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이 미쳤다.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가 없다. 고등법원과 지방법원이 모두 그렇다. 정몽구 회장에 대한 사회봉사명령에다가 김승연 회장에 대한 집행유예 판결까지 완전히 작심을 하고 내달리고 있다.
고삐 풀린 망아지가 따로 없고, 탈선한 폭주 기관차가 오히려 점잖아 보일 뿐이다. 폭주 기관차에 기관사는 보이지 않는다. 기관사가 있고서야 화이트칼라 범죄를 엄단하라는 대법원장의 말이 이처럼 휴지로 구겨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몽구 회장에 대한 판결을 내린 어떤 판사는 모든 비판을 달게 받겠노라고 호언했다. 그러나 어찌 일개 판사 한 명이 법원 전체에 쏟아지는 비난과 불신을 달게 받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런 판결이 법원 전체에 대한 불신을 고조시킬 것이라는 점을 몰랐다면 그의 상식을 의심할 수밖에 없고, 알고서도 그러한 판결을 내렸다면 그의 양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물론 사법적 판단은 판사 또는 집합적 의미로서의 법원의 고유한 권한이다. 판사는 재판과 관련하여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극단적으로 말해 '자기 맘대로' 판단한다. 그것이 유무죄의 판정이건 양형이나 손해배상액을 결정하는 것이건 자기 맘대로 한다. 사회가 그것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권한 뒤에는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제약이 있다. '법과 양심'의 제약은 일차적인 제약이다. 그러나 '법과 양심'이 의미하는 진정한 제약은 사법적 판단에 대한 권한이 정당하게 행사되어야 한다는 것일 것이다. 모든 권한은 기본적으로 정당하게 행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권한에는 원칙적으로 의무가 따른다는 말을 학창시절 내내 들어왔다. 그러나 우리사회를 살면서 언젠가부터 이런 법언은 '고상한 지적 마스터베이션'으로 치부해 버리게 되었다. 권한만 있고 의무가 없는 경우를 너무나 많이 보아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한을 가진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통제하려고 하기 보다는, 권한 있는 사람에게 아부하는 것이 더 우월한 생존전략임을 여러 차례 경험했다. 권리와 의무가 동행하는 것은 적어도 필자가 체험한 '삶의 현장'에는 없었다.
물론 이번 판결을 한 판사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과 같이 반론할 지도 모른다. 정몽구 회장의 처벌과 관련하여 거액의 사회출연이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나, 김승연 회장의 건강이 여의치 않다는 것을 감안한 것이 사법권을 정당하게 행사하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그러나 주주의 돈을 훔친 사람이 그 돈을 사회에 출연하기로 했다는 이유로 처벌을 면해준다면 이 세상에 절도나 횡령으로 콩밥을 먹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또 법원이 얼마나 많은 피의자에 대해 그들의 건강상태를 걱정하여 집행유예를 선고했었던가. 정말 법원에 그런 관행이 있었다면 이번 판결을 예상하지 못한 일반 국민과 언론은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린 환자들이란 말인가.
사법권의 정당한 행사의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은 '법 앞의 평등'이다. 이번 판결이 국민적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여러 판사들이 반복적으로 재벌 회장을 일반 민초들과는 다른 기준으로 대우했기 때문이다. 재벌 회장은 남의 돈을 훔쳐도 그만이고 다른 사람을 때려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법은 모든 이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법이 없는 사회'이다. 우리 사회에는 오직 경우에 따라 그 때 그 때 달리 적용되는 '무원칙한 강제'만이 존재할 뿐이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듯이 살아 있는 경제권력 역시 신성불가침이다.
후진국을 여행할 때 우리나라 여행객들은 상당수 국가들에서 고위 공무원들이 큰 기업을 몇 개씩 소유하고 있는 상황에 놀라곤 한다. 저런 체제에서 어떻게 기술혁신과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는지 모르겠다고 의아해한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며 안도감과 자부심을 느낀다.
우리나라 여행객들의 생각은 지당하다. 사회체제가 공정하지 않을 때 획기적인 기술혁신과 경제발전을 기약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나라 여행객들은 한 가지 팩트를 간혹 잊어버리곤 한다. 우리나라가 그 후진국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그리고 그것이 어쩌면 우리가 선진국으로 도약하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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