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노현이 춤에 빠졌다. 그것도 흠뻑. 법학 교수 출신으로 서울시 교육감을 지냈던, 그 곽노현이다. 조기숙 이화여자대학교 무용과 교수가 이끄는 '춤, 몸 그리고 치유'라는 행사에도 얼마 전에 참가했다. 물론, 그는 여전히 몸치다. 앞으로도 그럴 게다. 춤꾼,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그가 변한 건, '몸학'(somatics) 때문이다. 말 그대로, 몸에 대한 공부다. 법학자였던 그는 '관학(官學)'에서 '민학(民學)'을 거쳐 '몸학'으로 왔다고 말한다. 법과대학에서 정부의 역할을 다루는 '관학(官學)'을 공부했다. 이어 개인의 권리, 인권을 탐구하는 '민학(民學)'을 익혔다. 그리고 지금, '몸학'에 빠졌다. 그 스스로도 점점 미시적인 접근을 해온 셈이라고 한다. 권력으로 몸을 길들이고 옥죄는 공간이 감옥이다. 교육행정 및 수감생활을 거친 뒤, 그가 빠져든 '몸학'이 어떤 것인지 궁금해진다.
마침, 그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생겼다. 그는 지난달 26일 서울 종로구 글로벌센터에서 출범식을 가진 비영리 사단법인인 '징검다리 교육공동체' 이사장을 맡고 있다. 320여 명이 참가한 이날 출범식 역시 '몸'을 중심에 놓은 자리였다. 격렬한 북소리로 시작됐다. 로고송과 로고춤이 소개됐다. 조기숙 교수 제자들의 춤 공연이 있었다. '고동치는 민주주의', '춤추는 민주주의'라는 구호가 나왔다. 고동치고, 춤추는 민주주의. 곽노현 이사장의 화두다.
몸과 춤, 그리고 교육공동체. 이들 세 꼭짓점을 잇는 건 두 개의 사건을 거치며 얻은 깨달음, 그리고 사명감이다. 세월호 참사, 그리고 알파고 충격이 그것. "가만히 있으라"라는 어른들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랐던 아이들이 바다에 잠겼다. 이런 사회가 정상인가? 비정상을 드러낸 정치 권력은, 그러나 바뀌지 않았다. 민주주의 맞나?
곽 이사장은 "우리의 민주주의는 약 1퍼센트의 전투적 시민성이 지탱해 왔다"고 이야기했다. 문제는 이제 그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저 투표로 대통령을 뽑을 권리를 넘어서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그러자면 다수의 시민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 사람은 있지만 시민은 없다.
사람에서 시민으로 넘어가는 징검다리를 놓아야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인성 교육'을 강조하는 이들이 많았다. 인성, 요컨대 사람다움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는 게 곽 이사장의 생각이다. 깡패도 자기 패거리 안에선 인간성 좋다는 말을 듣는다. 우리에게 부족한 건, 인성이 아니다. 민주 공동체에 어울리는 시민성이다. 그걸 익힐 기회가 없었다. 우리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공간, 즉 학교와 직장의 문화가 모두 민주적인 시민성과 거리가 멀었다. 학교에서, 그리고 생활공간에서 정치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곳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 민주 시민을 기르는 교육이다. 징검다리 교육공동체는 그걸 하려고 모인 이들이다.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알파고'가 머리 쓰는 일로 인간을 제압한 사건은 또 다른 충격이다. 우리 교육은 늘 지식과 지능을 윗자리에 뒀다. 국어, 영어, 수학이 늘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다. 셋 다 언어와 수리라는 이성의 영역이다. 하지만 '알파고' 충격은 근본적인 방향 전환을 요구한다. 머리 쓰는 일 가운데 상당 부분은 기계에게 넘어갈 게다. 지식과 지능에 따라 아이들을 줄 세우던 기존 관행대로라면, 사람은 기계를 섬겨야 한다. 그러지 않으려면, 지식과 지능으로 줄 세우는 관행 자체를 버려야 한다. 문화, 예술, 체육 활동이 학교에서 제대로 대접 받아야 한다. 전직 교육감이 '몸학'에 빠져든 한 이유다.
머리만 바라보는 게 알파고 이전의 교육이었다. 알파고 이후에는 달라야 한다. 몸을 느끼고 깨닫는 교육이어야 한다. 이는 다시 민주주의의 문제다. 몸을 이해하고 몸의 감수성을 깨우고 높이는 일은 나를 온몸으로 아는 일이자 내가 온몸으로 살아가는 일이다.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개인이 있어야 민주주의도 된다. '몸학'은 민주주의 구현의 첫 걸음이다.
알파고 이전과 이후를 잇는 징검다리 교육. 곽 이사장, 그리고 징검다리 교육공동체는 그걸 꿈꾼다. 곽 이사장을 만났다.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삼청동에서 그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1퍼센트의 전투적 시민성으로 유지된 민주주의, 이제 한계다"
프레시안 : 징검다리 교육공동체 이사장을 맡았다. 교육감 직에서 물러난 뒤, 조직적인 공적 활동으로는 처음이다.
곽노현 : 세월호 참사가 계기였다. 참사 이후 정치 상황 전개를 보며 다시 충격 받았었다. 참사에 대한 반성이 정치에 반영되지 않는 구조. 민주주의의 퇴행인데, 그게 어디서 비롯된 걸까 싶었다. 내 생각은 이렇다. 민주 정치가 이뤄지려면 민주 시민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민주 시민성이 없으면 민주 시민도 없다. 따라서 시민성을 충전해야 한다. 가정, 학교, 직장, 동네 등 삶의 현장에서 민주 시민성을 길러야 한다. 문화로서의 민주주의, 사회 상태로서의 민주주의가 확대돼야 한다.
우리 사회는 그간 약 1퍼센트의 전투적 시민성이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그 1퍼센트가 반 토막 났다. 대학생들은 온통 취업 준비만 한다. 정당도, 시민단체도 힘이 약해지기만 했다. 따라서 소수의 전투적 시민성에 기대는 것과는 다른 방식을 찾아야 한다. 바로 민주 시민 교육이다. 징검다리 교육공동체가 하려는 일이다.
"몸과 춤, 그리고 민주주의"
프레시안 : '춤추는 민주주의'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곽노현 : 문화 민주주의에 대한 지향을 담았다. 정치, 경제, 사회 민주주의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궁극적으로는 문화 민주주의가 이뤄져야 한다. 또 이런 면도 있다. 출범식에서 '고동치는 민주주의'라는 구호도 내걸었다. 실제로 북을 치며 시작했다. 민주주의에 대한 나쁜 인상을 깨고 싶었다. 흔히 민주주의라고 하면, 어둡고 무겁게만 생각한다. 아니면 짜증스럽고 피곤한 다툼이라고 본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민주주의는 우리를 춤추게 하고, 고동치게 한다. 우리를 살아 있게 하고, 집단 지성을 발휘해서 우리의 운명을 우리가 개척하게 한다. 이런 생각을 담았다.
실제로 징검다리 교육공동체 안에는 몸의 철학, 춤의 철학을 하는 이들이 있다. 내용이 무척 깊다. 민주주의의 첫 걸음은 먼저 개인이 스스로 자율적인 주체가 되는 것이다. 그러자면 몸부터 깨어 있어야 한다. 몸 주체성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 자율적인 주체란 있을 수 없다. 당연히 민주주의도 불가능하다. 여기서 몸은 종합적인 개념이다. 마음과 정서까지 아우르는 개념이다.
몸에 생명력이 흐르면, 신명이 붙으면, 그게 바로 춤이다. 몸과 춤, 민주주의는 이어져 있다.
"춤추는 민주 시민 되겠다"
프레시안 : 꼭 물어봐야 할 것 같다. 그래서 곽 이사장은 요즘 직접 춤을 추나.
곽노현 : 올해는 내게 몸의 경직성을 깨는 해였다. 몸이 굳으면 마음도 생각도 함께 딱딱해진다. 그걸 풀고 몸의 감수성을 길러야 한다. 오래 전부터 문예체(문화 예술 체육) 교육에 관심이 컸다. 거기서 춤이 빠져 있었는데, 이번에 채워 넣었다. 나 역시 '춤추는 민주 시민'이 될 생각이다.
프레시안 : 그래서 정말 춤을 추느냐는 질문이다.
곽노현 : 미국 유학 시절, 우리 아이들이 흑인 유치원에 다녔었다. 그래서 흑인 가정에 자주 초대 받았다. 흑인들은 생활 자체가 춤이다. 몸짓마다, 걸음마다 리듬이 녹아 있다. 그게 인상적이었다. 춤은 그 자체로 기쁨이다. 일단은 나를 자유롭게 하는 춤, 나는 그거부터 한다. 일정한 규칙이 있는 춤, 그건 자유를 향한 속박이다. 나는 그 단계까지는 못 갈 것 같다. 다만 자기를 표현하는 춤의 단계까지는 가고 싶다.
프레시안 : 한국인들에겐 아직 춤이 어두운 이미지다. 나이 드신 분들에겐 더 그렇다. 하지만 당장 휴전선만 넘어도 달라진다. 북한 사람들은 상당히 춤에 친숙하다고 한다. '춤추는 민주주의'는 통일 이후에 더 환영받을 수 있겠다.
곽노현 : 북한뿐 아니라 중국, 쿠바, 러시아 등 사회주의를 경험했던 나라들은 대체로 춤에 친숙한 문화다. 춤은 상대에 대한 배려다. 또 관계성을 키우는 일이다. 사회주의적인 인간과 춤은 아무래도 가깝다.
"관학, 민학, 몸학"
프레시안 : 곽 이사장은 원래 법을 공부했다. 국가의 역할, 인권 등을 다뤘다. 그러다 교육감을 지냈다. 지금은 '춤'에 빠졌다. 국가, 학교, 몸의 순서인데, 흔치 않은 이력이다.
곽노현 : 추상에서 구체로 내려온 셈이다. 나는 원래 '관학(官學)'을 했다. 법학을 전공했으니까. 그러다 인권을 다루는 '민학(民學)'에 눈을 떴고, 지금은 '몸학'에 빠졌다. 어쩌면 반대 방향으로 갔으면 더 좋았겠지. 몸, 인권, 국가 순으로, 그러니까 구체에서 추상으로 말이다. 하지만 어느 방향이 꼭 옳다고는 할 수 없을 게다.
프레시안 : 법학과 춤의 조합이라니, 아무래도 낯설다. 어쩌면 상극처럼 보인다. 법이란 이성으로 규율하는 역할이다. 춤은 정반대다. 몸과 감성의 영역이다. 규율보다는 신명이다.
곽노현 : 내 생각은 다르다. 법학과 춤이 통하는 면도 있다. 법의 규율 역시 자유를 위한 속박이다. 아름다운 원칙을 향한 규율이다. 따라서 규율이 있으되 그걸 넘어서는 게 최고의 경지다. 그런데 그건 춤도 마찬가지다.
"'알파고 이후'의 교육으로 향하는 '징검다리'"
프레시안 : 인공지능 소프트웨어 '알파고'와 이세돌 9단의 바둑 대결이 큰 충격을 줬다. 근육을 대신하던 기계가 기억과 계산을 담당하더니, 이젠 생각까지 한다. 일본에선 인공지능이 도쿄대학교 입시를 준비하고 소설 공모전에 도전한다. 기계가 머리 쓰는 일을 하는 시대다. 전통적인 지식 교육은 의미가 확 줄어들었다.
곽노현 : '알파고' 이전과 이후의 교육은 완전히 달라야 한다. 그 둘을 잇는 징검다리가 되려고 한다. 인공지능과 인간지능이 경쟁하고 협력하는 상황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문예체(문화, 예술, 체육) 교육이 그래서 더 중요해졌다. 징검다리 교육공동체에는 다섯 개의 센터가 있다. 민주시민교육센터, 교사성장지원센터, 학부모성장지원센터, 학생·청소년성장지원센터,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등이다. 이 가운데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가 담당하는 역할이다. 몸과 춤에 대한 생각과도 닿아 있다.
프레시안 : 징검다리 교육공동체가 내건 또 다른 구호가 '가르치지 않는 시민교육'이다.
곽노현 : 우리는 모든 시민은 예술가라고 믿는다. 아울러 모든 시민은 지식인이라고 믿는다.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관계는 없다. 함께 배우며 성장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꺼내고, 함께 나눈다. 이는 전문가의 역할에 대한 생각과도 맞물려 있다.
지식이 특혜를 얻는 수단일 수는 없다. 전문가는 보통 사람들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 그들 위에서 군림해서는 안 된다. '가르치지 않는 시민교육'은 전문가와 엘리트를 제자리로 돌리자는 것이다.
세월호 참사를 보며 우리는, 순응하는 인간을 길러내는 권위적인 교육이 낳은 결과를 봤다.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따르던 아이들이 죽었다. 교사의 우월적인 지위를 강요하는 교육은 잘못이다. 성장을 촉진하고 돕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장지원 센터라는 표현을 쓴다. 교사, 학부모, 학생, 청소년 등의 성장을 돕는다는 것이다. 한 방향으로 가르치고 따르는 관계가 아니다.
"사람에서 시민으로…자기 새끼만 챙겨서는 시민을 기를 수 없다"
곽노현 : 흔히 인성 교육을 말한다. 하지만 인성만으로는 안 된다. 인성은 친밀성의 세계에서만 통한다. 조폭도 친밀한 세계 안에서는 인성이 좋다. 인성을 기르는 건 가정과 동네의 몫이다. 그러나 우리 공동체는 그보다 넓다.
공동체의 주인이 되게끔 하는 건, 인성을 넘어서는 시민성이다.
세월호 참사와 알파고 충격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건 시민성이다. 행동의 뿌리를 공포와 불안에 두는, 순응형 인간을 기르는 교육으로는 시민성을 기를 수 없다. 권위가 없으면 불안해하고, 자유로부터 도피하려는 인간을 기르는 교육 역시 마찬가지다.
징검다리 교육공동체에 있는 학부모 성장지원 센터는 '내 아이의 부모를 넘어 세상의 부모로'라는 구호를 내건다.
자기 새끼만 챙겨서는 시민을 기를 수 없다.
"교실에서 정치 논쟁을 해야 한다…단 세 가지 원칙이 있다"
프레시안 : 구호에 담긴 문제의식이 깊다. 그런데 대체로 장기적인 과제 같다. 그보다 구체적인 목표는 없나.
곽노현 : 전략적인 과제가 있다. '한국판 보이텔스바흐 협약' 체결이다. 옛 서독에서 1976년 체결된 협약이다.
통일 전의 독일에서도 정치 교육을 놓고 우리와 비슷한 갈등이 있었다. 좌파와 우파가 사회나 역사, 정치 등의 교육 내용을 놓고 싸웠다. 교육에서 나치 청산이 불철저하다는 비판도 종종 나왔다. 결국 보이텔스바흐(Beutelsbach)라는 작은 도시에 모든 이념을 망라하는 정치가, 연구자, 교육자가 모여 치열한 토론을 했다. 그렇게 해서 두루 동의하는 합의를 끌어냈다. 그게 보이텔스바흐 협약이다. 지금까지 유지되는 '정치 교육'의 원칙이다.
이 합의에 따르면, 정치 교육은 △일방적인 주입식 교화 교육을 금지하며, △학문과 정치에서 일어나는 논쟁을 교육에서도 그대로 재현하고, △학생들이 정치적 상황과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에 따라 정치적인 행위 능력을 기르게끔 해야 한다.
첫 번째 원칙은 교사가 아이들에게 특정한 결론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진보와 보수 모두에게 적용돼야 한다. 진보적인 교사가 자신의 신념을 아이들에게 주입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정치 논쟁을 교육에서 그대로 재현한다는 원칙 역시 중요하다. 아이들도 미디어를 접한다. 사회에서 어떤 논쟁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다. 그런데 학교에선 눈 앞의 논쟁에 입을 다물라고 한다. 결국 아이들을 백치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건 명백한 잘못이다. 다만 학문과 정치에서 벌어지는 논쟁을 교육에서 재현할 때, 주입식 교육을 금지한다는 원칙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정치적인 행위 능력을 기른다는 원칙 역시 중요하다.
"'독일 병정'은 어떻게 난민 수용 지지하는 민주 시민이 됐나"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2차 세계 대전 뒤에도 독일에서는 나치 청산 작업이 철저하지 않았었다. '독일 병정'이라 불리는 권위적인 인간을 기르는 기존 교육을 바꾸지 않으면, 제대로 된 민주주의는 불가능했다. 보이텔스바흐 협약은 그 한계를 깨려는 시도였다. 그리고 결실이 있었다.
최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시리아 난민을 전부 수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시민이 지지했기에 가능한 결정이었다. 난민 수용을 지지하는 시민은 어떻게 태어났을까. '독일 병정'이 아닌 '민주 시민'을 기르는 정치 교육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프레시안 : 한국 역시 교육 영역에서 이념 갈등이 심각하다. 정치적인 논쟁이 벌어지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 등이 '계기 수업'을 한다. 학교 밖 논쟁을 교육 현장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은 긍정적이지만, 간혹 교사가 자기 생각을 강요해서 문제가 된다. 이런 점은 보수 언론이 공격하는 빌미가 되기도 한다. 보이텔스바흐 협약이 교사들에게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
곽노현 : 아이들은 '교복 입은 시민'이다. 당연히 정치 논쟁을 학교에서 경험해야 한다. 다만 거기에 몇 가지 원칙이 필요하다. 한국판 보이텔스바흐 협약은 그걸 만들자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 교육이 합의된 원칙에 따라 이뤄지면, 교사의 정치 활동에 대해서도 새로운 접근이 가능하다. 지금까지는 교사가 자기 신념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위험에 대한 걱정이 컸다. 하지만 이런 위험을 엄격하게 차단하면, 교사의 정치 활동에 대해서도 다른 입장을 가질 수 있다.
프레시안 : 독일에서 보이텔스바흐 협약이 체결된 게 딱 40년 전이다. 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그걸 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서로 다른 이념을 지닌 이들이 토론하고 합의해서 원칙을 세우고, 그걸 유지해본 경험이 없다. 한국판 보이텔스바흐 협약 체결에 대해 어떤 계획이 있나.
곽노현 : 매우 길고 복잡한 사회적 합의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그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 그러니까 마중물 한 바가지의 역할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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