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랜만에 대작을 만나다
<붕새의 날개 문명의 진로-팽창문명에서 내장문명으로>(이하 <문명의 진로>)는 생경한 내용인 데다 본문만 900여 쪽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서술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다. 흐름을 타고 읽어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책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만큼 흡입력이 매우 강한 책이다. 오랜만에 역작을 마주했다. 이하에서 독후기를 간단하게 정리해 보기로 한다.
2. 대가의 탄생인가?
<문명의 진로>를 읽는 내내, 20세기 후반 이후 사실상 대가가 사라진 세상에서 이 책을 통해 새로운 대가의 등장이 예고되고 있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는 저자가 가위 대가의 반열에 이르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여 대작을 풀어낸 저자에게 먼저 경의를 표하며 그간의 노고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저자의 전작인 <맹자의 땀 성왕의 피>(2011), <진화하는 민주주의>(2014), <코리아 양국체제>(2019)가 시론 격이었다고 한다면 <문명의 진로>는 그간의 저작들에서 주장하고 추적해온 흐름을 결산한 것, 굳이 말하자면 중간 결산을 이뤄낸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중간결산이라고 함은 저자가 <문명의 진로>에서 강조했듯이 후기근대는 아직 진행형이며, 그 완결을 이루기까지는 저자의 관찰이 종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3. 세 가지 근대, 그리고 그것들을 가르는 기준으로서 팽창과 내장의 힘
근대를 초기근대, 서구주도근대, 후기근대로 삼 구분하고, 그 구분 기준으로 팽창(외부세계에 대한 포식을 통한 성장)과 내장(내부에서 스스로 성장)이라는 개념을 끼워 넣었다는 점은 대단히 흥미롭다. 동서를 망라하는 인류의 역사가 팽창과 내장이라는 두 개의 가치프레임을 통해 상호 변증법적 운동(움직임)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착상은 매우 신선하다.
그 결과 20세기 말 이후 인류의 역사는 팽창근대의 종언과 내장근대의 부상, 즉 후기근대로의 전환이 본격화되는 대전환기에 직면했다는 저자의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현재 인류의 혼돈은 당연한 것이며 다가올 미래에 대한 기대와 우려가 함께 있으나, 희망 쪽에 방점을 찍을 수 있으리라는 주장도 대단히 인상적이다.
4. 역사 읽기의 신기원
나는 오래전부터 우리 학계의 한국사 연구가 한일, 한중 등 주변국과의 관계 속에서 중층적으로 진행하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봤다. 연구자들의 시야가 그저 한반도 내부로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 늘 아쉬웠다. 한명기 명지대 교수 등 일부 연구자들이 주변국과의 관계를 포함해 한국사를 포괄적으로 연구하려는 태도를 보이고는 있음은 고무적이나, 1국사 중심의 시각은 여전히 주류를 이루고 있다.
반면 <문명의 진로>는 다루는 대상이 '붕새'가 상징하듯 대단히 큰 틀에서 인류 역사를 바라본다. 이는 유발 하라리의 <호모사피엔스>나 <호모데우스>를 능가하는 접근법이다. 더하여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과도 비견된다. <오리엔탈리즘>은 서구의 동양에 대한 편견을 치밀하게 고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저작이다. 하지만 <오리엔탈리즘>에는 서양과 동양의 관계와 상호연결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논의가 없다. 하지만 <문명의 진로>는 서양과 동양이 별도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특성을 포함하여 상호작용을 통해 인류사라고 하는 큰 그림으로 연계되어 있음을 증명한다. 중요한 연결고리 중의 하나인 서구의 동양 침탈, 즉 19세기 이래 본격화되었던 서세동점의 맥락에 대해서도 <문명의 진로>는 각별한 해석을 보인다. 서세동점이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팽창근대라는 거대한 흐름의 분출에서 시작되었고 이후로 이어져 오늘날 팽창근대가 한계에 이르렀다는 해석을 통해 바야흐로 인류사는 새로운 대전환으로 약동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문명의 진로>가 가위 역사 읽기의 신기원을 펼쳐낸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5. 한중일 갈등의 역사에서 나타난 내장근대와 팽창근대(1) : 일본의 봉건제 우월론
일본의 주류 역사학계는 막부체제가 서구의 중세 봉건제와의 유사성 내지 동질성을 강조해 왔다. 이는 일본이 유럽 사회와 같은 역사적 발전 단계를 거쳐왔다는 주장이다. 동시에 그들은 조선이나 중국(청국)의 왕조체제에 대해 고대 노예제 사회와 유사한 아시아적 생산양식의 일종이라는 주장을 암묵적으로 펴왔다(다만 메이지유신 직후 유신 이데올로그들은 메이지유신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해 "원래부터 일본의 역사는 중앙집권적인 성격이 강했다"는 주장을 폈다. 이는 억지로 주장하고 있는 봉건제 우월론과 상반되는 주장이다).
일본 역사학계가 일본사에서 봉건제의 존재를 강조함으로써 일본사를 아시아와 분리하여 서구와의 근친성을 강조하려는 입장에 경도되어 있다. 물론 일본의 역사가 중에서도 일본의 봉건제 우월론은 철저하게 유럽 중심주의 역사연구 방법론에 매몰된 것이기 때문에 조속히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들이 전혀 없지 않다.(<일본의 역사관을 비판한다>(미야지마 히로시 지음, 창비 펴냄) 등)
그런데 <문명의 진로>는 봉건제를 군현제와 대비하면서, 아시아에서는 봉건제에서 군현제로 일찌감치 전환되었으며, 그 통치방식의 핵심은 무에서 문으로의 이동했다고 강조한다. 일본이 도쿠가와 막번체제를 유럽 봉건제도와 동일시하면서 사실상 脫亞를 강조했지만 일본의 막번체제의 실상은 봉건사회이면서도 중앙에서 강하게 통제하는 특이한 사회임을 지적하고 있는 점은 매우 적확하다. 마르크스류의 역사발전단계설에 입각한 일본 역사학계의 봉건제 우월론(중국과 조선에서는 봉건제가 등장하지 않았다는 등의 주장과 함께)의 허약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순간이다. 의미 있는 지적이다.
6. 한중일 갈등의 역사에서 나타난 내장근대와 팽창근대(2) : 아편전쟁의 의미
나는 오래전부터 한중일 간 역사 갈등이 아편전쟁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주장해왔다(조용래, '동아시아 평화공동체 구축의 가능성-아편전쟁으로부터 200년, 좌절된 근대의 재구성-', <일본공간>, 제13호, 국민대 일본연구소, 2013 ; '동아시아의 좌절된 근대 다시 보기', <국민일보> 2013년 6월 19일 자 '조용래 칼럼'). <문명의 진로>가 전제하는 것처럼 19세기 초까지 서구보다 경제적 우위에 있던 동아시아(중국)가 아편전쟁을 계기로 팽창근대의 압력을 받으면서 한중일 3국은 각각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그 와중에 겪었던 상호 관계가 오늘날 갈등의 뿌리가 되었다는 인식이다.
즉, 아편전쟁에서 청국의 패전 과정을 지켜보던 일본은 위기감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서구제국주의 세력과 서둘러 손을 잡고 개항을 꾀하여 메이지유신을 통해 근대국가(<문명의 진로> 식으로 표현하면 팽창근대국가)를 지향한다. 이후 일본은 서구제국주의의 종속적 동반자를 자임하면서 이웃 조선을 식민지로 복속하고, 중국을 반식민지로 삼았다. 한국과 중국의 반일의 뿌리가 바로 그것이다. 팽창근대를 추종했던 일본은 이윽고 본색을 드러낸다. 1차 대전 후 일본은 서구의 종속적 동반자 노릇을 폐기하고 독자적인 팽창근대를 추구한다. 그 결과는 패전이었고, 그들은 철저한 국가파산을 경험했다. 다만 파산한 일본은 전후 냉전의 진영논리 속에서 미국의 종속적 동반자로서 기사회생한다. 그 과정에서 일본의 주변국에 대한 침략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는 소극적으로 얼버무려지고 말았다.
동아시아의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문제가 결국 한중일 3국의 갈등으로 작동한다. 일본은 패전이라는 다소 엉뚱한 역사적 트라우마에, 한국과 중국은 일본에 침략에 휘둘렸던 역사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길 없이 전후가 이어지고 있다. 3국 모두 역사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작금의 현실이다. 한중일 3국의 갈등은 아편전쟁으로부터 시작된 역내의 침략사로 인한 트라우마가 극복될 때 비로소 해소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이미 21세기 들어 분명해진 중국의 부상, 한국의 선진국 대열로 진입 등이 착착 전개되고 있는 마당이니 적어도 아편전쟁 200주년이 되는 2040년을 목표로 삼아 역내의 역사적 트라우마가 해소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노력이 필요하겠다고 봤다.
그런데 <문명의 진로>는 역사적 트라우마 극복이라는 다소 소극적인 문제 제기 수준이 아니라 문명사의 큰 흐름, 즉 팽창근대의 종언과 내장근대의 완성이라는 그랜드 디자인을 앞세워 보다 포괄적이고 본질적인 주장을 편다. 아편전쟁의 의미가 분명하게 각인되는 순간이다. 동아시아의 갈등 문제는 단순히 2국 간의 해법이나 3국 간의 협력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대전환이라는 거대 담론의 당연한 흐름 속에서 해소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의미를 새롭게 제공한다.
7. 한일 관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
한일 관계 또한 '문명의 진로', '문명의 대전환'이란 차원에서 봐야 한다는 지적에서 예외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최근 몇 년 새 한일 관계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갈등의 원인에 대해 대부분은 위안부 문제와 징용자 문제 등 과거사 이슈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다만 역사 문제가 직접적인 원인임은 분명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한국의 부상과 일본의 상대적인 침체로 인한 일본의 초조함이 작용한 데 있다. 과거 일본이 경제력·기술력·국제적 위상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을 압도하는 때에는 한국을 배려하려는 태도가 어느 정도 확인되지만, 한국이 사실상 일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부상한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일본의 혐한(嫌韓) 주장이 확산된 시점, 즉 대략 2010년대 전후부터 한일 간 대립 구도는 돌이킬 수 없는 구조적인 모습을 보여왔다. 한일 역사갈등은 표피적인 현상에 불과한 셈이다.
그렇기에 이제 양국 간 관계 개선의 주도권은 한국에 달렸다고 본다. 그것도 한국이 갈등 현안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에 달려있다. 특히 위안부 문제, 징용자 문제 등에 대해서도 1993년 3월 13일 당시 김영삼 정부가 내세웠던 '도덕적 우위에 입각한 대응 조처 선언'의 연장선에서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도덕적 우위에 입각한 대응 조처'의 내용은 1)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일본에 배상 요구하지 않음, 2) 보상은 한국 정부가 맡음, 3) 일본 정부는 사죄하고 위안부 문제를 조사하며 후대에 알릴 것 등으로 요약된다. 이 조치는 이후 김대중 정부에도 그대로 이어졌고, 이후 노무현 정부 때는 징용피해자 배상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 정부가 보상 책임을 맡는다고 내외에 선포하고 보상을 추진했다. 따라서 작금 제기되고 있는 위안부와 징용자들의 개인청구권 문제도 그 연장선에서, 이른바 '보상과 사죄의 분리'라는 틀에서 해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문제는 보상과 사죄의 분리 문제를 한국 정부가 자국민들에게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문명의 진로>에서 거론하는 수평적 협력을 통한 내장근대의 완성이라는 개념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침략과 지배와 피지배의 공고한 트라우마적 상황에 대해 한쪽에서는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대립적 상황은 그 어떤 논리로도 극복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한일 간의 내장근대의 완성이란 징표, 즉 수평적 협력이라는 방법론적 회로가 있음을 한국이 선제적으로 인식하고 문제해결의 방법으로 제기하는 것이 한일 양국 간, 나아가 동아시아에서의 수평적 협력을 구축해 내는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사고행태야말로 <문명의 진로>가 주장하는 핵심원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8. 중국 굴기와 내장근대의 조화 가능한가?
서구의 팽창근대가 한계에 직면했고, 그로써 동아시아를 중심으로 내장근대가 부상하고 있음은 <문명의 진로>를 통해 충분히 인식했다. 다만 동아시아의 내장근대로의 복귀는 중국의 대국 굴기와 상충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지우기 어렵다. 이는 중국의 급부상에 대해 미국을 중심으로 유럽과 그 외 중국 주변 국가들이 스크럼을 짜고 대응하려고 하는, 이른바 중국 포위망 구축 현상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와 관련이 있다. 서구형 팽창근대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볼 것인지, 미중 대립이 팽창근대와 내장근대의 큰 싸움인지, 아니 더 근본적으로 현재 중국의 존재감과 역할이 내장근대로 평가될 수 있는지 등의 의구심도 솟는다.
<문명의 진로>는 중국의 만리장성을 예를 들어 서구의 팽창근대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평가한다. 외부로의 확장을 꾀하는 서구의 팽창근대와 달리 중국은 외부에서의 진입을 차단하기 위한 방책으로서의 만리장성이라고 거론한다. 과거의 중국은 내장형이라고 하더라도 현재의 중국이 추구하는 대륙 굴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일대일로(一帶一路)로 상징되고 중국의 존재감은 일대일로로 연결되고 있는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확인된다. 중국은 경제협력을 앞세우고 있지만 실제로 중국 자본은 현지 국가에 압박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점에 대해 <문명의 진로>는 적확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9. 동 선생·서 선생·남 선생·북 선생의 스토리텔링
마지막으로 <문명의 진로>를 실제로 동서남북 네 명의 선생님들이 끌고 가는 이 책의 얼개는 대단히 유니크하다. 글이 매끄럽게 읽히는 이유도 그것이라고 본다. 손오공의 분신술이 저술 현장에 반영되어 저자의 분신들이 동서남북으로 종횡무진 내달리며 이야기를 펼쳐간다.
저자의 분신인 이 네 선생님들이 이야기를 풀어가는 경우, 각각 네 선생님들의 특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것은 조금 아쉽다. 예컨대 '이 이야기는 남 선생님이니까 이렇게 풀어냈구나, 동 선생님이니까 여기에 강조점을 두는구나 하는 식의 상황은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다. 분신 네 명의 특성까지 반영하기란 쉽지 않았겠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그렇게 구성이 되었더라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지 않았을까 싶다. 오랜만에 참으로 귀하고 스케일 큰 담론을 접했다. 내장근대의 완성에 대한 이후의 작업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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