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 성조기와 이스라엘기를 흔드는 이들에게

[기고] '쪽바리', '짱깨', '양키'라는 이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8일(현지시간) 한국에 대해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 나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방위비 분담금 인상 압박성 발언 중 나온 얘기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지자 대상 연설에서 “나라 이름을 밝히지 않겠지만 ‘아주 위험한 영토’를 지키기 위해 미국이 많은 돈을 쓰는 국가가 있다”며 “그들이 (미군 주둔 비용의)나머지도 내도록 요구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 나라를 한국을 지목한 것이라고 정치평론가들은 분석했다.

한국이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는 틀린 말이다. 미국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는 것이 한국이다. 설사 다른 마음을 갖고 있다고 해도 미국 말 안 들으면 재미없게 구조가 되어있다. 설사 미국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미국 사회나 미국의 문화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이고 양면적인 감정들의 복합체로 보아야 한다. 즉 양국 관계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문제들을 싹둑 잘라내고 ‘반미’라고 단정하면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반미주의는 세계적으로 보편화된 현상이다. 유럽은 물론 중동, 아프리카는 강도가 더 높다. 동유럽 붕괴 직전 동유럽 나라들이 반소련주의를 외친 맥락과도 같다. 그것은 어떤 체계적인 이데올로기이거나 다듬어진 사회적 비판 체계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 일반적 정서의 성격이 강하다. 미국이 비합리적 정책이나 강압적 태도를 보일 때 나온 민중의 감정적 대응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외세의 엄청난 시달림을 받았다. 그래서 미국보다 더 이웃나라 일본을 싫어하고, 중국도 싫어한다. 역사적으로 당하고 있으니 힘으로는 못해보고 속으로 씨부렁거리는 것이다.

속된 말로 일본인·중국인·미국인을 부를 때 우리는 쪽바리, 짱깨, 양키라고 한다. 일본인·중국인·미국인이라고 정명을 부른 기억은 별로 없다. 특별히 악의가 있거나 저의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생각 없이 부르지만, 그 말 속에는 민중들의 외세에 대한 거부 정서가 담겨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상당히 복잡한 성격들이 잠복해 있다.

우리의 외세에 대한 멸칭(蔑稱)은 오랜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니, 일본인은 왜구(키작은 해적), 중국인은 오랑캐(약탈하는 북방민족)였다. 시달림에 대한 자기방어적 야유다. 이때 미국이 곁에 있었다면 그들도 필시 모욕적인 이름을 얻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들 나라 호칭은 근래 들어 더 다양하게 자극적으로 ‘진화’했다. 일본인은 왜놈-쪽바리-벤또-일본놈으로, 중국인은 되놈-짱깨-짱꼴라-쭝국놈으로 부른다. 미국인은 양놈-양키-코쟁이-미국놈이다. 소련인도 당연히 소련놈으로 욕을 먹고 있다. 외국인은 대체로 ‘놈’으로 비하되고 있다.

이러한 멸칭들이 인종차별적인 태도에서 나왔으리라고 보지 않는다. 외세에 대한 국민정서적 거부감과 두려움, 그리고 일게 모르게 쌓인 적대감에서 나온 별칭이다. 피해의식에 따른 민족적 감정과, 우리와 다르면 두렵다고 보는 불안감 때문에 생긴 것이다. 문을 닫고 있을 때는 고립되고, 외부는 두렵고 불안한 대상이다. 예로부터 피해만 받아왔다는 자기방어적 논리다.

사대주의는 지배층이 만들어낸 외세 의존 이데올로기

역사적으로 살펴보자. 우리는 중국을 대국이라고 우러르고, 사대(事大)를 하고, 조공을 바치고, 왕의 승인과 왕비·세자 책봉까지 결재를 받았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중국의 결재를 받야야 정통성이 확보되는 것으로 알았다. 정치적 파워 게임에서 우월적 위치에 서기 위해 이같이 외세를 이용했다. 중국은 의식하지 않는데 우리 스스로 예법의 나라라며 속국을 자처하고, 알아서 기었다. 스스로 독립 의지나 주체 의식을 헌납한 셈이다.

사대는 지배층이 만들어 권력 유지의 방편으로 여겼을 뿐, 민중과는 상관이 없었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알고, 학문과 문화, 사상의 뿌리라고 숭앙하는 것도 사대부의 인식일 뿐이다. 그런데 그런 부모국이 툭하면 쳐들어와서 나라를 분탕질한다. 피해는 고스란히 백성들이 받는다. 군역, 노역, 식량 징발 등등... 민중들 사이에서 욕이 안나오겠는가. 이는 중국을 향해서도 나온 욕설이지만, 동시에 지배층 사대부에 대한 비난이기도 하다.

일본의 경우는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동남해안은 1천년 전부터 왜구들의 노략질의 텃밭이었다. 소와 돼지, 곡물과 해산물을 훔쳐가고, 장정들과 부녀자를 납치해 갔다. 임진왜란 7년 동안에는 전국토는 물론 영남 해안지역을 지배하면서 살인·강간·착취 등 못된 짓을 다했다. 일제강점기 36년은 새삼 들출 것도 없다. 인간으로서 참을 수 없는 모욕과 치욕을 안겨주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고관대작들은 이런 참혹한 현실에도 이익을 챙겼다. 어떤 상황이 와도 그들에게는 손해볼 것이 없었다. 중국에 잘 보이기 위해서 정성껏 준비하는 조공품마저 백성들이 뼛골 빠지게 노동을 해서 생산한 것들이다. 일제강점기 징용과 위안부, 공출, 수탈 역시 순전히 민중의 몫이다.

해방 후 미군정이 들어와 신생 대한민국을 디자인했지만, 국민이 바라는 방향은 아니었다. 국민을 덜 깨어난 무지랭이 정도로 취급하고, 물러가는 조선총독부의 훈수를 받아 일제강점기의 순사들, 관리들을 등용했다. 백성을 괴롭혔던 친일경찰과 친일인사가 재등용돼 나라의 기틀을 잡으니 민중들은 뭐 이런 개같은 일이 있어? 하고 미국과 지배층을 욕했다. 이때 양심인사들을 기용했더라면 초기 다소 미숙했더라도 국가기강과 국가경영의 틀을 바로 잡아 나갔을 것이다. 이렇게 나라가 굴러가야 하는데 일제강점기와 다름없는 지배정책을 펴니 욕을 퍼부었던 것이다.

미국과 일본과 한국

최근의 미국을 보자. 한국에 주둔한 미군은 한국만을 위한 미군인가. 아니다. 동북아 신속기동군으로 중국을 겨냥해서도 주둔하고 있다. 우리가 평택기지 등 미군 주둔지는 무상으로 제공하고 있다. 동시에 미국 무기를 얼마나 많이 사들이고 있는가. 그런데도 방위비 분담금을 더 내라고 한다. 이는 권위주의 정권이 말을 잘 들어준 후과라고 생각한다. 독재를 눈감아달라고 부탁하면서 미국이 원하는 대로 무기들 사들이고, 친미 사대를 강화한 결과다.

미국이 남북의 평화 공존에 진정성을 갖고 있는가. 진정한 평화를 위해 헌신한 경우는 별로 없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과 대화하는 등 종전의 미국 태도와는 다르지만, 그래도 신뢰는 주지 못한다. 진정성보다 정략적으로 보인다. 강경 네오콘과 군산복합체와 연루된 미국 정치인들의 발언을 보면 결코 한반도 평화정착을 바라는 것 같지 않다. 그것이 초강대국 미국 질서에 주도권을 잡고, 팽창주의를 지향하는 정책에 충실할지 몰라도 인류보편적 가치에 준해서 볼 때 온당하지 않다.

나는 미국의 영화를 좋아한다. 록음악도 좋아하고, 헤밍웨이, 존 스타인벡, 제임스딘, 리즈 테일러, 로버트 레드포드를 좋아하고, 미국인의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정신도 좋아한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도 미국 영화, 미국 음악, 코카콜라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들이 정말로 반미주의자일까? 그렇게 설정해 적대하니 반미주의자가 된 것이 아닐까?

세계의 반미감정은 미국 자신만을 위한 팽창정책 때문이 아닐까. 민주주의 선진국가답게 자유, 평화, 관용, 배려, 헌신의 민주주의 규범을 선행해 나간다면 반미구호가 나올 이유가 없을 것이다. 설사 반미구호가 나오더라도 그것은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는 지렛대가 되는 것이다.

그럼 일본의 경우를 보자. 그들은 언제까지 ‘과거’를 물고 늘어지느냐고 항변한다. 사과도 수차 했다고 말한다. 국내 세력 중에도 그런 부류들이 있다. 이제는 덮고 가자고 한다. 그러나 사과를 했다가 뒤집고, 또 사과했다가 뒤집으면 누가 그 진정성을 믿겠는가. 사과를 했으면 그에 합당한 정책기조를 유지해야 하는데, 아베 극우정권이 들어선 이후 헌법개정 움직임과 재무장 카드를 꺼내들고 있다. 역내 평화와 안정엔 아랑곳없이 남북간의 긴장 틈새를 이용하면서 자국의 이익을 취하려 하고 있다. 그러니 더 얄밉고 잔상스럽다. 같은 전범국가인 독일에게 좀 배우라고 조언하고 싶다.

위축될 필요는 없다

어쨌든 중국, 일본, 미국이 한국을 식민지 또는 종속국 정도로 보았으니 민중의 외인에 대한 시선도 좋을 리 없다. 그래서 왜구-왜놈-일본놈-쪽바리-벤또라는 말이 나오고, 되놈-짱깨-짱꼴라-쭝국놈, 양키-앙놈-미국놈이라는 비난성 조롱이 나왔을 것이다. 수 백년의 역사 내내 피해를 당한 우리가 자신들의 치욕의 역사에 대한 분노를 이런 식으로 자위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우리에게도 지킬 자존심이 있는 것이다.

외세에 관한 한 지금도 우리에겐 약한 고리가 있다. 거리에 넘쳐나는 사대주의적 태도다. 남북이 평화의 시대를 열겠다고 하니 미국더러 망쳐달라고 성조기를 흔들고, 어디서 구했는지 얼토당토않은 이스라엘기까지 가지고 나와 흔들어댄다. 욱일기만 안들었다 뿐이지 일본에도 계속 추파를 던진다.

외세에 기대어 여전히 이익을 취하려는 기회주의자들을 본다. 가난하고 힘이 약했던 때의 사대주의, 권력쟁탈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사대주의, 냉전과 대결을 깔고 외세를 끌어들여 이익을 추구하는 사대주의, 모두가 구체제 기득권층의 초상이다. 그들은 외세의 그늘을 벗어날 수 없다는 한반도 숙명론을 얘기한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허약한 나라가 아니다. 주체적 역량이 생길만큼 국민지성이 성장했다.

민족적 긍지를 찾을 때, 외세와의 관계도 건강해진다. 굴종하는 듯한 태도는 외세가 먼저 비웃는다. 그리고 이용할 것이다. 주인을 쫓아내고 손님들이 안방을 차지해 분탕질할 수 있는 것이 역사가 주는 교훈이다. 우리를 짓누르는 외세에 대한 건강한 욕은 필요하다. 굳이 비웃고 욕할 필요는 없지만, '쫄' 필요도 없다. 자신감을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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