졌다. 그 중에서도 세 번째로 큰 섬이 키프로스이다. 지중해의 동쪽 끝자락에 자리한다. 터키 남부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70킬로미터 거리이다. 동쪽으로 100킬로미터를 더 가면 시리아와 레바논이다. 남쪽으로 390킬로미터를 가면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이다. 서쪽으로 530킬로미터를 가면 그리스의 아
2016.11.29 07:10:39
터키, '유럽의 병자'가 독일보다 큰 나라가 된다
신오스만주의 (1) : 자주 외교 공정발전당 집권 이래 터키의 국내 총생산(GDP)은 3배로 성장했다. 세계 15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집권 초기만 해도 유럽연합(EU) 평균 수입의 20%에도 달하지 못했다. 15년 만에 70% 수준까지 육박했다. 2030년이면 유럽 국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현재 인구 8000만, 2040년이면 1억에 근접한다. 영국, 프랑스는 물론 독일보다도 큰 나라가 된다. 더 이상 EU 가입에 안달하지 않게 되었다. '유럽의 병자' 취급을 받았던 20세기가 아니다. 항산은 항심을 낳는
2016.11.23 15:21:14
터키 쿠데타의 진실…에르도안이 만든 '이슬람 기적'
풀뿌리 이슬람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 먼저 눕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터키공화국의 세속화 바람에 이슬람은 바짝 엎드려야했다. 숨을 죽여야 했다. 바닥을 기어야 했다. 바닥을 다질 수 있었다. 기회가 왔다. 1960년대 후반이다. 68 혁명의 물결이 앙카라와 이스탄불에도 닿았다. 청년들은 너나없이 신좌파를 자랑했다. 파리와 베를린과 런던과 샌프란시스코를 동경하고 모방했다. 터키의 군사 정부를 세속주의라고 비난하지 않았다. 우익 독재라고 비판했다. 좌/우 구도였다. 군부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이슬람을 동원했다. 좌파를 억압하기
2016.11.15 11:08:00
터키, '박정희' 대신 '누르시'를 선택하다
오르한 파묵 : 동과 서 이스탄불에서는 베이오울루(Beyoğlu)에서 지냈다. 살았다고는 못하겠다. 겨우 두 달을 조금 넘겼다. 살려고 했었다. 살아보고 싶었다. 帝都(제도)였던 곳이다. 여러 제국의 수도였다. 이름도 여럿이다.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이스탄불을 차례로 거쳤다. 겹겹의 문명이 켜켜이 쌓인 남다른 장소이다. 그 중에서도 베이오울루에 터를 잡은 것은 순전히 오르한 파묵 때문이었다. 학창 시절 그의 작품에 흠뻑 빠졌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펴냄)보다 내 이름은 빨강(이난아 옮김, 민음사
이병한 역사학자(=이스탄불)
2016.11.08 09:17:06
이슬람 천년 제국, 부활의 날갯짓
이슬람 : 유라시아의 대동맥 카이로에 떨어진 것은 한낮이었다. 북아프리카를 달구는 람세스의 태양이 작열했다. 인프라가 열악하다. 공항 철도는 없고, 공항 버스도 드물다. 10인승 승합차에 20명을 태우고 버스라고 한다. 가뜩이나 이스탄불에서 조기 철수한 처지에 심란함이 더해졌다. 택시를 타기로 했다. 어딘들 외국인은 봉이다. 바가지를 옴팡 씌우기 마련이다. 만반의 전투 태세를 갖추고 흥정에 임했다. 역시나 내가 알고 있던 가격의 서너 배를 부른다. 들은 척도 안하고 지나쳐 버렸다. 나의 단호함에 마침내 한 기사가 정가를 제시한다.
2016.11.02 16:5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