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한국일보 기자를 거쳐 미국 켄터키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켄터키대에서 교수를 하다가 귀국, 경희대 평화복지대학원 교수로 재직했고 15대 국회의원을 지낸 뒤 김대중 정부 말기 주미대사를 역임했다. 현재 김대중평화센터 자문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편집자>
핏줄(血統)과 연줄(因緣)
올해는 유난히도 안팎에서 세계적인 관심을 끈 사건 사고가 많다. 우선 한반도 북쪽에서 부는 바람도 예사롭지도 만만치도 않다. 그 무엇보다도 지난 3월의 천안함 사건은 앞으로 남북한과 주변국들의 지역안보 패러다임을 새로 짜는 극적 계기를 마련했다.
9월 말, 10월 달엔 불과 며칠을 사이를 두고, 북녘 김정은이 이승에서 '뜨고', 남녘 황장엽은 저승으로 떠났다. 숫자로 풀이하면 김정은은 아직 많은 것이 미지수(未知數)고, 황은 "미스터리"(mystery)는 아직 남아 있지만, 기지수(旣知數)였다.
김정은과 황장엽 둘 다 북녘에서 태어나 뿌리는 같다. 20대 김정은은 지금 그의 할아버지, 아버지 핏줄 덕분에 하루아침에 공개적으로 권력 "계승자"로 등장, 세계 매스컴을 타고 있다.
황장엽은 바로 김정은의 할아버지, 아버지 심복으로 한 때 이 두 주군(主君)의 "사랑"을 받으며, 그 연줄로 북의 권력 핵심 요직을 두루 거친 "망명객"이다. 망명 뒤엔, 북에서는 그를 그 연줄을 저버린 "천벌을 받은(을) 배신자"로 매도한다. 지난 10월 10일 공교롭게도 북한 노동당 창건일에 사망한 황장엽을 이명박 정부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고, 대전 국립현충원 사회공헌자묘역에 안장했다.
황장엽의 정체와 행적을 제대로 공정하게 평가하기는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두 가지 사실은 분명하다. 하나는 현 이명박 정부를 포함, 한국의 일부 인사들이 그를 북한 반체제 인사로 보는 것 같지만, 과거 소련 반체제 인사였던 안드레이 사하로프(1921-1989)나 알렉산드르 솔체니친(1918-2008)과는 다르다.
사하로프는 그 체제 안에서 목숨을 걸고 공산 독재권력과 맞섰고, 그 결과 체포, 국내 귀양살이, 가택연금과 감시를 받으며 조국에서 극도로 어렵게 살다가 그의 아내와 가족을 옆에 두고 이생을 마감했다.
솔체니친도 체제 안에서 맞서다가, 체포, 체형, 수용소 강제노동, 국내 귀양살이, 감옥생활 등 온갖 극악의 핍박과 고통을 받았다. 흐루시초프 시대에 잠시 "자유의 몸"이 되어 활동하다, 다시 브레즈네프 시대에 국적 박탈과 강제 추방(1974), 그리고 미국 망명 생활 끝에 아내와 함께 자진 귀국, 국적이 회복(1990)된다. 문자 그대로 그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조국에서 이생을 마쳤다.
하지만 황장엽은 북한체제 안에서는 극소수 권력 핵심부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호강과 영화를 줄곧 함께 누리다가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 "북한 최고거물급" 망명객이 됐다. 그가 1997년 2월 망명에 성공하기까지 김일성종합대 총장(14년), 최고인민회의 의장(11년), 조선노동당 비서국 과학교육 담당비서 겸 주체사상 연구소장(1979-1984), 비서국 국제담당 비서(1984)등이 북한체제 안에서의 그의 행적을 잘 말해준다.
물론 소련체제는 그들이 목소리를 체제 밖으로 흘릴 수 있을 만큼 상대적으로 "자유"의 틈(samizdat 지하 비밀 출판 조직 등)이 있었고, 국제적으로도 당시 소련 동구, 미국, 캐나다를 포함한 유럽 안보협력회의(CSCE, 1975년 출범) 틀에 들어 있었다. 따라서 북한처럼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아무도 모르게 꽥 소리도 못하고 감쪽같이 처형당할 만큼 절대적으로 비인간적, 비인도적 철권독재체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황이 남쪽에서 찾은 그의 "자유"도 남한 정보기구 "안가(安家) 속 자유"를 크게 벗어나지는 못했다. 언젠가 누군가가 황이 누리고 느낀 북의 "김일성-김정일 왕가"에서의 자유와 대한민국의 정보기구 틀 안에서의 그의 자유를 비교 분석해 볼만도 하다.
또 하나는 그의 망명객으로서의 북한 밖 활동은 멀리서 지켜본 나에게 폴리비우스의 두 가지 관찰을 상기시킨다. 모르고 하는 거짓말은 용서받지만, 알고 하는 거짓말은 결코 용서받지 못한다는 것과 스파이는 시킨 쪽은 그를 경멸하고, 받는 쪽은 저주한다는.
구체적으로, 황의 안타까운 사연은 그가 "인간중심철학"이라고 그의 주체사상을 주창했지만, 그가 사랑하는 아내와 가족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인간적, 개인적 고뇌와 번민 이다. 인류사랑, 인간중심 등 보편적 추상적, 철학적 개념 말고, 살아 움직이는 아내, 친 가족, 이웃 등 눈에 보이고 손과 귀에 닿는 사람의 입김, 숨소리, 목소리. 손과 손, 얼굴과 얼굴, 입과 입, 살갗과 살갗이 서로 마주치고 부딪칠 때의 촉감. 이런 것들을 잃어버린, 그의 삶, 그의 모습은?
더욱 역설적인 사실은 김정은을 "그깟 놈"이라고 막말까지 서슴지 않던 황이 바로 북한체제와 정책, 김일성-김정일 권력세습과 지금 갓 시작한 3대 권력세습의 이론적 밑받침인 "주체사상" "언어연금술사"요, 그 대부(代父)격인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 북한의 후계자로 내정된 김정은(가운데) ⓒ뉴시스 |
세계 공산당 집권 사상 최초의 3대 세습
오랫동안 베일에 가려있던 김일성의 손자 김정은. 그를 감쪽같이 숨겨두었던 북한 "강철 덮개"(steel drapery)를 열고나와, 그는 지금 사실상 김씨 왕가(王家) 3대 세습 세자책봉을 받은 듯 행세하고 있다. 희곡이라면, 김씨 왕가 제 3막, 제 1장의 시작이다.
하지만 갓 시작된 그의 정치 행로와 행방은 한 순간 한치 앞도 제대로 가늠하기 힘든 상황이다. 북한 공산주의-주체사상 김씨 "왕가"(王家)의 3대 세습" 기도(企圖)에 대한 추측 기사와 논평은 한국, 일본, 미국 등 북녘 밖에서는 오랫동안 무성했었다.
지난 9월 27일 44년 만에 열린 북 조선노동당 제3차 당대표자 대회에서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을 그의 고모 김경희와 함께 인민군 "대장"으로 전격 발탁함으로써, 이 온갖 추측들에 일단 마침표는 찍었다. 또 같은 날 이 대회에서 김정일을 노동당 정치국 상무위원, 비서국 총비서,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추대했고, 김정은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 자리를 받았다.
김정은의 공개적인 행보도 빨라졌다. 10월 10일 북 노동당 창건 65주년 기념 북 인민군 열병식과 9일 당 중앙보고대회에 김정은은 아버지 김정일, 중국 축하 사절단 단장 저우융캉(周永康) 중국공산당 정치국 상무위원과 함께 주석단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후계작업이 공개적으로 가속화하는 모양새다.
겉으로는 김정일도 그의 건강문제에 대한 온갖 루머에도 불구하고 북한 최고권력자로 아직도 군림한다는 것을 안팎에 내보이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정은의 등장은 김정일의 유고시를 대비한 최소한의 잠정적인 정치 안전판을 마련한 셈이다.
하지만, 이제 표면화, 공식화, 기정사실화 된 '김일성 왕가 3대 세습 기도'는 옛 소련이나 현 중국을 포함, 90여 년 세계공산당 집권사에서도 그 전례(前例)를 찾아 볼 수 없는 해괴한 일이다. 물론 김일성-김정일 부자 2대 세습도 공산당 집권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지만.
북한의 가장 가까운 동맹인 이웃 중국은 북의 개편된 새 권력지도층을 지지한다는 원론적인 공식 논평을 내놓고, "내정불간섭" 외교원칙을 들먹이며, 당분간 일단 기정사실화하고 관망하는 모양새다. 한편, 한국, 미국, 일본, 유럽의 정부나 언론들은 이 소식을 하나의 "웃음거리"로 가볍게 넘기는 기사와 논평들로 넘친다.
아무튼, 이제 공식적으로 김정은 3대 후계 기도가 북한 말로 표현하면, "척 척척" 진행 중이다. 이는 겉으로는 김정일-김정은 부자와 집권 수혜집단에겐 정치희극일 망정, 북한주민에겐 3대에 걸친 김씨 왕가 "철권 독재"하의 참혹한 북한 고유의 인민 비극 제3막, 제1장의 갓 시작이다.
칭호와 계급
얼핏 생각하면 군 경험과 경력이 전혀 없는 20대 한 젊은 청년을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북한 인민군 "대장," "청년대장" 이라고 부르는 것이 너무나 터무니도 없고, 우스꽝스럽다. 인민군 대장이 골목대장이냐? 하는 야유와 비아냥이 충분이 나옴직도 하다.
비단 우리나라 국군뿐만 아니라 중국인민해방군(PLA)을 포함, 북한 밖의 어떤 나라, 어떤 군대 조직의 잣대로 보아도, 군 경력이 전무한 20대 청년의 "대장" 계급은 황당무계(荒唐無稽)하다.
더구나 김씨 왕조의 시조(始祖)요 김정은의 할아버지 김일성이 20대의 청년으로, 1930년 대 북한-만주 일대에서의 항일(抗日)빨치산 시절 "장군" 칭호를 가졌었다고 하지만, 김정은과 그의 할아버지는 적어도 두 가지가 다르다. 김일성이 이끈 부대원이 기껏해야 100여명, 500명 정도였지만, 실제로 그는 항일 빨치산 활동을 거의 10년 남짓 했다. 더구나 그를 "장군"이라고 불렀지, 군 계급서열로서의 "대장"[김일성은 북 정권 수립 후에는 1953년 원수, 1992년 "대원수," 김정일도 같은 해에 원수]은 아니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김정은의 대장" 계급 수여,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 전격 임명 등 모두를 북한 밖의 다른 나라 잣대로는 설명하기도 힘들고, 쉽게 이해도 납득도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하지만, 김일성 왕가 3대 후계 기도의 표면화, 공식화를 웃음거리나 해괴한 일로 치부하고 비난만 하거나, 가볍게만 넘길 수 도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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