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깔끔한 새 키보드를 두드리며 빨라진 속도를 즐기는 것은 잠깐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컴퓨터의 체감 속도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새 컴퓨터가 예전 것과 별반 다를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채게 되면, 컴퓨터를 개비하느라 들인 비용이 아까워지기 시작하는 것은 물론이고, 세월을 들여 발전시켰다는 새로운 기술은 사용자를 위해 도대체 어떤 이익을 주는 것인지 푸념어린 의구심을 품게 된다. 사용자가 발전된 기술을 체감하기 어려운 것이 그럴 법한 까닭은, 보강된 자원의 대부분이 사실은 컴퓨터의 보안성을 높이는데 쓰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따금 각국 정부 기관이나 유수한 대기업의 전산 시스템들이 해킹을 당해 얼마간 시스템이 마비되어 혼란이 있었다는 보도를 접하곤 한다. 크래커라고 부르는 이들은 의도적으로 정보를 훔쳐 내거나 파괴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단순히 해킹 실력을 뽐내기 위해서도 이와 같은 일이 벌어진다.
해킹을 막기 위해 해킹에 쉽게 뚫리지 않는 보안 시스템을 만들기도 하고 법을 제정해서 그와 같은 행위를 범죄시하기도 한다. 하지만 완벽한 보안 시스템이 만들어졌다거나 불법적인 해킹을 근절하는 효과적인 법이 제정되었다는 얘기는 들리지 않고 있다. 보안 시스템이 새로 만들어지면 곧 이를 뚫는 해킹 기법이 등장하고, 또 다시 이를 대비하는 보안 시스템이 뒤따르는 등, 침입자와 보안 전문가 사이의 싸움은 끝없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사람들이 막대한 시간과 비용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이런 일들이 왜 지속될까? 무엇보다도 공익을 생각하는 합리적인 해커들만 존재하는 사회가 될 수는 없을까? 기실 컴퓨터는 인간이 구상한 단계들을 수행하는 단순한 계산 기계일 뿐인데, 더 이상의 해킹이 불가능한 '완벽한' 설계가 가능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싸움이 컴퓨터 기술의 발전에 공헌을 한다는 긍정적인 의견도 있다. 그렇다면, 지금의 컴퓨터는 이런 싸움을 통해 언젠가 보다 더 완벽한 계산 기계로 진화될 것인가? 혹은 현재의 컴퓨터하곤 전혀 다른 유형의 고안물이 등장해서 우리가 완전히 새로운 어떤 기계에 다시 적응해야 하게 될 것인가?
침입자-보안 전문가의 꼬리를 무는 싸움 속에서 발전하는 컴퓨터의 미래. 이것이 복잡계의 또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면, 이 싸움의 종말을 예측하지는 못할지언정,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도 있다는 것이 바로 <자연은 어떻게 움직이는가>(페르 박 지음, 이재우·정형채 옮김, 한승 펴냄)의 주제인 복잡성의 원리이다.
▲ <자연은 어떻게 움직이는가>(페르 박 지음, 이재우·정형채 옮김, 한승 펴냄). ⓒ한승 |
하지만 상호 작용이 비선형적이면 계의 거동은 다른 양상을 보인다. 구성 요소 개개의 성질을 알더라도 이들이 얽혀 있는 전체가 어떻게 거동할지 예측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된다. 용량과 속도에서 나날이 발전하는 컴퓨터를 이용한 계산으로 이 거동을 추적해낼 수 있다고 여길지 모르겠다.
하지만 계가 커질수록 계산할 수 없는 한계에 곧 도달하게 된다. 미시적인 관점에서 개개 구성 요소의 거동을 관장하는 원리들이 전체 계의 거동을 이해하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로 표현되는 상황이며, 개개 구성 요소의 울타리 안에서 하는 환원주의적인 분석은 충분하지 않다. 전체를 보기 위한 새로운 도구가 필요하다.
이 책에서 임계성이란 계가 보이는 현상을 특정지울 수 있는 축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인다. 예컨대 사람의 키를 생각해보자. 서구인의 키가 대체로 동양인보다 크며, 같은 지역에서도 키가 크거나 작은 사람들이 섞여 있다. 하지만 사람의 키는 대략적인 크기가 있다. 벼룩만한 사람은 없으며, 집채만 한 사람도 없다. 외계인이 지구의 사람들을 보았다면 1~2미터 크기의 생물체로 기록을 할 것이며, 이는 큰 오류 없이 사람을 묘사한 것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런 특정 축척이 존재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페르 박의 연구로 유명해진 모래 사태가 그것이다. 모래알 몇 개가 움직이는 작은 사태로부터 받침대 위에 쌓여있는 모래 전체가 쏟아져 내리는 큰 사태도 있다. 최근에 일본의 한 지역을 흔든 강도 5의 지진이 있었지만, 다음에 올 지진에 대해서는 어떤 강도의 것이 언제 올지 알 수가 없다. 더 약한 지진이 올 수도, 훨씬 강한 지진이 올 수도 있다.
강도가 어느 이상의 것만 지진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지진의 강도에는 특정한 크기가 없는 것이다. 임계성을 보이는 현상들은 공통적으로 멱함수 분포를 따르는 특성을 보인다. 지진의 강도에 대한 빈도의 데이터가 멱함수 분포(대부분의 관측 값은 아주 작고, 소수의 관측 값만이 크다)를 따르는 예이며, 이것이 잘 알려진 구텐베르크-리히터 법칙이다.
임계 현상에 특정 크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큰 현상이나 작은 현상이나 같은 원리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지진의 원인을 밝히려고 할 때 작은 지진들은 무시하고 큰 지진 만에 매달리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오히려 더 자주 일어나기 때문에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는 작은 지진들을 연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다.
복잡계에 대한 기존의 학문적 접근 방식이 한계에 부딪히면서 1980년대 중반 다양한 분야의 과학자들에 의해 미국의 산타페 연구소를 중심으로 복잡계 연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이 태동하였다. 페르 박과 그의 동료들은 1987년 모래 사태 모형과 함께 자기 조직화된 임계성에 대한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하였다.
모래 사태는 누구나 쉽게 시도해볼 수 있는 실험이다. 접시 위에 모래를 천천히 떨어뜨려 쌓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살펴보자. 처음에는 모래가 비교적 평평하게 쌓아진다. 떨어지는 모래알이 바닥의 모래알들을 건드려 구르게 하지만 그 효과는 국소적이어서 멀리 퍼지지 못하고 떨어진 모래알 근처에서만 움직임이 있다.
하지만 떨어지는 모래알이 점점 높이 쌓여 모래가 접시의 가장자리까지 차고 모랫더미가 가파른 경사에 이르게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떨어지는 모래알 하나가 여전히 국소적인 움직임만을 만들 수도 있지만, 모래 전체가 무너져 접시 밖으로 모래가 쏟아지게 하는 큰 모래 사태를 만들기도 한다.
모래 사태의 크기에 대한 빈도의 분포는 멱함수를 따르며 따라서 모래 사태는 임계성을 띤다. 더해서 흥미로운 것은, 큰 사태 이후에는 떨어지는 모래알이 다시 쌓이면서 사태가 일어났던 경사도를 점차 회복한다는 것이다. 즉 모랫더미는 외부의 조정 없이 스스로 임계성을 향해 구동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조직화된 임계성이다.
모래 사태에 대한 수학적 모형은 놀랍도록 간단한데 이것이 훗날 자기 조직화 임계성 연구의 전형을 제공한 BTW(Bak, Tang, Wiesenfeld) 모형이다. 이 모형은 너무도 간단해서 중학생이라도 이해하고 시뮬레이션을 해 볼 수 있는 정도인데, 물리학의 전형적인 단순화 방식인 '거칠게 갈기(coarse graining)'를 따른 것이다.
물리학자는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흔히 문제를 단순하게 바라보는데, 이 때 주의할 것은 단순하게 하면서도 해결하고자 하는 현상의 본질은 남긴다는 것이다. 이 작업을 재미있게 표현한 것이 '목욕물은 버리되 아기는 버리지 않는다'는 말인데, 이 표현이 페르 박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인지는 모르겠다.
페르 박과 동료들이 발견한 자기 조직화 임계성은 물론 모래 사태에만 머물지 않는다. 도로 위에서 겪는 교통 체증은 누구에게나 벌어지는 흔한 일이다. 하지만 이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복잡계가 보이는 특성이며, 임계 상태에 도달한 교통 체증이 제한된 교통 환경에서 가장 효율적인 교통 흐름이라는 사실이 물리학 연구에서 밝혀진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페르 박의 첫 발견은 이후 다양한 학문 분야의 많은 연구자들을 자극하여 수많은 연구 결과들을 이끌어 냈으며, 복잡계의 자기 조직화 임계성이 물리학을 넘어 생물학, 뇌 과학, 지구 과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분야 등 다양한 영역에서 연구되었다.
이 책은 보수 성향이 짙은 학문 세계에서 열린 마음으로 진리를 추구해가는 한 뛰어난 과학자의 연구 역정을 재미있게 기술하고 있다. 또 다양한 분야의 결과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분야의 연구에 뛰어드려는 이에게 이 책은 더할 나위없는 훌륭한 입문서가 될 수 있다.
복잡계 연구자에 의한 번역이라는 점도 언급하고 싶은 이 책의 장점이다. 과학적 사실 전달이 정확한 점이 돋보이며, 번역 문장 또한 매끄럽게 다듬어져서 읽어 내려가며 원저자의 생각을 따라가는데 거침이 없었다.
빈곤의 확산, 자살률 증가, 정권의 득세, 트위터를 통한 여론 형성 등 현재 우리 사회의 뜨거운 이슈들도 복잡계의 시각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임계 상태에 있는지 밝히기 위해서는 진지한 연구가 있어야 하겠지만, 우리 사회가 개개인 수준의 성향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모습을 보이는 복잡계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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