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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세습'은 왜, 어떻게 가능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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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세습'은 왜, 어떻게 가능했나

[김정은의 북한] <中> 유일사상과 신민 역사의 산물

☞ <上> 황장엽이 솔제니친? 김정은이 '청년대장'?

그렇다면 성패(成敗)를 떠나 우리는 어떻게 김씨 왕가 3대 세습 기도를 설명하고 이해해야 할까? 나는 몇 가지 북한 안팎의 특수성, 고유성 차원에서는 어느 정도 이해와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주체사상(유일사상), 정치문화와 역사, 남북의 정치·군사·경제· 사회 격차, 주변 및 국제세력 역학구도 특히 북중관계라는 크게 네 가지 잣대로 설명할 수 있다고 본다.

육체적 생명과 사회정치적 생명

세계 공산당 집권사에서 전례가 없는 김일성-김정일 부자 세습의 직접적 동인(動因)은 김일성이 겪은 세 개의 심리적·정치적 큰 충격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스탈린이 1953년 3월 5일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흐루시초프(1894-1971)가 과도기·혼란기를 거쳐 1956년 2월 25일 제 20차 소련 공산당대회 비밀 연설에서 스탈린의 독재와 우상화(偶像化, personality cult)를 맹비난하며, 스탈린 격하운동(de-Stalinization)을 시작한 것이 김일성의 첫 충격이다.

그의 두 번째 충격은 중국 공산당 주석 마오쩌뚱(1893-1976)의 사망으로 정치혼란기 동안 서서히 제1인자로 세력을 다지며 사실상의 최고실권자로 등장한 덩샤오핑(1904-1997)이 1977년 문화혁명을 폐기한 것에서다. 1982년 중국공산당 중앙위 공개보고서에서 마오쩌뚱이 "일곱 가지는 좋았고, 세 가지는 나빴다"는 비유로 마오의 우상화, 문화혁명, 마오의 세 번째 처 장칭(江靑) 등 문화혁명 4인방을 비판하며 사실상 마오 격하운동을 전개한다.

세 번째는 1989년 10월 베를린 장벽의 붕괴, 1990년 초의 동구 공산권과 소련공산당 정권의 소멸이라고 하겠다.

따라서 김일성은 그가 죽은 뒤에도 일어날 수 있는 김일성 격하운동과 북한 노동당 정권 와해의 사전 예방차원에서 아들 김정일 후계자 구축 기획을 구체화하고, 소련·동구 공산권 붕괴 과정과 맞물려 이를 가속화한다.

구체적으로 김정일은 1964년 조선 노동당 가입, 1973년 2월 사상, 기술, 문화 3대 소조운동과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의 실무지도자로, 또 같은 해 9월 조선노동당 5기 7차 전원회의에서 그의 삼촌 김영주의 자리도 앗아 조직·사상 담당비서가 된다.

1974년 2월 조선노동당 제5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을 정치국위원으로 추대하고 "김정일 동지를 주체혁명위업의 위대한 계승자로 당과 혁명의 영명한 지도자로 높이 추대하였다"고 밝힌다. 이를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6차 당대회에서 이를 공식화하고, 사실상 제 2인자, 후계자로 자리를 굳힌다. 11년 뒤인 1991년 12월 24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6기 19차 전원회의에서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으로 추대된다. 1992년 4월 9일에는 국방위원회가 군 전면 통수권을 장악하도록 헌법을 개정, 김정일이 국방위원장이 된다. 간추리면, 김일성-김정일 후계구축 과정은 아버지 김일성의 철저한 계획과 지휘하에 진행되었고, 그 시간도 김정일 노동당 입당에서 1994년 7월 김일성 급사(急死)까지를 계산하면, 꼭 30년이 걸린다.

이제 김일성-김정일에 이어 김정일-김정은 3대까지 "김씨 왕가"의 세습이 시작하는 소용돌이에 접어들었다. 이 세습을 뒷받침, 정당화·합리화하는 이론적 근거는 주체사상의 "수령"이론과 "정치적 생명" 개념 등 이른바 "유일사상"이다.

김일성의 "주체 사상"은 그의 안팎의 권력 역학 구도의 변화 속에서, 안으로는 그의 일인 권력 집중화 구축과정에서의 반대세력 제거, 축출, 숙청과 권력세습을 이룩하기 위에서, 밖으로는 중소분쟁과 갈등 속에서 국익을 최대한 챙기기 위해서 그 내용이 크게 세 번 바뀐다.

처음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까지는 주체 사상-정치적 자주, 군사적 자위(自衛), 경제적 자립-은 "비외세(非外勢) 자주"를 앞장세워, 북 권력 내부의 친 소 세력(소련파), 그 다음엔 친중 세력(연안파)을 숙청하고 제거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1960년대 말 70년대, 중소분쟁의 심화, 격화 혼란 속에서는 "등거리 자주"를 내세워, 그의 주체사상은 집안 단속과 함께 중·소에 양다리를 걸치며 국익(國益)을 최대화하는 도구로 변모한다.

세 번째는 197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로,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첨예화·영속화하는 "수령론"과 김일성-김정일 부자 후계체제를 정당화·합리화하기 위한 "정치 생명체" 개념을 개발, 북한 인민 세뇌와 선전 홍보의 도구로 이용한다. 구체적으로, 1974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9차 전원회의는 이른바 "유일사상체계의 10대 원칙"을 채택한다. 제1원칙은 "위대한 수령[김일성]의 혁명사상으로 전체사회를 일색화하기 위해 목숨 받쳐 투쟁해야 한다"고 명시한다.

그리고 바로 제8원칙 수령으로부터 부여된 정치적 생명을 소중히 지키고 수령의 커다란 정치적 신임의 배려에 대하여 높은 정치적 자각과 기술에 입각한 충성으로 보답해야 한다"와 제10원칙 "수령이 개척한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여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10대 원칙을 김정일은 1986년 2월 15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의 담화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에서 보다 구체화한다.

간단히 요약하면, 인간은 개인으로서는 "생명유기체"이고, 집단으로서는 "사회적 존재"라는 김정일의 "인간관"이다. 인간의 생명은 개인은 "육체적 생명"을, 집단으로서는 "사회정치적 생명"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 개인의 육체적 생명은 부모로부터 부여받아 유한하지만, 사회정치적 생명은 어버이수령(김일성)으로 부여 받아 "영생불멸"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북한 밖에서 궤변과 사교(邪敎)로 일축, 비난하거나 말거나 북한 집권세력과 주민은 김씨 왕가 3대 세습을 이 "수령론"과 "사회정치적 생명" 개념으로 정당화·합리화하고 있는 것이 북의 현실이다. 그 실상의 한 단면이다.

이 주체사상 3차 변모 과정에도 황장엽이 앞장서서 그 "언어 연금술사"로 "대부" 역할을 했는지는 내 스스로 확인하지 못했다. 하지만 주체사상의 3차 변모과정에서, 그리고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후계자"가 된 1980년 조선 노동당 6차 전당대회에서 황장엽이 처음으로 당 비서국 국제담당 비서 서열 8위로 일약 부상, 발탁된 것이 주목된다.

신민(臣民) 역사와 정치문화

3대 세습을 낳게 된 또 하나의 간접적 배경은 북한만이 갖고 있는 고유의 신민(臣民)역사전통과 신민정치문화(subject political culture)다.

북한의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다. 하지만 1948년 9월 9일 국가가 출범한 이후에도, 그 이전에도 북녘에는 "민주주의"도 "공화국"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전에는 35년 일제 식민통치가 있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이씨 500 여 년 왕조사(王朝史)가 있고,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가도 마찬가지다. 대한민국도 공화국 출범 이전은 똑 같다. 일제 강점기 우리 민족의 3.1 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활동, 법통 등 큰 틀에서의 항일 투쟁사도 남북은 공유한다.

하지만 1948년 이후로는 남과 북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지난 60 여 년 동안 남과 북은 거의 완벽하게 서로 다른 정치, 경제, 사회, 안보/국방의 길을 걷고 있다.

대한민국 출범 이후 지난 60여 년 동안 남녘에는 비민주권위주의 정권, 권위주의 군사독재, 유신독재 정권에의 항쟁 등 오랫동안 어둡고 어려웠던 시대를 극복한 자유민주주의 투쟁사가 있다. 그 북새통에서 그 동안 대한민국 국민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자유 민주국가로서 여야 정권교체의 정치전통도 뿌리를 내렸고, 민주시민 정치의식과 경험도 쌓았다. 또 우리 국민의 자율적인 시민사회 영역도 많이 커졌다. 2차 대전 뒤 새로 태어난 나라로서는, 더구나 남북분단과 한국전쟁의 폐허를 딛고 일어 선 나라치고는 자랑과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을 만큼 인권, 민주주의, 국부(國富), 국력 모두 놀랄 만큼 커졌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북한에는 자유민주주의 투쟁사, 전통, 경험이 없다. 북한 주민의 자유민주시민 의식, 정치문화도 없다. 북녘엔 시민사회도 물론 존재할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 않는다. 1948년 이후로 북한도 겉으로는 왕조가 아닌 "공화국" 모양새를 갖췄지만, 북한 주민에겐 지난 60여 년 동안에 오직 김일성-김정일 부자만을 일제시대의 "일왕"(日王)이나 이조 시대의 임금처럼 모시고 섬기는 역사, 전통과 경험만 쌓았다. 그 속에서 김일성-김정일은 이제까지 북한 인민 앞에 처음엔 "왕과 왕자처럼," 김일성 사망 후엔 "제 2대 왕"처럼 군림했던 것이다.

이제 김정은까지 "왕세자"로 등장시킴으로써 북녘 바깥 세상 사람들, 특히 대한민국 국민을 포함, 세계 자유민주 시민들에게는 김씨 왕가 3대 세습이 생소하고 극히 비정상적이고 왕정복고적 행태로 보이지만, 절대다수 북한 지배층과 주민에겐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이 바로 북녘이 안고 있는 비극이다.

바깥 사람들은 믿기 어렵지만, 북한 집권층과 인민에겐 김일성 왕가의 시조(始祖), 김일성은 그 헌법이 명시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영생불멸의 주석"일 뿐만 아니라, 그냥 사람이 아니라, "신인"(神人, demigod)이자, 육신(肉神, corporeal god)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이 주기도문 외우듯이, 아무리 주체사상을 내세워 인민대중이 "혁명과 건설의 주인"이라고 북한 주민 모두가 줄줄이 외워도, 그것은 한갓 구호일 뿐, 현실은 김일성-김정일 그리고 극소수의 집권세력이 주인이고, 인민은 신민(subject)일 뿐이다.

북한 주민은 스스로 나라의 최고 권력자를 뽑을 수 있다는 주권재민의 자유민주시민 정치의식도, 경험도 없다. 자유민주시민으로서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말도 안 된다"라고 외치며 그의 권리를 찾고, 행사할 수 있는 자유, 시민의식, 경험, 힘과 조직이 없다. 북한 주민을 무지로 몰고, 무력화, 무기력화하는 지배세력의 거대한 통제, 동원, 선전선동기구와 조직 속에 인민은 한갓 "기계부품"처럼 움직일 뿐이다. 모래알처럼 미미하고 무기력하다.

물론 최고인민위원회의 대의원과 도, 군, 리 단위 인민위원회 대의원 선거에 북한 인민대중이 참여한다. 그러나 이는 위로부터 이미 정해진 후보들을 "선거"라는 이름으로 행사하는 의식행위, 요식행사일 뿐이다. 그 동안 "100% 투표, 100% 찬성표"라는 북한 식 선거 조작 모형만을 만들어 냈다.

주체사상은 인민이 주인이 아니라 김일성 왕가만이 북한 주인이고, 사상이 아니라 왕가 권력 세습화, 영구화의 세뇌, 홍보선전도구다. 북한 3대 세습 기도를 달리 해석하자면, 주요 정책 결정이론의 하나인 미국 등 서구의 "집단사고 증후군"(groupthink syndrome)과는 정반대로 하나의 "자기도취사고 증후군(narcissism syndrome)이라고도 해석할 수도 있겠다.

집단사고 증후군은 개인의 자유의사가 보장되었는데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병적인 심리와 행태고, 자기도취사고 증후군은 일인 절대권력자의 "자유"와 극소수의 지배집단만이 누리는 "특권" 속에서 나타나는 병리현상과 변태라고 할 수 있겠다.

집단사고 증후군이 "남이 장에 가면, 나도 거름지고 따라간다"는 우리 속담을 닮았다면, 자기도취사고 증후군은 "남들이 뭐라고 떠들든 말든 우리는 수령을 신주(神主)처럼 받들어 모시고, 우리식대로 간다는" 막무가내다.

하지만 세 가지 의문은 아직도 남는다. 북한 주민의 이러한 신민의식과 행태는 철권정치가 낳은 단순한 불가항력적인 면종복배(面從腹背)인가? 아니면 그 동안 지배세력의 세뇌, 홍보, 선전공작의 성공(?)으로 그러한 의식구조와 행태가 알게 모르게 습관화 한 것인가? 아니면 겉으로만 그러는 척하고, 속은 딴전을 부리는 것이 북한 인민이 그 체제, 그 정권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인가는 또 다른 문제다.

한마디로, 김 씨 왕가 3대 세습은 수령론과 정치적 생명 개념을 주민에게 철두철미하게 조직적으로 세뇌한 신민역사, 신민 정치문화라는 북녘의 토양에서만이 가능한 이야기다.

딴 판, 딴 사람, 딴 세상이니

셋째로, 남한이 이제 북한보다 비교도 안될 만큼 더 자유스럽고, 더 잘 살고, 더 살기 좋다는 것을 아는 김정일과 지배층의 불안감과 공포다. 이러한 날로 벌어지는 남북 격차의 소식과 정보가 북한 주민에게 널리 퍼지게 되면, 이 것이 북한 주민의 "상대적 박탈감"(relative deprivation)으로 이어지고, 다시 불평·불만·분노가 되어 터질 수도 있다는 북한 지배층의 고민·우려·불안·공포다.

또 주민의 불평·불만·분노가 지배층의 분열로 접목될 때의 "폭발적"인 상황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도 큰 몫을 하고 있다고 본다. 더구나 남쪽 사람의 정치적 자유, 경제적 부유(富裕), 사회적 자율이 커지고 넓어질수록, 즉 남북의 이러한 격차가 심화하면 심화할수록, 북한 지도자와 지배층의 불안, 초조감, 공포도 커질 수밖에 없다.

북한 지도자와 지배층은 다시 이 불안감과 공포를 북한 체제, 정권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게 된다. 따라서 북한 체제와 정권붕괴를 막는 유일한 대안은 현 지도세력과 인민이 수령론과 정치생명체 개념 즉 유일사상으로 "정신무장"하여, 물샐틈없이 김 씨 왕가 지도자(김일성-김정일-김정은)를 중심으로 철두철미 똘똘 뭉치는 것이 이들 소수 지배 특권층이 갖고 있는 불안·공포·위협을 막는 "최상, 최고의 해법"이라고 보고 있는 것이다.

이를 북한 주체사상의 3대 원칙, 자주, 자립, 자위 개념으로 풀이해보면, 더 명확해진다. 정치적 자주는 거꾸로 중국과의 밀착과 거의 일방적 의존을 가속화하고 있다. 솔직히 미 전 부시 정부와 현 이명박 정부는 이 밀착과 의존을 가속화 하는데 보탬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씨 조선 태조 이성계(재위, 1392-1398)가 당시 중국 명(明)나라를 종주국으로 삼고, 국호(朝鮮)와 왕위의 승인을 명나라로부터 받은 친명사대(親明事大) 정책을 가볍게 비판할 수도 있지만, 오늘의 국제관계, 국제정치 잣대로 보면, 14세기型 현실주의의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아무튼, 김일성-김정일의 정치적 자주가 북·중 밀착으로 "순치(脣齒) 동맹" 관계를 과시하려는 등 정치적 자주와 독립과는 동떨어진 21세기형 "친중사대"로 끌려가고 있다면, 14세기 친명사대를 방불케 하는 우려되는 상황이다.

경제적 자립(autarchy)도 마찬가지다. 북의 자립·자력갱생은 거꾸로 국제경제권에서 고립과 궁핍을 자초했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아프리카, 동남아, 중동, 서남아, 라틴 아메리카의 최빈국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빈곤과 굶주림의 굴레에서 아직도 허덕이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위 최빈국과 하나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 북한의 국방이다. 북은 남과의 군비경쟁(군사비 총량)에서 1970년대 중반을 계기로 남한에 밀리는 상황에 다다른다. 이 격차를 메우기 위한 대한으로 핵, 미사일개발 등 "비대칭(asymmetric) 군사력 개발"에 박차를 가 한다. 그 결과 2006년, 2009년 두 차례 플루토늄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 강행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지구촌 다른 찰 가난한 나라와는 달리 북한은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을 휘두르는 거지"라고 서방 언론이 비꼬는 상황이다.

다시 말하면, 한반도 국토 분단으로 길이 막혀 살아 온지 65년이 지난 지금도 남과 북 사람들의 말, 한글, 생김새, 전통, 풍습, 문화, 역사 등은 본질적으로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남북의 삶의 모습, 삶의 길, 사람들의 가치기준, 생각(의식구조), 하는 짓(행동양식)이 이젠 너무나도 크게, 깊게 속속들이 달라지고 있다. 남북이 딴 판, 딴 세상, 딴 사람들이 되고 있다. 놀라울 만큼 남북은 이제 삶도, 생각도, 하는 짓도 서로 멀어지고 있다. 남북이 갈라져 살아 온지도 거의 일제시대의 두 배에 가까워 옴으로서, 그만큼 우리를 한 터, 한 틀, 한 판, 한 세상, 한 사람으로 다시 뭉치게 하는 데는 두 배나 더 많은 시간, 노력, 지혜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구나 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지난 김대중·노무현 정부의 화해, 교류, 협력 등 포용, 번영, 통일 정책을 뒤집고, 지난 세기 냉전시대를 방불케 하는 남북관계 악화를 가져옴으로써, 지금 남북에 틈이 생기고, 골이 파이고, 사이가 멀어지고, 벌어지는 속도가 가속화하고 있다. 안타깝지만 이 역시 한반도의 현실이다.

먼저 정치부터 둘러보자. 남에는 시민, 시민의식, 시민사회가 싹이 터서 자라고 있다. 오랜 유혈(有血), 무혈(無血) 정치 투쟁 끝에 이제 남쪽 시민은 자유를 누리고 민주정치가 뿌리를 내렸다. 하지만 북에는 일제 식민지, 이씨 조선, 고려 왕조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신민(臣民), 신민의식, 신민사회만이 있다.

남에서는 그 동안 대통령이 열 명(이승만, 윤보선[장면 수상],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이 바뀌었다. 같은 기간 동안 북한엔 최고권력자가 김일성, 김정일 부자 둘 뿐이었다. 이제 김정은의 후계자 등장으로 세 번째 권력계승 작업이 시작되고 있다.

남쪽엔 현 이명박 정부에 와서 인권, 자유민주주의가 뒷걸음 질 치는 행적과 기미가 있지만, 훼손은 해도, 정치의 그 큰 틀 자체를 통째로 다시 권위주의 독재시대의 틀로 바꿀 수도, 바꾸어 질 수 없을 만큼 자유와 민주주의 뿌리가 그 동안 많이 성장했다.

경제도 남북은 비교가 안 된다. 두 가지 보기만 들어보자. 국제통화기금(IMF, 2010-04-21)은 남한의 2010년 GDP(구매력기준, PPP)를 1.45조 달러로 추계한다.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소득(PPP)은 2만9790달러다. 명목 GDP(Nominal)는 9860억 달러이고, 1인당 국민소득은 2만165달러다.

북한은 2008년 구매력 기준 GDP(PPP 추계)를 약 400억 달러로 보고, 1인당 국민소득(PPP)은 1900 달러로 추산한다. 같은 해 명목 GDP는 280억 달러, 1인당 국민소득은 1,244달러로 추산한다.

간단히 말하면, 남한 경제는 전세계 230여 나라 가운데 10위권에 드는 경제 규모를, 북한은 100위 권 밖 최빈국으로 뒤쳐져있다. 경제규모나 1인당 국민소득이 남이 북의 대충 20배 된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러한 격심한 경제 격차를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는 선진국 문턱에, 북한은 아직도 후진, 빈곤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남은 열려 있고, 북은 굳게 닫혀 있다. 남이 개방 사회라면, 북은 폐쇄 사회다. 한 때 중국의 "죽(竹)의 장막," 소련의 "철(鐵)의 장막" 보다 더 두껍고 강한 "강철 덮개"로 북은 문을 닫고 있다. 남에는 개인이 있다. 개인의 자유·자율 영역이 있고, 사유재산, 개인자유기업이 있고, 자유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 극적으로 표현하면, 북한엔 "개인"이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집단, 집합체의 일원으로서만 개인, 개체가 존재한다.

또 자유시장, 사유재산, 개인, 자유 사(私)기업이 사실상 없다. 오직 철저히 통제되고, 동원된(totally regulated and totally regimented) 집단, 집합체가 있을 뿐이다. 그 극적인 증거와 표출의 하나가 평양에서 열리고 있는 10만 명이 넘게 동원된 인력이 정밀기계처럼 펼치는 "아리랑" 공연, 하나같이 총과 칼을 휘두르는 메스게임이다. 또 하나는 지난 세기 소련 붉은 광장의 군사 퍼레이드를 방불케 하는 김일성 광장의 군사 퍼레이드다. 이런 "계획된 정치 쇼"는 즐겁고, 재미있다기보다는 어쩐지 으스스하고 섬뜩하다.

간추리면, 남쪽에서 자유민주주의 정치가 보다 성장하고, 성숙하면 할수록, 남녘 동포가 훨씬 더 잘살면 잘살수록, 개인의 자유, 자율영역과 시민사회가 확장, 확대될수록, 북한의 현 김씨 일가 독재체제 지배층은 그 심리적 공포와 체제 위협을 느끼게 되고, 이 가중, 가속화하는 위협을 막는 가장 빠른 길은 권력과 인민의 일치단결이 그 지름길이라고 믿게 된다.

그리고 그 가장 유효한 방패막이가 핵과 미사일 등 "비대칭 군사력" 개발과 증강이며, 따라서 김씨 왕가의 세습독재 하에서만이 일사불란(一事不亂)하게 "선군" "강성대국"을 이룩할 수 있다는 북한에만 통하는 궤변과 사교(邪敎)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북한 지배층의 나름대로 치밀한 "정치 계산"과 "전략적 결정"의 성패는 또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그러나 혁명이론에 "굶주림의 한계"("starvation threshold") 개념과 "커져가는 기대의 혁명"("the revolution of rising expectations") 개념이 있다.

첫 번 째 개념은 굶주려 한끼한끼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배를 채우는 일 이외에 딴 생각할 겨를도 힘도 없다는 것이다. 반정부, 저항, 혁명은 꿈도 못 꾼다. 두 번째 개념은 가난, 굶주림, 헐벗음 등 생존 그 자체에서 벗어나면 자꾸 더 많은 것들을 기대하고 요구하는 겨를과 힘이 생기고, 그러한 기대와 희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현실과 틈(격차)이 더 벌어지는 순간, 즉 사람들이 생존 경쟁에서 벗어나 생활(자유, 복지, 행복 등) 개선을 요구하려 들 때가 대중 혁명이 일어 날 수 있는 시기와 환경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개념 틀에서 보면, 부시-이명박의 대북 접근과 김대중-노무현 전략의 차이와 정책적, 전략적 함의를 어느 정도 터득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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