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팽이처럼 느리게 걷는, 봄 마중길
달팽이처럼 느리게 걷는, 봄 마중길
2018년 3월 섬학교는 <청산도>
2018.02.06 00:48:53
달팽이처럼 느리게 걷는, 봄 마중길
슬로시티 청산도는 느림을 지향하는 섬이지만 청산도를 찾는 많은 이들이 느림을 즐기지 못하고 쫓기듯 길을 가기 바쁩니다. 자동차를 타고 와서 포인트만 찍고 서둘러 떠나는 이들은 논외로 치더라도 걷기 위해 섬에 온 이들마저도 코스를 완주하는 것에만 급급하기 일쑤입니다. 느리게 가기 위해 탈것을 버리고 두발로 걷기를 선택한 사람들이 바쁘게만 걷는다면 그것은 다시 속도의 노예가 되는 것이겠지요. 길가의 풀과 나무와 들꽃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새소리를 듣지도 못하고 정신없이 걷는다면, 또 시시각각 변화하는 바다의 풍경을 놓친다면, 길에 얽힌 이야기와 바람이 전하는 말을 듣지 못한다면, 대체 자연의 길을 걷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청산에 살어리랏다! 탄성이 절로 나오는 청산도Ⓒ섬학교


청산도에서는 느리게 걸어야 합니다. 온갖 해찰을 다 부리며 걸어야 합니다. 도달해야 할 목적지 따위는 잊어야 합니다. 목적지에 가지 못한들 무슨 문제겠습니까. 여행의 목적지는 여행 그 자체입니다. 여행을 떠난 순간 우리는 이미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 아니던가요. 3월의 섬학교(교장 강제윤, 시인·섬여행가) 제69강은 느린 섬 청산도 기행입니다. 봄이 가장 먼저 오는 남쪽 섬으로 봄 마중을 갑니다. 느릿느릿 달팽이처럼 걸으실 분들만 초대합니다.

교장선생님으로부터 2018년 3월의 걷는 섬 <청산도>에 대한 설명을 들어봅니다.

청산항, 한 남자 이야기

청산항 간이어판장 좌판에서 초면의 나그네와 한 사내가 돌멍게 한 접시를 놓고 소주를 마십니다. 청산항에서 발이 묶인 길손들이 각자 술 한 잔 하러 나왔다가 합석했습니다. 사내는 목포 전자제품 대리점에서 일합니다. 사내는 청산도에 전기히터를 설치하러 왔다가 배를 놓쳤습니다. 목포에 오기 전까지 사내는 부산에 살았다 합니다. 낯선 목포 땅에 살게 된 것은 순전히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사내는 경북 예천이 고향이지만 조실부모하고 부산으로 이주해 동생들을 키웠습니다. 열한 살 때 전포동에서 재봉 일을 시작했습니다. 열여덟 살부터 스무 살까지는 멸치잡이 배를 탔습니다. ‘조직’ 생활도 했다 합니다. 뱃일을 그만두고 놀던 때였습니다.

사내는 여자친구와 부산 백악관 나이트클럽엘 갔다가 ‘스카웃’ 됐습니다. 옆 좌석의 일행 중 한 사람이 자꾸 여자친구에게 ‘집적’거렸던 모양입니다. 일행은 모두 7명. 세 번쯤 경고했지만 숫자가 많은 취객들 눈에 사내의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습니다. 7명과 붙었습니다. 셋을 쓰러뜨린 뒤 나중에는 맥주병을 깨 들고 위협하니 그들도 더 이상 덤비지 못했다지요. 싸움이 수습되자 나이트클럽 매니저가 사내를 불렀습니다. 대뜸 “너 내일부터 일해라. 안 하면 죽는다.”

그 나이트클럽은 부산지역 최대 폭력조직이 운영하는 곳이었습니다. 나이트클럽에서 심부름하다가 한 달 뒤에 정식 조직원이 됐습니다. 또 한 달이 지난 후 조직의 명령으로 경쟁 조직의 조직원을 ‘담그고’ 감옥에 갔습니다. 초범이라 1년 남짓 살았습니다. 출소 뒤에도 5년 쯤 더 조직 생활을 했습니다. 인천으로 파견 근무를 가기도 했습니다. 인천 옛 터미널 근처의 나이트클럽을 맡아서 운영했습니다. 그러다 너무 힘들어서 부산으로 복귀했습니다. 부산 남포동의 나이트클럽을 운영했습니다. 그 사이 번 돈으로 여동생 둘을 결혼시켰습니다.

여자의 권유로 사내는 조직 생활을 정리하고 목포까지 왔습니다. 목포는 여자의 고향이었습니다. 둘이 3년을 살았다 합니다. 그러다 여자와 헤어졌습니다. 가진 돈과 집 모두를 여자에게 남겨주고 몸만 나왔습니다. 그가 집을 나온 일주일 뒤부터 여자는 그 집에서 다른 남자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영영 떠났지만 사내는 목포에 정이 들어 목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합니다. 청산도 도청항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난 나그네와 사내는 쓴 소주잔을 털어 넣으며 내내 먹먹합니다. 이제 또 각자 가던 길을 가겠지요.

▲푸르고 또 푸른 섬과 바다, 청산Ⓒ섬학교


고등어로 퇴비를 만들고 홍등가로 술렁이던 청산도 파시

청산면 소재지인 도청리 물량장에는 어민들 몇이 다시마 양식 준비에 한창입니다. 슬로길의 시작은 도청리 선창가입니다. 이를 미항길이라 이름합니다. 어민들은 미역 양식을 했던 밧줄을 건져내 손질한 뒤 거기에 다시 다시마 종묘를 붙입니다. 양식되는 청산도의 미역과 다시마는 대부분 전복의 밥으로 쓰입니다. 자연산에 목마른 도시인들은 전복 또한 자연산이 최고인 줄 알고 양식보다 몇 배의 높은 가격에 자연산 전복을 사먹습니다.

하지만 알고 보면 양식전복도 자연산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가공 사료가 아니라 미역, 다시마 등의 해초만 먹고 바다에서 크기 때문이지요. 먹이가 같고 같은 바다에서 자라는데 자연산과 양식이 크게 다를 까닭이 없습니다. 실상 패류는 자연산이냐 양식이냐가 크게 중요치 않습니다. 얼마나 깨끗한 물에서 자랐는지가 관건입니다. 오염된 물에서 자랐다면 자연산이라 해서 좋을 까닭이 어디 있겠습니까.

과거 도청리는 파시로 유명세를 떨치던 곳입니다. 서해에 연평도 조기 파시가 있었다면 남해에는 청산도 고등어 파시가 있었습니다.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로 중요한 파시였습니다. 바다 위의 시장, 파시(波市)는 본래 어류를 거래하기 위해 열리던 해상시장입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영광 ‘파시평(波市坪)’이 등장할 정도로 파시의 역사는 유구합니다. 성어기가 되면 고기잡이배들이 조업하는 어장에 상선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어선들은 생선을 팔고 상선들은 식량이나 땔감 따위를 팔았습니다.

어선과 상선들이 뒤엉켜 서로 사고파는 해상시장이 파시의 출발이었습니다. 하지만 어선과 상선이 많아지고 어획량이 늘어나면서 시장이 차츰 어장 근처의 섬이나 포구 등으로 옮겨갔습니다. 파시는 어판장과 선구점, 음식점, 술집, 잡화점, 숙박시설, 각종 기관까지 갖추어진 임시 촌락으로 발전했고 어업 전진기지 역할을 겸했습니다. 파시는 조기, 민어, 고등어, 삼치 등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회유(回游)성 어류들로 인해 번성했습니다. 어선들은 산란장과 먹이를 찾아 회유하는 어군(漁群)을 쫓아다녔고 상인들은 어선들을 쫓아가며 장사를 했습니다.

청산도 고등어 파시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시작됐습니다. 해마다 6월부터 8월까지 고등어 군단이 몰려오면 청산도 도청리 포구에 파시가 섰습니다. 부산이나 일본의 대형 선단과 소형 어선들 수백 척이 드나들고 수천의 사람들이 북적거렸습니다. 한적하던 도청리는 일시에 해상 도시로 변모했습니다. 텅빈 해수욕장에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고 상가들이 번성하는 것과 같습니다. 선구점과 술집, 식당, 여관, 이발소, 목욕탕, 시계점 등의 임시 점포가 생겨 선원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습니다. 외지에서 온 상인들은 주민들에게 세를 주고 점포를 빌렸습니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이 색시 집이었지요.

술을 파는 색시 집에는 조선 기생뿐만 아니라 일본 게이샤들까지 있었다 합니다. 고등어 선단은 한 번 출어로 수십만 마리의 고등어를 잡아왔습니다. 운반선으로 다 처리하지 못할 정도로 많이 잡히면 일부는 바다에 버렸습니다. 도청리 앞바다는 고등어 썩는 냄새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주민들은 고등어를 얻어다 소금 간을 해서 간독에 저렸습니다. 그래도 남는 고등어들은 어비(퇴비)로 만들어 쓰기도 했습니다. 지금처럼 생선이 귀한 시절에 고등어 퇴비는 전설 같은 이야기지요.

일제 패망 후에도 계속되던 고등어 파시는 1960년대 중반 고등어가 고갈되면서 막을 내렸습니다. 하지만 삼치들이 몰려오면서 삼치 파시가 다시 맥을 이었습니다. 삼치는 잡히는 대로 일본으로 수출됐습니다. 청산도 앞바다에는 운반선 20여 척이 늘 대기 중이었습니다. 당시 청산도는 완도보다 더 중요한 해상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청산도를 기점으로 한 여객선이 목포로 2척, 부산으로 3척이나 다녔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이 하루 한 척도 제대로 배가 다니지 않던 시절이었습니다. 더 큰 섬인 완도 사람들도 청산도로 술을 마시러 오곤 했습니다. 지금은 채 3천 명도 못되지만 1973년 청산도 인구는 1만3천5백 명이나 됐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남획으로 삼치 또한 씨가 말랐고 1980년대 중반 청산도 파시는 막을 내렸습니다. 물고기떼가 사라지자 어선도, 사람도 함께 떠나가 버렸습니다. 다시 청산도는 한적한 섬이 됐습니다. 청산도 근해에서는 더 이상 물고기들이 잡히지 않습니다. 요즈음은 큰 배들이 제주도 부근 바다에서 싹쓸이해버리니 살아남아 청산도까지 올라오는 물고기도 드뭅니다. 잡는 어업은 초어단지를 이용한 문어잡이 정도만 명맥을 잇고 있지요. 이제 섬사람들은 전복이나 김, 미역 등 양식에 기대 살아갑니다.

▲구름 속에 보이는 신비로운 산, 청산도에서 마주한 한라산이다.Ⓒ섬학교


청산도의 신전, 당리 당집

겨울에는 슬로길을 걷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나그네는 내내 혼자 청산도 길을 걷습니다. 꽃피는 시절 청산도 길을 걷는 것도 좋겠지만 진정 고요하게 걷기에는 인적 드문 이 겨울보다 나은 때가 없습니다. 걷다보면 몸의 열기로 추위쯤이야 금방 물러갑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걷기에만 몰두할 수 있는 시간. 청산도는 온전히 나만의 섬이 됩니다. 나는 오직 내면의 나와 동행하면서 깊은 교감을 나눌 수 있습니다. 내가 듣지 못했던 내 안의 이야기가 들려옵니다. 비로소 사유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사유야말로 걷기가 주는 가장 귀한 선물이 아닐까요. 들판에는 겨울의 한복판을 뚫고 돋아난 청보리가 푸르러 갑니다.

언덕을 오르면 영화 <서편제> 속의 그 구불구불한 길이 나타납니다. 하지만 이 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은 시멘트로 포장돼 버린 서편제길이 아닙니다. 보리밭 가운데 서 있는 드라마 세트장도 아니지요. 그것은 바로 당리 당집입니다. 서편제길 초입 솔숲, 돌담에 쌓여 있는 낡은 건물이 당리마을의 당집입니다. 하지만 <서편제> 촬영지에 대한 안내판은 대문짝만하게 서 있는데 당집에 대한 안내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오랜 세월 섬사람들의 신앙의 성소였고 섬을 지키는 수호신을 모셨던 신전이 지금은 영화나 드라마 세트장만큼도 대접을 못 받고 있습니다.

저 당집이야말로 살아 있는 문화재가 아닌가요. 지나는 사람들 또한 영화 <서편제>나 드라마 <봄의 왈츠> 세트장만 찾을 뿐 당집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저 당집은 본래 한내구(韓乃九) 장군을 신으로 모셨던 신전입니다. 구전에 따르면 한 장군은 신라시대 청해진 장보고 대사의 부하였습니다. 한 장군은 청산도를 지켰고 주민들의 신망이 높았습니다. 한 장군이 노령으로 죽자 섬 주민들은 돌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 옆에 당집을 지어 수호신으로 모셨습니다.

청산면사무소 최민교 계장은 솔밭 당집 아래 돌무덤에서 옛날 동전이나 칼자루 같은 것을 줍기도 했던 어린 시절을 증언합니다. 무덤은 이미 일제 때 도굴되어 버렸습니다. 본래 당집에는 한 장군 신뿐만 아니라 부인 신까지 영정을 그려 함께 모셨더랬습니다. 그러나 지금 영정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봄 농사를 위해 논을 태우던 당리마을 할머니로부터 그 사연을 듣습니다.

"한압씨 함마이가 있었는디 어떤 놈이 불 처질러 부렀소. 아주 기분 나뻐서 죽을 뻔 했어요. 교회 다닌 놈이 그랬소."

과거 당집은 신성한 장소였습니다. 당집 앞으로는 상여 같은 부정한 것이 지나다니지 못했습니다. 말이나 가마를 타고 가던 이들도 당집 앞에서는 내려야 했습니다. 당리 마을 주민들은 지금도 해마다 정월 초사흗날이면 정성껏 당제를 지냅니다. 예전에는 한 해 동안 가장 정결하게 살았던 사람을 제주(祭主)로 뽑았었지만 지금은 이장님이 제주를 겸합니다. 제관은 제주인 이장님 포함 5명 정도가 맡는다 합니다.

제관으로 뽑히면 보름 전부터는 상가를 가거나 부부관계 등의 부정 타는 행위를 일체 삼가야 합니다. 제를 지내러 가는 날 길에서 다른 사람을 만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목욕을 하고 올 정도로 금기가 철저합니다. 많은 섬들을 다녔지만 청산도 당리 당처럼 아직껏 당제가 지내지는 곳은 희귀합니다. 참으로 소중한 문화유산이 아닌가요.

▲천년의 신전, 장보고 대사의 부하 한내구 장군을 모신 당집Ⓒ섬학교


왜구의 안마당이던 청산도

읍리의 고인돌이 증거 하듯이 청산도의 사람살이는 선사시대부터 고려 말까지 계속됐습니다. 하지만 고려말 조선초 공도정책으로 버려진 이 나라 대부분의 섬들처럼 청산도에서도 한동안 사람이 살 수 없었습니다. 이 섬에 사람살이의 역사가 다시 시작된 것은 임진왜란 직후입니다. 선조 41년(1608년) 경부터 주민 거주가 허락됐습니다. 숙종 7년(1681년)에는 수군 만호진이 설치돼 왜구와 해적들의 침략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가 됐습니다. 주민 거주가 금지된 청산도, 추자도를 비롯한 서남해안의 섬들은 임진왜란 전부터 왜구나 해적들의 소굴이었습니다.

“왜선 수척이 달량·청산도에 이르러 상선을 약탈하고, 무명 50필, 미곡 30여 석을 빼앗아 갔으며, 세 사람을 죽이고 일곱 사람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조선왕조실록> 성종 14년(1483년) 기사)

성종 21년(1490)에도 청산도와 추자도에 왜구가 나타났습니다.

“추자도·청산도에 들어가서 고기잡이와 해물 채취를 하며, 왜인들도 거기에서 고기잡이와 해물 채취를 하는데, 부근 제도에 정박하고 있는 배는 고기잡이배가 아니고 왜적이며….”

중종 27년 <실록> 기사는 왜구들이 청산도나 달량도, 추자도뿐만 아니라 보길도, 노화도 등까지 드나들며 수산물을 채취해 갔다고 전합니다. 전란 전부터 서남해 섬들은 이미 왜구들의 수중에서 농락당했으니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습니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 섬들은 왜구보다는 양반 관료와 아전들의 수탈에 시달렸습니다. 청산도라고 다르지 않았습니다. 장한철(1744-?)의 <표해록>에는 영조 시대의 청산도 모습이 생생합니다. <표해록>은 후일 대정 현감을 지내게 되는 제주도 유생 장한철이 향시에 합격한 뒤 과거를 보기 위해 육지로 향하던 중 표류 경험을 기록한 책입니다. 청산도에 표류한 장한철은 박중무란 사람 집에 머물게 됩니다. 당시 청산도는 이웃 섬 신지도진에 부속되어 있었습니다.

“이 섬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왕화(王化)를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북륙(北陸)에 사는 사람들이 이 섬에 들어와 작폐하는 일이 많습니다. 이진진의 아전 하나가 신은(新恩, 새로 문과에 급제한 사람) 한 사람을 거느리고 어제 저녁 이 섬에 들어와 혹은 이정(理正)을 몽둥이로 때려 주식(酒食)을 억지로 달라 하여 먹으며 혹은 남자 광대를 족쳐서 전재(錢財)를 빼앗기도 하는데 심지어 사람들의 농우(農牛)를 빼앗기까지 합니다.”

장한철은 청산도 사람들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소를 빼앗기고도 보복이 두려워 감히 송사를 벌일 생각을 못한다고 안타까워했습니다. 양반들의 수탈을 피해 섬으로 왔으나 수탈이 섬이라고 비켜가지 않았던 것이지요. 왕화(王化)를 입은 육지의 땅들도 다를 것은 없었겠지만 최소한의 감시마저 미치지 못하는 섬은 그 정도가 더했을 것은 불을 보듯 환합니다. 육지 사람들이 상상하는 유토피아는 섬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했습니다. 사람이 삶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고통 또한 그러합니다. 섬으로, 산 속으로 숨는다 해서 삶의 고통이 소멸되는 것은 아니겠지요.

▲영화 <서편제>의 무대가 됐던 길Ⓒ섬학교


청산도 큰 애기 쌀 서 말도 못 먹고 시집간다

이 들길의 마을들, 청계리와 원동리에는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논들이 남아 있습니다. 농경사회가 시작된 이래 이보다 더 절박한 농사의 유물이 또 있을까요. 구들장 논. 옛날에는 섬이나 뭍이나 귀한 것이 쌀이고 논이었습니다. 삿갓 놓을 땅만 있어도 논을 만든 것이 산간 지방의 ‘삿갓배미’고 비탈진 언덕에도 층층이 논을 만든 것이 남해 등지의 다랑이 논입니다.

청산도 또한 비탈진 땅이 많아 논을 만들기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저 구들장 논입니다. 축대를 쌓아 평지를 만들고 논바닥에 구들돌 같이 넓적한 돌을 깔고 개흙 칠을 해서 방수처리를 한 뒤 흙을 덮어 물을 가두고 논을 만들었습니다. 그토록 척박한 섬이었으니 “청산도 큰 애기 쌀 서 말도 못 먹어보고 시집간다”는 속담도 생겼을 것입니다.

지금이야 쌀값이 라면값보다 못한 세상이 됐지만 여전히 청산도에서 논은 귀하고 소중합니다. 논은 섬사람들을 먹이고 입힙니다. 청산도 겨울 들녘에는 볏단과 두엄더미들이 움막처럼 쌓였습니다. 두엄, 저 냄새 나는 똥거름을 쌀과 마늘, 유자와 꽃으로 바꾸어 주는 것은 땅입니다. 오로지 땅만이 똥냄새를 향기로 바꿀 수 있는 마법을 지녔습니다. 땅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발전소입니다. 육체를 살찌우고 영혼을 고양시키는 생명의 발전소.

청산도는 돌과 바람의 나라입니다. 상서리와 동촌리는 청산도에서도 돌담의 원형이 가장 잘 보존 되어있는 마을들입니다. 얼마나 다행인가요. 새마을운동이란 명목으로 초가집들이 불태워지고 수많은 돌담들이 헐렸습니다. 오래된 전통은 싸구려 근대화의 이름으로 철저히 짓밟혀 버렸습니다. 새마을운동 때 돌담을 헐어내고 세웠던 시멘트 블록 담은 불과 40년 세월을 못 버티고 시커멓게 썩어갑니다. 고흥 득량만의 섬들에서 나그네는 썩어 허물어져가는 시멘트 담들을 목격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청산도의 돌담들은 수 백 년 세월에도 여전히 견고하기만 합니다. 바람이 거센 섬의 돌담은 육지 내륙과 달리 흙을 넣지 않고 돌만으로 쌓은 강담입니다. 섬이나 해안가 집들은 모두 이런 강담이지요. 이 돌담은 바람을 차단하는 바람의 방어벽이 아닙니다. 아무리 견고한 돌담도 오랜 세월 큰 바람을 막아내기는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섬사람들은 바람을 막기 위해 돌담을 쌓지 않았습니다. 바람을 분산, 통과시켜주기 위해 돌담을 쌓았습니다. 허술해 보이는 돌담 사이에 흙을 채우지 않고 틈을 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바람과 섬사람들 사이에 생긴 평화 협정의 산물. 청산도 돌담은 바람의 통로입니다.

▲한겨울 찬서리 맞고 커서 달디단 청산도 봄동 밭Ⓒ섬학교


초분, 바람의 장례

노인 한 분이 천변의 논가에서 작년 여름 물난리에 무너진 축대를 다시 쌓고 있습니다. 겨울 청산도의 논에는 온통 마늘이 심어져 있습니다. 나그네의 눈에는 다 같은 마늘처럼 보이는데 노인은 논과 밭에 심는 마늘의 종자가 다르다고 말합니다. 청산도의 밭에는 주로 대만산 마늘을 심습니다. 하지만 논에는 대부분 ‘멍청이 마늘’을 심습니다. 멍청이는 욕이 아닙니다. 스페인산 마늘은 아무 데나 심어도 잘 자란다 해서 섬사람들이 붙여준 애칭입니다.

오늘, 섬의 땅 절반은 사자의 영토입니다. 밭에도 산 중턱에도 양지바른 곳이면 어김없이 무덤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저 묘의 주인 중 누군가는 표류해 온 제주 유생 장한철에게 밥과 술을 주기도 했을 것입니다. 구장리 마을 앞산, 어느 집안의 선산일까요. 초분 한 기가 땅 위에 떠 있습니다. 풍장, 초분은 마치 풀로 지붕을 덮은 배 같습니다. 이승을 떠났지만 초분의 주인은 땅속에 묻히지 못하고 땅 위에 모셔져 있습니다. 초분은 볏짚으로 이엉을 엮어 망자의 관을 덮었습니다. 볏짚은 삭을 대로 삭았습니다. 초분 주인의 후손들은 이엉을 푸른 그물로 씌우고 나일론 줄로 다시 묶었습니다.

지붕에는 솔가지가 드문드문 얹혀 있습니다. 솔가지를 꺾어다 올린 것은 무슨 연유일까요. 잘 썩지 않는 솔잎의 기운으로 부정한 것을 방지하기 위함일까요. 임시 주거지에서의 거주기간이 끝나면 초분의 주인도 이 선산의 어느 땅 한 모퉁이에 아주 터를 잡게 될 것입니다. 솔바람에 솔숲이 일렁입니다. 서로 멀지 않은 완도의 섬들도 초분을 쓰는 이유는 제각각이지요.

초분을 쓰는 것은 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물론 소나 개의 산달에 초상집을 가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나그네의 고향 섬 보길도에서는 집안의 큰 행사가 있는 해에 초상이 나면 초분을 썼습니다. 자녀의 결혼식 날짜를 받아놨는데 초상이 나는 경우가 그런 때입니다. 자식이 군대에 가 있을 때 초상이 나도 초분을 썼습니다. 하지만 청산도에서는 주로 설 명절을 전후해 초상이 나면 어김없이 초분을 쓴다합니다. 몇몇 사람만 참가해서 임시 장례를 치르는 것이지요. 정식 장례는 매장 때 다시 치르지요.

매장은 초분을 쓰고 3년이 지나야만 가능합니다. 풍수에게 길일을 받아서 매장을 하지만 그해 길일이 없다고 판명나면 또 3년을 기다립니다. 그래서 과거 어떤 초분의 주인은 십 몇 년씩이나 땅에 묻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초분은 풍장입니다. 풍장은 살이 풍화되고 남은 뼈만 추려내 매장을 하는 이중 장례 풍습이지요. 하지만 축대를 쌓는 노인이 들려주는 청산도의 풍장은 그것과 조금 다른 듯합니다.

“바람에 말라 수분이 쪽 빠지면 마른 장작 같이 되는디, 그 시신을 수습해 땅에 묻어라우.”

여름철 습기 많은 섬에서 방부 처리도 하지 않은 시신이 썩지 않는다는 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노인이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풍화되지 않고 미이라처럼 육신이 마르는, 그런 경우도 더러 있었던 것일까요, 이 섬에서는.

지금은 청산도를 제외하고는 섬 지방에서도 더 이상 초분을 보기 어렵게 됐지만 근자까지도 서남해의 섬에서는 초분이 흔했습니다. 뭍에서는 옛날에 사라진 이중 장제가 섬 지방에서 유달리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은 섬이란 폐쇄적 공간의 신앙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세계의 많은 지역에서는 여전히 이승과 저승 사이 강을 건너 죽은 자들이 저승으로 간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아프리카 요루바 족의 원로들은 저승으로 가는 강을 건너기 위해 카누에 태워 매장되기도 합니다.

섬사람들에게 바다란 현세 삶의 공간으로만 기능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는 섬을 집어 삼킬 듯 풍랑 거세던 바다가 오늘은 또 간데없이 평화롭습니다. 바다란 늘 삶을 이어주는 생명의 바다인 동시에 삶을 끊어버리는 죽음의 바다이기도 합니다. 삶을 건너는 일만이 아니라 죽음을 건너는 데도 배가 필요합니다. 삶과 죽음을 가르는 생사의 바다. 섬사람들은 그 바다를 건너게 해주는 연락선으로 초분을 만들어 이용했던 것은 혹시 아닐까요. 겨울 해는 노루꼬리처럼 짧습니다. 청산도에 다시 어둠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초분. 풍장의 풍습이 남아 있는 청산도는 민속의 보고이기도 하다.Ⓒ섬학교


2018년 3월 3(토)-4(일)일, 섬학교 제69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3월 3일(토요일)>
07:00 서울 출발 (0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섬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점심식사(완도읍내, 생선구이백반)
-완도항 출항
-청산도 도착
-청산도 걷기 첫째 날(8km)
청산항→당리당집→서편제길→화랑포삼거리→연애바위입구→모래남길(당리재)→서편제길 일몰→숙소
-저녁식사 겸 뒤풀이(숙소에서 해물정식과 생선회)
-취침, 휴식시간(다인실)

<3월 4일(일요일)>
06:00 기상. 아침산책
-아침식사(숙소에서 전복죽)
-청산도 걷기 둘째 날(7km)
권덕리→말탄바위→범바위→범바위주차장→칼바위전망대→공룡알해변(장기미)→범바위입구 삼거리→매봉산등산로입구→청계리중촌들샘→다랑치길(다랑이논)→슬로푸드체험관
-점심식사(청산항에서 백반)
-청산도 출항
-완도 도착
-완도어시장 장보기
14:40 서울 향발. 제69강 마무리모임
*상기 일정은 현지 사정에 의해 일부 변경될 수 있습니다.

▲3월의 섬학교 <청산도> 걷기 지도 Ⓒ섬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 모자, 선글라스, 장갑, 스틱,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또는 손전등), 세면도구, 세수수건, 멀미약,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승선용 신분증을 꼭 지참하세요(지참하지 않으면 승선할 수 없습니다).

<참가신청 안내>
★포털사이트 검색창에서 '인문학습원'을 검색해 홈페이지로 들어오세요. 유사 '인문학습원'들이 있으니 검색에 착오없으시기 바라며 꼭 인문학습원(huschool)을 확인하세요(기사에 전화번호, 웹주소, 참가비, 링크 사용을 자제해 달라는 요청이 있어 이리 하니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홈페이지에서 '학교소개'로 들어와 '섬학교'를 찾으시면 기사 뒷부분에 상세한 참가신청 안내가 되어 있습니다^^
★인문학습원 홈페이지를 방문하시면 참가하실 수 있는 여러 학교들에 관한 정보가 있으니 참고하세요. 회원 가입하시고 메일 주소 남기시면 각 학교 개강과 해외캠프 프로그램 정보를 바로바로 배달해드립니다^^
★섬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섬 여행을 떠나기 전에 강제윤 교장선생님이 쓴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섬을 걷다> <걷고 싶은 우리 섬> <어머니전> 등 섬 답사기를 참고하면 섬 여행의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입니다.

▲무덤 앞의 동자석Ⓒ섬학교


[학습자료]
[청산도] 청산도는 전남 완도군 청산면의 중심 섬이다. 면적 33.3㎢, 해안선 둘레는 85.6km이며 최고봉은 매봉산(384m)이다. 완도에서 남쪽으로 19km, 뱃길로는 45분 거리다. 주변의 장도(長島)·대모도(大茅島)·소모도(小茅島)·여서도(麗瑞島)가 청산면에 소속된 섬들이다. 동백나무·후박나무·곰솔 등의 난대림이 무성하다. 다도해해상국립공원에 포함되어 있다. 전복, 김, 미역 양식 등을 한다. 산과 바다가 유난히 푸르러 청산(靑山)이란 이름을 얻었다 한다. 한때는 신선이 살고 있는 섬이라고 하여 선산(仙山)으로 부르기도 했다.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으나 여말선초 남해안에 왜구의 출몰하면서 사람의 거주가 금지됐다. 다시 사람의 거주가 허락된 임진왜란 직후인 1608년(선조 41년)부터다. 1681년(숙종 7년)에 수군 만호진(水軍 萬戶鎭)이 설치되었고 1866년(고종 3년)에는 청산도에 당리진(堂里鎭)이 설치되어 강진, 해남, 완도 일대를 관장하기도 했었다.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가 이곳에서 촬영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슬로시티로 지정되고 슬로길이라는 걷기 길이 생기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섬이 됐다. 막개발과 난개발의 광풍으로부터 비켜나 있었던 까닭에 옛 모습이 제대로 보존된 보기 드문 섬이다.

[청산도 고등어파시] 서해에 연평도 조기파시가 있었다면 남해에는 청산도 고등어파시가 있었다.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로 중요한 파시였다. 청산도 고등어파시는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부터 시작됐다. 해마다 6월부터 8월까지 고등어 군단이 몰려오면 청산도 도청리 포구에 파시가 섰다. 부산이나 일본의 대형 선단과 소형 어선들 수백 척이 드나들고 수천의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한적하던 도청리는 일시에 해상 도시로 변모했다. 텅 빈 해수욕장에 여름이면 피서객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고 상가들이 번성하는 것과 같았다. 선구점과 술집, 식당, 여관, 이발소, 목욕탕, 시계점 등의 임시 점포가 생겨 선원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외지에서 온 상인들은 주민들에게 세를 주고 점포를 빌렸다. 그중 가장 많은 것이 색시 집이었다. 술을 파는 색시 집에는 조선 기생뿐만 아니라 일본 게이샤들까지 있었다. 고등어 선단은 한 번 출어로 수십만 마리의 고등어를 잡아왔다. 일제 패망 후에도 계속되던 고등어파시는 1960년대 중반 고등어가 고갈되면서 막을 내렸다. 하지만 삼치들이 몰려오면서 삼치파시가 맥을 이었다. 삼치는 잡히는 대로 일본으로 수출됐다. 청산도 앞바다에는 운반선 20여 척이 늘 대기 중이었다.

[미항길] 미항길은 청산면 소재지인 도청리 포구를 따라 가는 길이다. 도청항은 청산도의 관문이다. 과거 도청리는 파시로 유명세를 떨치던 곳이다.

[동구정길] 도청항에서부터 <서편제>와 <봄의 왈츠> 촬영장까지의 길은 청산도의 상징 같은 길이다. 자연석으로 쌓아 만든 담장과 함께 4월에는 유채꽃과 청보리가 어우러진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한다. 특히, 영화 <서편제>에서 ‘진도아리랑’ 장면을 촬영한 길로 유명하다.

[사랑길] 당리 화랑포에서 구장리 앞개까지 이르는 길은 해안절벽을 따라 놓인 길로 탁 트인 해안절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 길을 걷다보면 섬 지역의 장례풍습인 초분(관을 짚이나 풀로 엮은 이엉을 덮어 두었다가 2~3년 후 남은 뼈를 씻어 땅에 묻는 무덤)도 볼 수 있다.

[낭길] 구장리의 갯돌해안(읍리앞 갯돌)은 모래 없이 갯돌로만 이루어진 해변으로 맨발로 걸으면 둥글둥글한 갯돌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절벽을 따라 난 길이라 하여 ‘낭길’이라 부르는데 뛰어난 해안경관을 자랑한다.

[당리 당집] 서편제길 초입의 당리 당집. 당리 당집은 본래 한내구(韓乃九) 장군을 신으로 모셨던 신전이다. 구전에 따르면 한 장군은 신라시대 청해진 장보고 대사의 부하였다. 한 장군은 청산도를 지켰고 주민들의 신망이 높았다. 한 장군이 노령으로 죽자 섬 주민들은 돌무덤을 만들어 주고 그 옆에 당집을 지어 수호신으로 모셨다.

[서편제 촬영장
] 한국영화 최초로 1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서편제>의 주요 명장면을 촬영한 세트장과 <진도아리랑>을 부르던 구불구불한 돌담길이 유명하다.

[봄의 왈츠 촬영장] <겨울연가>에 이어지는 KBS 유명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한 세트장과 계절별 청보리밭, 유채꽃밭, 코스모스길이 그림처럼 그려지는 길이 장관이다.

[화랑포] 화창한 날씨에 바라다 보이는 앞바다의 파도가 마치 꽃처럼 보인다 하여 화랑포라 부르며, 옛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다 한다.

[범바위길] 권덕리를 지나 보적산 8부 능선을 오르는 길에 범바위가 있으며, 호랑이가 바위를 향해 포효를 했더니 바위의 울림이 호랑이 울음소리보다 크게 울려 호랑이가 놀라 도망갔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여서도와 제주도까지 볼 수 있고 남해의 풍광을 한 눈에 담을 수 있는 길이다.

[용길] 장기미 해안은 몽돌로 이루어진 해안으로 그 옆으로는 계곡물과 해수가 공존하는 특이한 풍경을 볼 수 있음. 청산의 곡창지대로 불리는 청계리와 원동리는 구들장 논(구들을 깔듯 논바닥에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쌓아 만든 논)이 펼쳐진 곳으로, 어족자원은 풍부했으나 쌀이 귀했던 시절 한 줌 흙마저 아껴 농사를 지어야 했던 섬사람들의 생존방식을 느낄 수 있다.

[돌담길/들국화길] 상서리 돌담은 2006년 등록문화제 제279호로 지정되었으며 운치 있는 돌담은 동촌리까지 이어짐. 동촌리에서 항도로 이어지는 길은 방파재로 연결되어 있으며 갯바위 낚시를 즐기거나 시원한 파도소리를 들으며 마음의 평온을 찾을 수 있는 길이다.

[초분] 풍장의 한 방식으로 일종의 풀무덤이며, 섬 생활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전통장례풍습이다. 시신 또는 관을 땅 위에 올려놓은 뒤 짚이나 풀로 엮은 이엉을 덮어 두었다가 2~3년 후 남은 뼈를 씻어(씻골) 땅에 묻으며 청산도 주민들의 장례풍속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원이다. 청산도에서는 주로 설 명절을 전후해 초상이 나면 어김없이 초분을 쓴다. 몇몇 사람만 참가해서 임시 장례를 하는 것이다. 정식 장례는 매장 때 다시 치른다. 매장은 초분을 쓰고 3년이 지나야만 가능하다. 풍수에게 길일을 받아서 매장을 하지만 그해 길일이 없다고 판명나면 또 3년을 기다린다. 그래서 과거 어떤 초분의 주인은 십 몇 년씩이나 땅에 묻히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초분은 풍장이다. 풍장은 살이 풍화되고 남은 뼈만 추려내 매장을 하는 이중 장례 풍습이다. 지금은 청산도를 제외하고는 섬 지방에서도 더 이상 초분을 보기 어렵게 됐지만 근자까지도 서남해의 섬에서는 초분이 흔했다. 뭍에서는 옛날에 사라진 이중 장제가 섬 지방에서 유달리 오랫동안 이어져 온 것은 섬이란 폐쇄적 공간의 신앙행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읍리 고인돌] 문화재자료 제116호. 지석묘는 청동기 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청산도에는 고인돌 밑에 기둥이 없는 남방식 고인돌인 지석묘가 있으며 총 16기중 현재는 3기만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하마비] 문화재자료 제108호. 민간신앙과 불교가 결합한 신앙물로 자연석에 부처를 새겼는데 아무리 지체 높은 사람이라도 이 앞을 지날 때에는 반드시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 했다고 전한다.

[읍리앞 갯돌] 구장리 인근의 읍리앞개는 동글동글한 갯돌로 이루어진 해변

[구들장논] 구들을 깔듯 논바닥에 돌을 깔고 그 위에 흙을 쌓아 만든 구들장 논은 섬사람들의 지혜가 담긴 청산도의 전통 농경 형태이다. <강제윤 교장선생님>

[섬학교]

강제윤 교장선생님은 섬왕국 전라남도의 <가보고 싶은 섬>가꾸기 자문위원이며 사단법인 섬연구소 소장으로, 섬들의 고유한 문화와 가치를 지키고 보존하는데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1988년 계간 <문학과 비평> 겨울호로 등단했습니다. 서남해의 아름다운 섬 보길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뭍으로 이주해 살다 성인이 된 뒤 다시 고향 섬으로 돌아가 10여 년을 살았습니다. 보길도 시절에는 하천 정비를 명목으로 보길도의 숲과 하천을 파괴하려는 시도를 막아냈고, 고산 윤선도 유적지를 파괴하고 대형 댐을 건설하려는 토목세력에 맞서 33일간 단식으로 섬을 지켜내기도 했습니다.

2005년 보길도를 떠난 뒤에는 한국의 모든 유인도(500여 개)를 걸어서 순례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13년째 섬들을 걷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400여 개의 섬을 걸었고 여전히 섬을 걷고 있습니다. 프레시안에 <섬을 걷다> <통영은 맛있다>, 한겨레에 <섬에서 만나다>를 연재했습니다. <당신에게, 섬> <섬택리지> <걷고 싶은 우리 섬> <통영은 맛있다> <어머니전> <섬을 걷다> <그 별이 나에게 길을 물었다> <보길도에서 온 편지> <숨어사는 즐거움> <올레, 사랑을 만나다> <부처가 있어도 부처가 오지 않는 나라> <자발적 가난의 행복> 등의 저서가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섬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얘기합니다.

우리는 모두 바다로부터 왔습니다. 지구 최초의 생명이 바다에서 잉태됐듯이 우리 또한 어머니의 자궁이라는 바다에서 생명활동을 시작합니다. 생명의 원천인 바다. 바다를 보면 막혔던 숨통이 트이고 평온함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어머니 바다, 그래서 프랑스어 ‘어머니[mère]’에는 ‘바다[mer]’가 들어 있고 한자의 ‘바다[海]’에는 ‘어머니[母]’가 들어있습니다. 원초적 기억이 언어를 통해 우리의 기원을 암시해 줍니다. 어머니의 품처럼 너른 바다. 우리가 섬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실상은 바다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는지요.

바다나 강, 호수 등의 물로 둘러싸인 육지의 일부를 섬이라 합니다. 한국에는 4,400여 개의 섬이 있습니다. 그중 사람이 사는 유인도는 500여 개, 나머지는 무인도입니다. 한국은 ‘섬나라’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섬은 미지의 세계입니다. 방송 매체 등을 통해 섬들이 소개되고 몇몇 섬들이 피서지나 관광지로 유명세를 타면서 섬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대부분의 섬들은 척박함과 절해고도의 고독과 유배지, 그도 아니면 현실도피적인 낭만의 이미지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섬은 여전히 먼 곳으로만 느껴집니다. 수만 리 먼 나라들을 자유롭게 오가면서도 바로 우리 곁의 섬들을 멀게만 느끼는 것은 왜일까요. 단지 물리적 거리 때문이 아닙니다. 심리적 거리감이 더 큰 요인입니다. 그것은 오랜 세월 이어져온 육지 중심의 사고에 기인한 바 큽니다. 불과 이삼십 년 전까지만 해도 육지 사람들은 섬사람들을 ‘섬놈’이라 부르면서 멸시하곤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뿌리는 조선왕조의 폐쇄적인 해양정책에 잇닿아 있습니다. 본래 우리의 인식은 육지 중심의 편협한 틀에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옛날 이 땅의 사람들은 바다를 이용해 세계와 소통했습니다. 세계로 향하는 통로로 기능했던 바다가 단절의 바다로 전락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입니다. 고려와는 달리 조선은 명나라의 해금(海禁)정책을 추종해 적극적인 ‘공도(空島)’정책을 폈습니다. 섬과 바다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 이전까지 바다와 섬은 육지보다 더욱 활력 넘치는 삶의 터전인 동시에 문명교류의 중심 공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수백 년 동안 섬에 사람이 살지 못하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계속되면서 바다와 섬은 점차 잊혀지고 버림받은 공간이 됐습니다. 사람의 거주가 시작된 이후에도 섬은 유배지로 이용되면서 고립이 심화됐습니다.

해양왕국이었던 백제나 장보고의 청해진이 바다와 섬을 기반으로 세계와 소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1976년 거문도의 장촌마을 해변에서는 한(漢)나라 때의 화폐인 오수전이 다량 출토되었습니다. 외딴 섬처럼 보이는 거문도가 실상은 고대부터 국제해상교류의 중간 기착지였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2000년에는 흑산도의 읍동마을에서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이어진 국제해양도시의 흔적들이 확인된 바 있습니다. 고려시대 예성강 입구에 있던 벽란도는 개경에 출입하는 외국인들이 통관 절차를 밟던 국제무역항이었습니다.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우리는 바다와 섬을 통해 일본과 중국은 물론 동남아, 인도, 아라비아까지 소통했습니다. 이 땅이 세계를 향해 열려 있을 때 언제나 그 중심에는 바다와 섬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이 좁은 것은 알면서도 우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 줄은 잘 모릅니다. 오랫동안 좁은 땅에 갇혀 살면서 몸도 마음도, 시야도 폐쇄적으로 변해버린 까닭입니다. 섬에서는 우리가 얼마나 넓은 바다의 주인공인가를 금방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섬에서 바라보면 대륙 또한 바다에 둘려 쌓인 큰 섬에 지나지 않습니다. 육지 중심의 사고를 벗어나는 순간 우리는 충분히 크고 드넓습니다. 섬은 한없이 넓은 바다를 향해 무한히 열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섬이야말로 우리가 잃어버린 개방성과 열린 사고를 되찾기 위한 최적의 사유공간입니다. 물론 섬은 숙명적으로 외롭습니다. 하지만 섬사람들에게는 외로움이나 슬픔마저도 흥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해학과 가락이 있습니다. 섬에서는 슬픔도 가락을 타면 흥이 됩니다.

오랜 세월 섬들은 제각각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이어 왔습니다. 곁에 있는 섬도 같은 섬은 없습니다. 하지만 외래문물의 유입으로 많은 섬들이 원형질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멀지 않은 시간에 이 나라 많은 섬들이 사라질 것을 예감합니다. 이미 많은 섬들이 육지와 연결되었거나 연결되고 있습니다. 다리가 놓이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배를 타고 섬으로 가는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릅니다. 끝내는 소멸해 버릴 섬들, 섬의 풍경들. 더 늦기 전에 섬으로 가야 할 이유입니다.

몇 년째 걷기 열풍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움직이는 존재’[動物]인 사람이 걷고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걷기에 대한 열망은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본능의 회복운동입니다. 걷기는 길에 대한 갈망에서 비롯된 바 큽니다. 길의 본뜻은 무엇일까요. 한자 ‘길道(도)’자는 辵(착)과 首(수)로 이루어진 회의문자(會意文字)입니다. 그래서 언젠가 고(故) 신영복 선생님은 "辵(착)은 머리카락 휘날리며 사람이 걸어가는 모양이며 首(수)는 사람의 생각을 의미하니 길(道)이란 곧 사람이 걸어가며 생각하는 것"이라고 풀이한 바 있습니다. 저는 그 뜻을 길이란 통로인 동시에 사유의 길이고, 사유를 통해 자신과 소통하고 세계와 소통하는 길이란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러한 길의 정신을 구현하기에 섬보다 더 좋은 곳은 없을 것입니다.

섬은 어느 곳보다 걷기 좋은 공간입니다. 아직까지 ‘섬길’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많은 걷기 길들이 만들어지고 있지만 섬은 부러 돈 들여 걷기 길을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대부분의 섬들은 그 자체로 최상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섬에서는 사람이 안심하고 걸으며 사유할 수 있습니다. 섬길을 걷는 일은 분명 이 시대의 정신을 비옥하게 하는 소중한 토양이 될 것입니다. 섬으로 가야 할 또 하나의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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