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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을 바꾸면 종교가 사라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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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을 바꾸면 종교가 사라질까요?"

과학과 종교의 대화 <6> 종교와 과학의 한계

한국은 정교 분리를 엄격히 규정하는 나라다. 그러나 종교와 일상생활은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다. 세계적으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많은 신도를 거느린 대형 교회가 여러 곳일 뿐만 아니라, 각종 종교 집단을 거론하는 뉴스는 늘 사람의 눈길을 끈다. 최근에는 이명박 대통령이 다니던 특정 교회 신도를 중용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과연 한국의 종교가 일반인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지는 따져볼 일이다. 예를 들어 한때 한국 사회를 들썩이게 했던 생명공학을 둘러싼 윤리 논란이 그렇다. 외국의 기독교계가 생명윤리를 아주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의 기독교계는 사실상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다. 심지어 일부 불교계는 생명공학의 강력한 지지자를 자처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2007년에는 아프가니스탄으로 선교 여행을 떠났던 신도들이 테러리스트에게 납치되는 일도 있었다. 테러에 대한 비판과는 별개로, 이런 선교 여행이 '기독교 패권주의'라고 교계 안팎에서 강하게 비판을 받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 사건과 맞물려 "신은 망상일 뿐"이라고 선언하는 외국 지식인의 책이 국내에서도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런 한국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21세기의 세계를 살펴보면 더욱더 상황은 복잡하다. 현대 사회를 과학기술시대라고 규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력 또한 계속 커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프레시안>은 이 시대의 두 가지 화두라고 할 만한 '과학'과 '종교'의 대화를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런 의문을 해결하는 단초를 찾아볼 생각이다. 이 쉽지 않은 작업에
김윤성(종교학자,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 신재식(목사, 호남신학대 조직신학과 교수), 장대익(진화론을 연구하는 과학철학자, 동덕여대 교양교직학부 교수) 세 사람의 젊은 지식인이 나섰다.

이들은 이미 지난 2006년 말부터 과학과 종교를 놓고 여러 차례에 걸쳐 서신을 교환해왔다. <프레시안>과 과학 전문 출판사 사이언스북스는 공동으로 이 서신을 정리해 <프레시안>에 1주일에 한 차례씩 싣는 기획을 마련한다. 이 기획을 통해 독자들은 과학과 종교를 둘러싼 국내외 최신 담론을 접하는 것은 물론,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장대익 교수와 신재식 교수가 주고받은 편지를 본 김윤성 교수가 종교학자로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김 교수는 "실재의 깊이는 종교와 과학보다 훨씬 더 깊다"며 종교와 과학의 한계를 두루 짚은 뒤, 특히 장 교수를 향해 "종교는 세계관일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역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문화의 성격이 있다"고 지적했다.


김윤성 교수는 서울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종교학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신대 종교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인공지능과 영혼', '생명 논의와 모호성의 윤리' 등의 논문과 <거룩한 테러>, <다윈 안의 신> 등의 번역서가 있다.

이 글의 초고는 2007년 2월 서울에서 쓰인 것이다. <편집자>

신재식 선생님과 장대익 선생님께

두 분 편지 잘 받아 보았습니다. 규슈에서 돌아와 논문과 강의 준비로 방학을 마무리하다보니 어느새 개강이 코앞이네요. 급한 마음에 부랴부랴 편지를 씁니다. 워낙 많은 이야기들을 풀어놓으셔서 숨이 벅찰 지경이지만 어쨌든 나름대로 몇 자 적어 보겠습니다.

자연의 신비와 존재의 깊이 : 무신론과 종교적 자연주의

언어와 상상력의 힘이란 얼마나 놀라운지요. 남미에 가 본 적이 없는데도, 신 선생님 편지를 읽다 보니 마치 제가 실제로 남미의 광활한 자연 속에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행복한 착각은 단지 언어와 상상력 덕분만은 아닐 겁니다. 만일 저에게 예전에 국내외를 여행하면서나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웅장한 자연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면, 신 선생님의 그 생생한 묘사에 그다지 공감하지 못했겠지요. 결국 우리가 간접적인 경험으로도 충분히 무엇인가에 공감할 수 있는 건 우리 각자의 경험이 공통의 토대 위에 놓여있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아무튼 정말이지 자연에는 우리를 압도하는 놀라운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신 선생님 말씀대로 자연의 경이로움에 대한 경험은 어딘지 종교적 경험과 비슷한 면이 있어 보입니다. 물론 지난번 편지에서 적었듯이, 예술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 사이에도 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 같고요. 웅장한 자연의 경이로움, 위대한 예술 작품이 주는 감동, 그리고 내면에서 우러나는 종교적 경외나 평온의 감정. 이 세 경험 사이에는 확실히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생물학자 어슐러 구디노프. ⓒ프레시안

예전에 인상 깊게 읽었던 책의 한 구절이 생각나네요. 생물학자 어슐러 구디너프(Ursula Goodenough)의 <자연의 신성한 깊이(The Sacred Depths of Nature)>(1998)라는 책 결론 부분입니다.

우리의 진화 이야기는 우리에게 생명의 신성함을 일깨워 준다. 세포와 생명체의 놀라운 복잡성의 신성함, 경이로운 다양함을 만드는 데 걸렸던 광대한 시간의 신성함, 그 어느 것 하나라도 일어난다는 게 있을 법하지 않은 엄청난 불가사의의 신성함을 우리에게 말해 준다. 경의는 우리가 신성한 것을 인지할 때 일어나는 종교적인 감정이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존재의 계획에 경의를 표할 의무가 있다. 존재 전체와 작은 부분들 모두에게, 촉매 작용을 하고, 분비하고, 복제하고, 진화하는 무수한 작은 부분들에게 경의를 표할 의무가 있다.

아시다시피 구디너프는 특정 종교의 신자는 아닙니다. 그녀는 확고한 무신론자죠. 하지만 그녀는 종교적인 언어와 메타포를 사용하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입장을 '종교적 자연주의(religious naturalism)'라 부르기도 하죠. 여기에는 아버지의 영향도 없지 않을 겁니다. 어슐러의 아버지 어윈 구디너프(Erwin Goodenough)는 20세기 중반에 활동한 저명한 종교학자로서, 본래 독실한 개신교 신자였다가 종교학을 하면서 불가지론자로 전향한 사람이죠. 과학자가 된 어슐러는 불가지론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신론을 선택했지만, 그녀의 생각과 언어에는 종교학자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종교적 감수성이 다분히 스며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디너프는 비록 '신성함', '불가사의', '경의', '종교적 감정' 같은 용어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이를 특정한 신앙 대상과 관련짓지는 않습니다. 다만 자연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 그리고 이를 하나하나 파헤쳐 장대한 한 편의 드라마로 펼쳐 보여 준 과학의 위대함을 표현하기 위해 다분히 종교적 색채를 지닌 언어를 사용할 뿐이죠.

더욱이 구디너프는 바로 이어지는 구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존재와 존속 자체 그리고 이를 이해하는 인간의 능력 자체가 중요할 뿐, 그 어떤 정당성 증명도, 창조자 같은 절대 존재도, 의미를 통합하는 상위 개념도 필요치 않다." 무신론자로서 진면모를 드러내는 대목이지요. 결국 구디너프는 다분히 '종교적' 색채를 띤 언어를 사용하고는 있지만, 사람들이 흔히 '종교적'이라는 말에서 떠올리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이 말을 쓰는 셈입니다.

꼭 구디너프처럼 '종교적 자연주의'를 표방하지 않더라도, 자연에서 느끼는 경이로움을 마치 종교적 경험처럼 표현한 과학자들은 많습니다. 무신론, 불가지론, 범신론 등 그 입장이 천차만별이기는 하지만요.

예를 들어 일전의 편지에서 인용했듯이, 아인슈타인은 자연의 경이와 신비 앞의 숙연한 감정에 '종교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는 했습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전통적인 유신론적 종교와는 전혀 무관했습니다. 그가 자신이 말하는 신이란 굳이 말하자면 '스피노자의 신'이라고 했듯이, 그는 일종의 범신론적 무신론자였죠.

또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진화의 장대한 드라마를 마무리하면서 "이 모든 이야기에는 어떤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라고 말한 것에도 어딘지 종교적인 분위기가 느껴지는데요, 다윈 역시 유신론적 종교와는 거리가 멀었고 대신 무신론적 경향이 강한 불가지론을 견지했지요.

그런데 유신론은 물론 범신론이나 불가지론 따위와도 거리가 먼 좀 더 철저한 무신론자들 중에서조차 자연의 신비 앞에서 느끼는 감동을 거의 종교적인 분위기의 언어로 표현하는 경우가 간혹 있습니다. 다른 예를 들 것도 없이 당장 칼 세이건(Carl Sagan)의 <코스모스(Cosmos)>(1980) 첫머리만 읽어 봐도 충분하지요.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프레시안

코스모스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모든 것이다. 코스모스를 아주 희미하게라도 응시하노라면 그것은 우리를 뒤흔들어 놓는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목소리가 떨리며, 높은 데서 떨어지는 아찔한 느낌이, 아득한 기억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게 된다. 우리는 우리가 가장 위대한 신비들에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가장 대표적인 무신론 과학자 중 한 사람이 한 말입니다. 물론 종교적 의미로 읽힐 수도 있는 '신비'라는 단어를 제외하면 이 인용문에서 종교적이라 할 만한 요소는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어딘지 미묘한 종교적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도 같습니다. 세이건이 어떤 종교적 의도에서 이런 말을 한 것은 분명 아닌데도 말이죠. 그의 말에서는 오래전부터 종교인들이 우주와 존재의 궁극적인 경계와 깊이 너머에 대한 감각을 표현해 온 말들과 비슷한 분위기가 풍깁니다.

구디너프, 아인슈타인, 다윈, 세이건 같은 과학자들이 자연의 신비 앞에서 내뱉는 탄성 같은 고백들을 읽다 보면 그냥 그대로 공감이 갑니다. 아, 제 경우는 그렇다는 말입니다. 아마 두 분도 그러시겠죠? 그들의 글을 읽다 보면 힘차게 떠오르는 태양, 바닥을 알 수 없는 심해, 상상하기 힘든 우주의 광대한 거리와 아득한 어둠, 초신성으로 폭발한 지 이미 수억 년인데 이제야 비로소 내 망막에 도달했을 저 별빛들…, 이런 것들에서 느꼈던 가슴 벅찬 감동이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어려서부터 불과 몇 해 전까지만 해도 저는 이러한 자연의 신비 앞에서 신의 창조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고는 했었습니다. 당시에 찬양은 제 감동을 표현하는, 유일하지는 않아도 가장 적절한 언어였습니다. 특정 종교 공동체에 속하지 않게 된 지금 이제 개인적으로 그 찬송을 부르는 일은 거의 없지만, 분명한 건 그때나 지금이나 자연 앞에서 느끼는 감동의 깊이 자체는 여전히 똑같다는 점입니다. 그 감동을 종교적 언어로 표현하든, 과학적 언어로 표현하든, 아니면 자연의 깊은 신비에 압도되어 그저 침묵하든, 그 표현들에 담긴 감동의 깊이 자체는 결국 같은 것이 아닐는지요.

누미노제와 신비: 종교적 경험의 두 가지 양태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 ⓒ프레시안

이 점에서 독일의 개신교 신학자이자 종교학자인 루돌프 오토(Rudolf Otto, 1868∼1937년)가 말한 '누미노제(numinose)' 경험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토는 <성스러움의 의미(Das Heilige)>(1917)라는 책에서 보이는 세계 너머의 어떤 성스러운 실재에 대한 감각을 누미노제(numinose)라고 명명했죠. 적절한 번역이 불가능한 단어인데요, 굳이 옮기자면 '경외(敬畏)'가 그나마 근접할 겁니다.

누미노제 경험은 성스러운 실재의 궁극적 신비에 대한 매혹과 두려움이라는 양면성을 지닙니다. 오토는 이 경험이야말로 모든 종교의 뿌리라고 보았고, 이는 자연의 신비에 직면했을 때 느끼게 되는 전율의 경험과도 상통한다고 보았죠. 오토는 개신교 신학자였던 만큼 그가 말한 성스러움이란 경험적 차원을 넘어서는 초월적 실재로서 절대 타자를 분명히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미노제란 사실 절대 타자로서 신에 대한 경외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넓게 보면 이러한 누미노제 경험은 다양한 종교 경험의 한 가지 유형에 불과합니다. 여러 종교학자들은 누미노제 경험이 어디까지나 초자연적 절대 타자로서 신적 존재를 신앙 대상으로 하는 유신론적 종교에 국한된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종교에는 꼭 유신론적 종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신적 존재를 중시하지 않거나 신적 존재와 아예 무관한 신앙과 실천을 지닌 종교들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지요.

종교학자들이 누미노제 경험과 구분되는 '신비(神秘, mystic)' 경험을 종교적 경험의 또 다른 유형으로 제시하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신비 경험이란 절대자와 직면하는 데서가 아니라, 그저 자연 자체, 존재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감각에서 생기는 경험이죠. 신비 경험이란 존재의 궁극적 토대와 하나가 되는 합일의 경험입니다.

그런데 사실 누미노제 경험과 신비 경험은 서로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닙니다. 둘 다 인간의 언어와 상상을 넘어선다고 여겨지는 실재와 관련하여 갖게 되는 심오한 경험과 관련되지요. 다만 그 경험을 구체화하면서 인격적인 초월자와 관련짓느냐 아니면 비인격적인 초월적 법칙과 관련짓느냐 하는 방식이 다를 뿐이죠.

종교의 유무나 종류를 떠나 사람들이 실재의 일부인 자연에서 얻는 감동의 경험은 이 두 극단 사이에 두루 걸쳐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연의 감동을 인격적 신에 대한 찬미로 표현하고, 어떤 사람은 자연 속에 녹아드는 합일의 평온함으로 표현하죠. 하지만 전자가 꼭 유신론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서만 보이는 태도는 아닙니다. 사실 누미노제의 신앙 대상인 절대 타자가 반드시 인격적이기만 하지는 않기 때문이죠.

예를 들어 우리는 흔히 "천벌을 받았다."라거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다."라거나, "하늘이 무섭지도 않느냐."라고 말하곤 합니다. 애국가에도 "하느님이 보우하사."라는 구절이 있죠. ('하느님'이 아득한 옛날부터 우리 민족이 신앙해 온 대상을 가리키는 것이고, 이는 야훼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기독교의 '하느님/하나님'과 다르다는 건 아마 잘 아시겠죠.) 여기서 '하늘'이나 '하느님'은 우주와 역사를 주관하는 신적 주재자를 뜻할 수도 있고, 그저 하늘의 막연한 어떤 이치를 뜻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도 무심하시지'라고 할 때, 우리처럼 의지와 감정을 가진 인격적 신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부정의가 판치는 현실에서 정의를 회복시켜 줄 희망의 궁극적 토대로서 우주와 역사의 법칙을 떠올릴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인격체로서 하느님과 비인격적 법칙으로서 하늘 사이에는 깔끔하게 자른 단면 따위는 없습니다. 양자는 스펙트럼처럼 이어져 있지요. 또 사람들이 하느님이나 하늘을 생각하는 방식도 이 스펙트럼 위 어딘가에 모호하게 걸쳐 있을 테고요.

길게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만, 신비 경험도 다르지 않습니다. 순수한 신비 경험은 사실 극히 드뭅니다. 종교 엘리트들에게는 가능한지 모르지만, 신비 경험을 주축으로 한다는 불교나 힌두교 같은 종교들에서조차 신비 경험은 순수한 내면적 체험 수준에만 있지 않습니다. 여기서도 언제나 절대자처럼 받아들여지는 붓다와 보살, 수많은 남녀 신격들이 존재하는데, 이들은 엄연한 숭배 대상이 되어 왔고, 이는 곧 누미노제 경험과 관련되지요. 결국 순수한 신비 경험이란 이상적 차원에서나 말할 수 있을 뿐이고, 실제 현실에서는 신비 경험과 누미노제 경험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셈입니다.

그러고 보면 결국 시대나 지역을 막론하고 모든 종교들에서는 누미노제 경험과 신비 경험의 양극단이 공존하며 그 사이에 넓은 스펙트럼이 펼쳐져 있어서, 사람들의 종교적 신앙은 그 사이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셈입니다. 물론 이는 종교인들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특정한 종교를 갖고 있지 않아도, 많은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누미노제 경험을 다른 한편으로는 신비 경험을 일정 정도 공유하며 살아갑니다. 유신론을 거부하는 무종교인, 무신론자, 범신론자의 경우는 아마 누미노제 경험보다는 신비 경험에 더 가깝겠지요.

따라서 앞서 살핀 구디너프의 입장은 엄밀히 말하면 '종교적 자연주의'라기보다는 '신비적 자연주의'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겁니다. 그녀가 말하는 신성함이나 신비에는 누미노제의 신앙 대상인 인격적 신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이죠. 하지만 신비 경험이 누미노제 경험과 나란히 종교적 경험의 주요한 양상임을 염두에 둔다면, 구디너프는 물론 아인슈타인, 다윈, 세이건 같은 무신론적 과학자들이 자연의 신비에 대한 감동을 표현한 주옥같은 말들이 풍기는 분위기에 '종교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무리한 일은 아닐 겁니다.

종교도 과학도 이 세계의 신비를 모두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사실 저는 '종교적'이라는 용어 자체에도 좀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종교적'이라는 표현은 대개 신성함, 근원적 깊이, 존재 자체…, 이런 것들을 망라하는 포괄적 개념으로 쓰이죠. 하지만 '종교'라는 용어가 실제로는 특정 전통으로 구체화된 제도 종교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런 표현은 오해를 사기 십상입니다. 아인슈타인이 본인의 의도와 무관하게 마치 종교적 신앙을 고백한 것처럼 오해를 받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죠.

하지만 일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아인슈타인은 다만 스스로 '종교적'이라고 주장하는 종교인들을 향해 넓은 의미에서 보면 그 자신도 여느 종교인들 못지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종교적일 수 있다고 말한 것일 뿐입니다. 아마 아인슈타인은 '종교적'이라는 표현에 그리 만족하지는 못했을 겁니다. 인간과 과학을 한없이 겸손하게 만드는 자연의 위대한 신비는 '종교적'이라는 표현으로도 다 담아내기 힘들 정도로 깊기 때문이지요.

따라서 저는 '종교적'이라는 표현은 그저 그 깊이를 조금이나마 담아내기 위한 개념적 방편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사용할 수는 있겠지만, 이 단어 하나에 모든 것이 다 담기리라는 착각은 버려야 한다는 이야기죠. 많은 사람들이 때로 '종교'나 '종교적'이라는 용어보다 '신성함', '성스러움', '궁극성', '신비', '깊이', '영성'……, 이런 용어들을 두루 사용하는 것도 필경 이 때문이겠지요.

'종교적'이라는 말의 의미론적 한계는 자연에서 느끼는 경이의 경험과 성스러운 실재에 관련된 누미노제나 신비 경험이 그 근본에서 단절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자연을 대하는 경험과 종교적 경험은 서로 다르면서도 결코 완전히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는 자연이나 종교를 넘어 다른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지난번 편지에서 제가 음악적 경험과 종교적 경험이 근원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 같다고 했던 것 기억하시죠. 음악과 종교가 인간 경험의 깊은 차원에서 만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일상이나 과학에서 자연의 경이에 대해 느끼는 경험과 존재의 궁극적 깊이에 대해 느끼는 종교적 경험도 역시 똑같은 깊이의 차원에서 만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이 모든 경험들이 다 똑같다는 이야기는 아니고요, 다만 이 각각의 경험들이 서로 별개이면서도 중첩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참,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자면 시와 문학도 넣어야겠지요.

저는 영화 <콘택트>에서 엘리(조디 포스터)가 웜홀을 통과해 도착한 저 머나먼 어딘가의 우주인지 아니면 그녀의 상상 속 우주인지 아무튼 어떤 미지의 우주에 도착한 장면에서 그 표정과 대사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영화도 여러 차례 보았지만, 이 장면은 되감기를 해 가며 정말 수도 없이 보았는데요, 볼 때마다 늘 가슴이 메고 눈물이 글썽이게 하는 명장면이죠. 눈앞에 펼쳐진 우주의 그 놀라운 광경에 엘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이렇게 탄식합니다.

어떤 천체의 모습이에요.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형언할 수가 없어요…. 이건 한 편의 시야! 시인이 와야 했어요…. 너무나 아름다워요. 아름다워요. 너무나 아름다워. 아름다워. 너무나…. 상상도 못 했어. 상상도 못 했어. 상상도 못 했어….

엘리는 그토록 아름다운 우주의 모습을 언어로 담아 낼 수 있는 사람은 과학자가 아니라 바로 시인이라고 말합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과학, 종교, 예술, 시를 나누는 경계들이란 얼마나 인위적인 것인지를 절감하고는 합니다.

▲칼 세이건의 <콘택트>를 원작으로 만든 영화 <콘택트>의 한 장면. ⓒ프레시안

자연의 신비 앞에서 과학적 분석, 예술적 재현, 종교적 고백, 그리고 시적 상상은 각기 다른 언어를 구사하지만 그 근본적 깊이 어디에선가 서로 만나는지도 모릅니다. 이들에게는 우주라는 실재와 인간 존재의 근본에서 서로 상통하면서도 끝내 서로 치환되거나 융합되지 않는 차원이, 각각 고유성을 지닌 별개의 영역들이면서도 겹겹이 교차하는 중첩 영역에서 만나는 차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에서 저는 신 선생님이 말하신 삶의 다원성에 대한 견해에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다만 저는 그 다양한 차원들에 우열이나 위계가 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과학자든 종교인이든, 또 예술가든 시인이든 자신의 언어만이 자연의 신비를, 존재의 깊이를 온전하게 담아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오만이자 독선일 겁니다. 이들은 모두 같은 실재에 대해, 존재의 똑같이 깊은 차원에서, 각기 나름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일 뿐이죠. 그렇기에 우리는 과학의 언어든, 종교의 언어든, 예술의 언어든, 시의 언어든, 이 언어들 각각은 물론 이들을 다 합쳐도 끝내 담아낼 수 없는 자연의 신비와 존재의 깊이 앞에 그저 겸손할 수밖에 없는 거겠지요.

윌슨의 제안은 효과적일까? 종교의 과대평가된 영향력

에드워드 윌슨이 <생명의 편지(The Creation)>에서 제안하는 과학과 종교 간의 협력이 다분히 '생물학 중심주의적'이라는 신 선생님의 진단은 매우 적절해 보입니다. 저 역시 그의 과도한 생물학 중심주의와 과학 지상주의에는 쉽게 수긍이 안 가더군요. 예전에 윌슨의 <통섭(Conscilience)>(1998)을 읽으면서도 비슷한 느낌이었는데요, 그가 말하는 학문들 간의 '통섭'이란 결국 자연 과학의 토대 위에서, 자연 과학을 중심으로 한 일방적인 포섭이라는 생각이 들었죠. 실제로 윌슨에게는 그런 비판이 많이 가해지더군요.

그의 이번 책 <생명의 편지>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는 비록 대화와 협력을 이야기하지만, 과학만이, 생물학만이 협력의 유일한 토대이며 대화의 적합한 주역이라는 신념을 조금도 굽히지 않습니다. 솔직히 그가 말하는 대화와 협력이란 단지 생색내기에 불과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무엇보다도 윌슨이 도대체 왜 생태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 파트너로 굳이 종교를 선택했는지 공감이 잘 안 갑니다. 그는 이에 대해 스스로 묻고 답하는데요,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종교와 과학은 오늘날 미국은 물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기 때문"이라는 거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종교가 오랫동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것은 사실입니다. 또 근대 이후 과학의 영향력은 나날이 증가해 왔지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윌슨은 과학을 과대평가하는 것만큼이나 종교도 역시 과대평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종교학을 공부하고 있지만, 종교가 우리 삶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그렇게 대단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종교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단지 종교가 우리 삶의 다른 요소들과 하도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그것을 빼놓고는 우리 삶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중요해서가 아니라, 고려에서 배제할 수 없기에 관심을 갖는 거지요.

종교가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중세라면 몰라도, 근대 이후 종교는 삶의 특정 영역에 관련되는 하나의 요소 내지 영역으로 계속 축소되어 왔습니다. 물론 그래도 여전히 종교의 영향력이 크기는 합니다만, 그 크기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지는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슬람이 지배적인 중동이나 힌두교가 삶의 근간인 인도의 상황이 근대화와 세속화를 겪어온 유럽, 미국, 우리나라의 상황과 똑같지는 않을 겁니다. 전자의 경우는 일단 접어 두겠습니다. 이 지역의 대부분에서는 과학의 영향력이 여전히 미미하고, 따라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 자체를 논할 게재가 별로 없으니까요.

이와 달리 유럽, 미국, 우리나라 같은 데서 종교의 막강한 영향력이란 대개 종교인들, 그 중에서도 보수적 성격의 종교인들의 일부에게만 국한됩니다. 무종교인들, 무신론자들, 반(反)종교적 정서를 지닌 사람들에게는 물론, 심지어 온건한 형태의 신앙을 지닌 많은 종교인들에게도 종교란 그저 삶의 여러 요소들 중 하나에 불과하며, 그 영향력은 거의 없거나 아주 미미하죠. (이에 대해서는 장 선생님이 종교나 돈 따위보다 결혼이 행복의 가장 두드러진 요건으로 여겨진다는 심리학계의 연구를 들어 잘 설명해 주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런 연구들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저는 통계를 일반화하는 데는 엄연한 한계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그다지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겠지요.)

다만 보수적 성격의 종교인들, 특히 근본주의자들이 유난히 '설친다면' 종교의 영향력이 다소 막강해 보일 수도 있는데, 미국과 우리나라가 바로 이런 경우일 겁니다. 하지만 그 영향력의 포장지를 뜯고 보면 내용물은 그리 신통치 않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무종교인, 무신론자, 반종교주의자, 그리고 온건한 종교인이 훨씬 더 많은 게 현실일 겁니다. 결국 윌슨이 미국에서 근본주의적 종교가 설치는 모습에 너무 예민하게 반응한 나머지 미국 사회에서 종교가 미치는 일반적 영향마저 과대평가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커집니다.
▲미국 남침례교회의 대형 집회 모습. ⓒ프레시안

또 윌슨이 여러 종교인들 중에서 왜 굳이 미국 남침례교 목사를 가상의 수신자로 설정했는지도 좀 의아스럽더군요. 일단은 기독교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크기 때문이었겠지요. 그 성격상 정확한 통계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제법 믿을 만한 통계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종교인의 수는 기독교 21억 명, 이슬람 15억 명, 무종교인 11억 명, 힌두교인 9억 명 등의 순이라고 합니다. 단연 기독교가 가장 크지요. 하지만 기독교가 가톨릭, 정교회, 그리고 무수한 개신교 교파들로 나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 지구상에서 규모가 가장 큰 종교는 이슬람입니다.

미국으로 이야기를 좁혀 볼까요? 미국에서 기독교는 분명 인구의 76%를 차지하는 최대의 종교입니다. 이중에서 개신교가 53%, 가톨릭이 23%를 차지하지요. 하지만 개신교는 수많은 교파로 나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단일 교단으로 가장 큰 것은 단연 가톨릭이죠. 윌슨의 편지 수신자인 남침례교는 가톨릭, 침례교, 감리교에 이어 네 번째로 큰 교단으로 전체 기독교 신자수의 7%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중에서 남침례교는 전형적인 근본주의적 교파라는 점입니다. 근본주의 교파들은 세속 사회나 다른 종교들은 물론 개신교 내의 다른 교파들에 대해서도 단단한 장벽을 쌓는 성향을 지닙니다. 그렇기에 남침례교는 미국 기독교는 물론 심지어 개신교조차도 대표하지 못합니다.

물론 그 규모에 비해 남침례교의 영향력은 제법 큽니다. 부시 행정부하에서 백악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고, 또 개신교계 언론을 상당 부분 장악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래도 남침례교는 결코 기독교 전체나 유일신교 전체를 대변하지 않습니다.

제가 의아해하는 부분은 바로 이 점입니다. 윌슨이 정말로 종교의 막강한 영향력을 염두에 두었다면, 차라리 좀 더 포괄적으로 그 종류가 무엇이든 아무튼 신/신들을 믿는 사람들 일반을 향해 말하거나, 또는 남침례교 목사를 지목하기보다는 그냥 기독교인들 전체를 향해 말하는 것이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윌슨의 한계: 대화와 정치의 부재

또 한 가지 의아스러운 점은 윌슨이 비록 가상의 목사를 수신자로 설정하고는 있지만, 사실상 그와 별다른 대화를 시도하지 않는 것 같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읽어 보아도 그는 편지 수신자가 가상의 목사라는 사실을 그저 이따금 환기시키기만 할 뿐, 그와 아무런 실질적인 대화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생태 위기를 극복할 최선의 도구로서 과학과 생물학의 가치에 대해 혼자 설명하고 일방적으로 설득할 뿐이죠. 과학적 신념이나 종교적 신념의 내용에 대해 그리고 양자가 만날 수 있는 근본적 토대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 과학 지상주의자가 근본주의 개신교 목사에게 보낸 편지를 엿보면서 이에 공감하여 생태 위기를 구하는 데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죠. 제가 '더 큰 관심'이라고 한 것은, 사실 이미 많은 기독교인들이 오래전부터 생태 문제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 왔다는 점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생태 신학은 여성 신학과 더불어 현대 기독교 신학의 가장 핵심적인 영역이 된 지 오래입니다. 또 기독교의 많은 진영이 실천적 차원에서 다양한 환경 운동에 앞장서 왔고요.

이와 달리 윌슨이 편지 수신자로 설정한 근본주의 개신교인들은 그동안 생태 문제에도 별 관심이 없었고, 아마도 이 무신론자가 내미는 협력 제안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도 않을 겁니다. 그들이 이런 제안을 받아들일 만큼 넉넉한 신앙을 가졌다면 애초에 그토록 폐쇄적이고 고집스러운 집단으로 전락하지는 않았겠지요. 그들은 윌슨의 제안에 이렇게 답할 것 같네요. '윌슨 씨! 지구를 구할 주역은 과학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아멘!'

반면에 다른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윌슨이 이런 제안을 하기 이전부터 이미 오랫동안 생태 문제 해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고, 그들 나름대로 앞으로도 그 노력을 계속해 가겠지요. 아마도 그들은 이렇게 말할 것 같네요. '윌슨 씨! 당신의 제안은 참 고맙고, 그 숱한 과학 지식을 알려준 것도 고맙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런 상세한 지식이 좀 부족해도 별 상관이 없습니다. 뭐 같이 손잡을 수는 있겠지만, 너무 많은 과학 지식은 오히려 부담스럽네요. 아무튼 우리는 오래전부터 생태 문제 해결을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애써 왔답니다. 이 점만은 알아주세요!'

그러고 보면 결국 윌슨은 미국 내에서 영향력은 제법 있지만 그래도 별로 신통치 않은 근본주의 개신교 교파를 향해 혼자서 과학 지상주의를 소리 높여 외치는 공허한 독백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또 윌슨은 자연의 '관리인'으로서 인간의 역할에 대해 말합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관리인'은 성서에도 등장하는 개념이고, 이미 오랫동안 유대교나 기독교 생태 신학자들이 재발견하여 중요하게 사용해 온 전략적 개념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저는 혹시 윌슨이 기독교의 이 '관리인' 개념을 슬쩍 도용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더군요. 성서에 엄연히 '관리인' 개념이 있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를 토대로 생태계 회복 운동을 실천해 왔는데, 윌슨은 이 개념을 마치 자신이 처음 제시하는 새롭고 독창적인 것처럼 말합니다. 제가 보기에 윌슨이 기독교에 '관리인' 개념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는 없을 것 같은데요. 알면서도 출처를 밝히지 않고 마치 자신의 생각인 것처럼 말하는 건 엄연한 표절이겠지요.

설령 몰랐더라도 역시 문제이기는 마찬가집니다. 이는 결국 그가 상대방에 대해서는 알려 하지도 않고 혼자 자신만의 독백을 늘어놓았다는 증거인 셈이니까요. 윌슨이 정말로 그리스도교와 대화하며 협력하고자 했다면 기독교의 '관리인' 개념을 제대로 파악하고 이를 자신의 과학적 지식과 결합하여 그 나름의 새로운 '관리인' 모델을 제시했어야 할 겁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생각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들더군요. 윌슨은 정말로 대화를 원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교가 제시해 온 '관리인' 개념은 무시한 채 과학을 '관리인' 개념의 담지자로 대중에게 제시함으로써 사실상 과학이 생태 문제 해결을 위한 유일한 최적의 대안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끝으로 제가 윌슨의 책을 읽으며 든 마지막 의문은 과연 그의 제안이 효과적일까 하는 점입니다. 관리인 개념도 나름대로 의미 있기는 합니다만, 종교적 기원을 갖는 이런 개념은 사실 생태 사상이나 환경 운동 전반에서 특히 '심층 생태론(deep ecology)'이라고 불리는 진영과 관련됩니다. 심층 생태론은 1973년에 노르웨이 철학자 아르네 내스(Arne Næss)가 창안한 용어로, 생태 과학만으로는 생태학적 윤리나 지혜에 관련된 해답을 얻을 수 없다고 보면서 깊은 경험, 깊은 물음, 깊은 봉헌을 통해 해답을 추구하는 시도들을 통칭합니다.
▲가톨릭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 ⓒ프레시안

심층 생태론은 인간을 환경에 온전히 통합된 일부로 보며, 나아가 인간과 생물권의 동등성을 주장합니다. 그 입장은 매우 다양해서 아르네 같은 철학자들 외에도, 지구를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는 가이아 이론을 주창한 제임스 러브록(James Lovelock) 같은 과학자들, 그리고 생태계 파괴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반성하며 인간의 관리인 역할 회복을 주장한 가톨릭 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 같은 종교인들이 이에 속합니다.

그런데 이렇듯 종교인들이나 종교적 성향이 강한 사람들이 주축이 된 심층 생태론은 사람들의 세계관을 친환경적으로 바꾸고 삶의 태도를 바꾼다는 점에서 일정한 역할을 해 왔지만, 생태 문제를 둘러싼 좀 더 복잡한 맥락을 간과한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탁상공론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심심치 않게 받아왔습니다.

사실 생태 문제는 단지 세계관이나 삶의 태도에만 관련된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훨씬 더 복잡하지요. 그 핵심에는 국가 권력, 국제 관계, 세계 자본주의, 신자유주의, 가부장제 같은 복잡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변수가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회주의자들, 마르크스주의자들, 페미니스트들도 생태 문제에 꾸준한 관심을 가져 왔고, 여러 차원에서 생태 문제 해결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기울여 온 것이지요. 생태 문제는 세계적인 경제와 분배의 불평등과 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이 이들의 생각입니다.

반면에 심층 생태론은 생명계와 인간의 동등권 그리고 생명계에 대한 인간의 책임을 말하지만, 생태 문제의 핵심인 세계 경제의 분배 정의 문제 같은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분명한 보수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갖습니다. 제 생각에는 윌슨이 종교적인 관리인 개념을 빌려옴으로써 이러한 한계를 지닌 심층 생태론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그가 평생 추구해 온 학문의 성격 자체와도 상통하지 않나 싶습니다. 미국의 인류학자 마셜 살린스(Marshal Sahlins) 같은 이들은 윌슨을 필두로 한 사회 생물학자들이 인종 차별, 성차별, 우생학에 대해 비판하기는커녕 사실상 그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고 비판합니다. 글쎄요. 좀 과도한 비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윌슨은 이런 사회 정의의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경제 윤리나 분배의 정의라는 차원을 간과한 심층 생태론을 끌어들이는 윌슨의 제안이 과연 정치적으로 얼마나 올바른 것일지, 또 얼마나 현실적으로 효과적일지 의문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좀 길어졌습니다만, 선생님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특히 장대익 선생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제가 윌슨을 너무 협소하게 이해한 건지요? 그의 제안을 나름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는지요?

기독교가 과학과 종교 논의에 유독 적극적인 또 다른 이유
▲황해도 내림굿. 일월성신을 모신 후 무아경에서 춤을 추고 있다. 굿 사진을 전문으로 찍는 사진가 김수남이 1981년 서울 석관동에서 찍은 사진이다. ⓒ뉴시스

왜 과학과 종교 논의에서 유독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인지에 대한 신 선생님의 흥미로운 설명 잘 들었습니다. 지난 편지에서 서구에서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가 극적으로 변화해온 역사적 과정에 대한 설명에 이어, 이번 편지에서 기독교 자체가 지닌 인식론적 구조에 대한 설명과 불교나 이슬람 문화권의 경우에 대한 설명을 통해 궁금증도 많이 풀렸고요. 그런데 어쩐지 아직 의문이 다 풀리지 않은 것 같은 찜찜함이 남습니다.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인식론적 차원은 일단 접고 역사적 차원에 대해서만 제 생각을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신 선생님께서는 불교나 이슬람의 영향 아래 있는 지역에서는 담론의 역학 관계에서 서구의 기독교가 겪었던 것과 같은 역사적 경험이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이런 지역에서 불교와 과학, 이슬람과 과학에 대한 논의가 별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불교나 이슬람이 과학과 갈등을 일으키기보다는 과학을 포용한다는 식의 견해가 지배적인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하셨고요.

그런데 제가 보기에 신 선생님의 설명은 우리나라처럼 불교와 기독교를 비롯한 다양한 종교들이 나란히 경쟁하며 공존하는 상황에서조차 종교와 과학 논의에서 유독 기독교가 두드러진 이유를 말해주지는 못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종교들이 지금처럼 경쟁적으로 공존하게 된 우리의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그 역사적 맥락이란 곧 우리가 말하는 '과학'은 어디까지나 '서구 근대 과학'으로서, 우리나라 같은 비서구 사회에서 근대 과학은 처음부터 서구의 팽창과 궤적을 같이 해왔다는 점입니다. 근대 과학은 비서구 세계가 서구적 근대성 모델에 따라 대대적인 근대화, 서구화를 겪기 시작하면서 도입된 것이지요.

물론 시대와 지역을 넘어서는 과학의 보편성을 부정할 필요는 없지만, 과학을 둘러싼 담론들이 특수한 역사적 맥락을 지닌다는 점도 역시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제가 보기에 우리의 경우 종교와 과학 논의에서 유독 기독교가 두드러진 것은 기독교와 근대 과학이 서구의 근대성과 더불어 세계로 확장되어온 역사적 과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새롭게 형성되던 근대라는 무대에서 가장 유리한 입지를 선점한 것은 바로 서구 종교인 기독교였기 때문이지요.

(참, 앞으로 '기독교'는 주로 '개신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나 '그리스도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비롯한 다양한 하위 전통을 포괄하는 용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근대와 관련한 논의는 주로 개신교를 중심으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천주교는 개신교보다 한 세기나 일찍 전래되었지만, 오랜 박해에서 이제 막 벗어난 상황이기에 근대 무대에는 개신교보다 뒤늦게 뛰어들었습니다. 게다가 천주교는 배경에 프랑스가 있었던 데 비해, 개신교의 배경에는 미국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근대 상황에서 개신교가 차지할 수 있었던 유리한 입지는 곧 미국의 힘을 등에 업은 혜택 덕분이기도 합니다.)

비서구 세계에서 기독교는 과학과 나란히 서구 문명의 중요한 토대로 인식되었으며, 심지어 때로는 서구 문명 자체와 동일시되기도 했습니다. 개항기를 중심으로 한 근대 초기 우리나라 기독교에서 비교적 오랫동안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별다른 논의가 나타나지 않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서구 종교라는 오직 이 한 가지 사실 덕분에 과학의 대등한 동반자로 여겨지거나 심지어 과학의 근원이라는 위상까지 거저 부여받을 수 있었기에 별다른 논의가 필요치 않았던 거지요. 일종의 무임승차라고나 할까요.

반면에 유교나 불교 그리고 무교(巫敎) 같은 전통 종교들이나 여러 신종교들에게는 상황이 그리 썩 좋지 않았습니다. 이 종교들에게는 새로운 근대적 기준에 맞추어 적응하는 과제가 더 급선무였기 때문이죠. 우선 정치와 종교의 복합체인 유교는 조선 시대 내내 누렸던 지배적 위치를 상실한 채 하나의 독립된 종교로서보다는 순수한 사상, 일상적 관습과 의례, 무의식적 가치관과 윤리 따위로 그 명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 근대 초기부터 지금까지 유교가 종교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수시로 제기되어 온 것도 이 때문입니다.)

유교에 비하면 종교로서 위상이 비교적 명확했던 불교는 이보다는 조금 나았습니다만, 그래도 사정이 열악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조선 정부의 억불 정책에서 벗어난 불교에게는 전통을 회복하고 근대 사회에 적합한 종교로서 체질을 개선하는 일이 더 시급했기 때문이죠.

신종교들은 상황이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정치와 종교의 혼합체로서 갑오농민혁명의 원동력이었던 동학은 개항기 들어 천도교로 변신하면서 순수한 종교임을 표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역시 한동안은 과학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할 겨를이 없었죠. 증산교를 비롯한 다른 신종교들은 이제 막 형성되던 단계라 딱히 거론할 사항이 별로 없었고요.

마지막으로 무교 같은 민간종교는 가장 열악한 상황에 있었습니다. 민간종교는 '종교'(religion)의 축에 들지도 못하는 '민간신앙'(folk belief)으로 불리거나 아예 '미신'(superstition)으로 폄하되기가 일쑤였기 때문에, 언제나 근대 무대의 외곽에 머물 수밖에 없었지요.

여러 종교들의 사정이 이러했기에 근대 초기인 개항기에는 기독교에서와 마찬가지로 다른 종교들에서도 과학과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별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일제강점 이후 1920~30년대에 근대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합니다.

일단 기독교를 서구 문명과 동일시하던 환상이 깨지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개신교에서는 경전을 문자주의적으로 이해하고, 성령체험을 강조하며, 내세 지향성이 강한 근본주의적 경향이 증가하고 있었습니다. 또 천주교는 도시보다는 농촌의 기반이 더 컸고, 전래 당시부터 내내 지배적이었던 현실 도피적이고 내세 지향적인 성격의 신앙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지요.

사정이 이러했기에 이제 사람들 사이에서는 기독교가 합리성이나 근대성에 부합하기는커녕 오히려 비합리성과 전근대성의 온상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증가하게 되지요. 이 시기에 벌어진 사회주의자들과 개신교인들의 담론 투쟁이나 세력 대결―양측의 집회 현장에서 서로를 비난하다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는 사태가 여러 번 있었지요―은 이러한 상황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한 사례입니다.

기독교를 둘러싸고 그 안팎에서 종교와 과학에 관한 논의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은 바로 이 즈음인데요, 여기서부터는 근대 서구에서 기독교와 과학의 관계에서 벌어졌던 상황이 비슷하게 재연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우선 기독교 바깥에서는 기독교가 필연적으로 과학과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보는 식의 견해가 부상하면서 기독교가 서구 문명의 일부이며 과학과 조화를 이룬다고 보던 기존의 견해와 경합을 벌이게 됩니다. 한편 기독교 내부에서도 과학과 종교의 관계를 설정하는 전략상의 분열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여기서부터는 주로 개신교만 해당하는 이야깁니다. 천주교와 관련해서는 당시에 종교와 과학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진 흔적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개신교의 경우, 어떤 이들은 자유주의나 유연한 복음주의를 추구하면서 과학과 종교를 적당히 분리하거나 또는 진화론을 비롯한 근대 과학을 어느 정도 수용하여 신학과 신앙의 내용을 가다듬기 시작합니다. 반대로 근본주의나 경직된 복음주의 계열의 개신교인들은 성경을 역사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정확하고 오류가 없는 텍스트로 보는 문자주의를 고수하면서 진화론을 비롯한 근대 과학과의 전면전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그 내용은 제각각이었지만 개신교에서 이제 바야흐로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폭발하기 시작한 거지요. 제가 보기에 오늘날 종교와 과학 논의에서 기독교, 특히 개신교를 둘러싼 안팎의 논의가 압도적으로 많은 현실은 이 당시 형성된 상황의 연속인 것 같습니다.

한편 같은 1920~30년대에는 기독교 이외의 다른 일부 종교들에서도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그 관계 유형은 쉽게 정리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데요, 크게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종교와 과학은 조화될 수 없는 갈등 관계라고 보는 태도,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 아예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태도, 종교와 과학을 적당히 분리하는 태도, 종교가 과학을 포용하거나 능가한다고 보는 태도, 과학이 종교의 진리를 증명한다고 보는 태도 등입니다.

제 나름대로 구분해본 것인데요, 사실 기존에 누가 전체적으로 연구하거나 정리한 바가 없어서, 제가 이 편지를 쓰면서 나름대로 기존의 일부 연구들과 여러 자료들을 토대로 잠정적으로 구분해본 겁니다. 아직 가설 수준이라 좀 더 자료를 뒤져보고 생각을 정리한 후에야 좀 더 자세히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기독교와 과학 이외의 경우에는 이런 주제에 관한 논의가 별로 없다보니 당장 저 혼자 여러 생각을 정리하기가 좀 벅차네요.

다만 한 가지만 우선 짚어 두도록 하겠습니다. 가만히 보시면 제가 제시한 기독교 이외 종교들에서의 종교와 과학 관계 유형들에서 오늘날의 종교와 과학 논객들이 제시하는 관계 유형과 비교하여 더 있거나 없는 것 등 차이가 보이실 겁니다. 예를 들어 기독교를 중심으로 종교와 과학의 관계 유형을 정리한 대표적 학자인 이언 바버(Ian Barbour)는 갈등, 독립, 대화, 통합의 네 가지 관계 유형을 제시하는데요, 제가 제시한 기독교 이외 종교들의 과학과의 관계 유형에서는 종교와 과학의 적극적인 만남을 시도하는 대화나 통합 유형이 없습니다.

그 이유는 비교적 간단합니다. 대화와 통합이란 충분히 긴 시간 동안 많은 논의가 축적된 후에야 비로소 시도될 수 있는 것인데, 서구에서 오래 진행되어온 논의가 있었기에 한국의 기독교는 비교적 충분한 토대 위에서 논의를 시작할 수 있었지만, 다른 종교들은 대개 처음부터 모든 논의를 시작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논의가 이제야 막 싹트던 단계에 불과했기에 대화와 통합의 논의는 아직 시기상조였던 셈이지요. 물론 오늘날은 특히 불교 같은 종교는 과학과의 만남에 아주 적극적이어서 국내외에서 과학과의 대화와 통합을 추구하는 다양한 논의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불교계 등 일부 종교의 일이고, 또 비교적 최근의 일일 뿐, 적어도 근대 이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은 기독교를 제외한 다른 대부분의 종교들에서는 대화와 통합을 위한 시도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이 문제는 일단 여기까지 쓰려 합니다. 다만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신 선생님의 설명은 기독교에 국한하거나 기독교가 오랫동안 핵심적인 위상을 차지해온 서구의 경우에 대해서는 설득력이 있지만, 서구와는 전혀 다른 역사적 경험과 현재의 상황을 지닌 우리의 경우에는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는 점입니다. 우리의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현재가 있게 된 역사적 맥락을 밝혀내야 한다는 것이 제 입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개항기까지 거슬러 올라가 온갖 종교들이 서로 경쟁하며 공존하고, 또 여러 종교들 간에서는 물론 사회와 문화 속의 종교적인 것들과 세속적인 것들 사이에 복잡한 관계와 상호작용이 벌어지게 된 역사적 연원을 밝혀내보려 했던 것이고요.

저는 기독교와 그 밖의 종교들에서 과학과의 관계를 설정하는 방식에 왜 이렇듯 큰 차이가 생기게 되었는지를 밝히기 위해 근대 초기에 서구 근대성과 더불어 서구 과학과 서구 종교인 기독교가 유입된 후 종교 지형이 대대적으로 재편되던 과정에서 문제의 해답을 찾아보려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 설명이 신 선생님의 설명을 폐기하거나 대체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신 선생님의 설명에서 부족한 우리의 맥락에 대한 보완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나름대로 애는 썼는데 제대로 전달이나 되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부족한 점이 있으면 지적해주십시오. 그리고 아까 말씀드린 기독교 이외 종교들에서 종교와 과학의 관계 유형들에 대해서는 꼭 제대로 준비해서 다시 편지를 쓰도록 하겠습니다.

God과 Goodness, 가깝고도 먼

그나저나 장 선생님이 전해 준 소식, 대니얼 데닛이 큰 병마를 이겨 냈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알려주신 사이트에 들어가서 데닛의 글도 재미있게 읽었고요. 비록 데닛과는 안면이 없지만 멀리서나마 쾌유를 축하한다고 전해 주세요. 참, 그러고 보니 제가 방금 쓴 말들이 데닛에게는 좀 귀에 거슬릴지도 모르겠습니다. '병마(病魔)'라든지 '축하(祝賀)'라든지 하는 표현 말입니다. 'Thank God' 대신 'Thank Goodness'를 말하는 데닛에게 '병마'는 마치 질병의 초자연적 원인을 말하는 것처럼 들릴 테니까요.

하지만 비록 '병마'라는 말이 질병을 신이 내린 시련이나 악마의 심술 탓으로 돌리던 시절에 생겨난 것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지금 이 말은 별다른 종교적 함의 없이 그저 질병의 중대함을 뜻하는 상투적 수사로 쓰일 뿐이죠. 우리가 '화마(火魔)'나 '수마(水魔)'를 말한다고 해서 정말 어떤 악마 따위를 연상하지는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축하'라는 말도 마찬가집니다. 2000년 전 중국의 한자 해설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祝'이라는 말은 본래 제사와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이후로도 '祝'은 주로 신적 존재를 향한 기원을 의미하는 하는 말로 쓰였고요. 하지만 지금은 '祝'이 지닌 이런 종교적 함의는 거의 사라진 지 오래죠.

어쨌거나 지금 우리는 종교적 함의와 별 상관없이 '병마'라는 말을 쓰고, 또 기꺼운 마음으로 '축하'라는 말을 씁니다. 어쨌든 비록 데닛이 한국말은 전혀 모르겠지만, 그래도 싫어할지 모르니 말을 바꾸겠습니다. '힘든 병고를 무사히 극복하셨다니 참 다행입니다. 부디 건강하세요.' 아, '다행'이라는 말에서도 '운수'를 의미하는 종교적 냄새가 나기는 하지만, 이건 애교로 봐 주시겠죠.

기왕 말이 나온 김에, 앞에서 우리 고유의 신앙 대상인 '하늘/하느님'에 대해 했던 이야기 기억하시죠. '하늘/하느님'이 인격적 신을 의미할 수도, 그저 막연한 우주적 법칙을 의미할 수도 있다고요. 그런데 이는 서양도 그리 다르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서양에서 대문자 'God'은 야훼나 알라처럼 유일신교의 특정한 인격적 신을 지칭하는 게 보통이고, 소문자 'god'은 유일신교 이외의 다양한 신들이나 또는 신에 관한 일반 명사로 쓰이는 게 보통이죠. 어떤 경우든 유신론적 함의를 지니는 건 사실이고, 따라서 무신론자인 데닛이 이 단어를 쓰기 싫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는 갑니다.

하지만 'God'이 꼭 이렇게 유신론의 함의를 지니는 것만은 아닐 겁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Heaven helps those who helps themselves)'는 격언이나 '신만이 아신다(Only God knows)' 같은 표현에서 'Heaven'이나 'God'은 한편으로 인격적 신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우리의 경우처럼 그저 인간사를 초월하는 저 너머의 막연한 무엇, 우주와 역사를 움직이는 비인격적인 어떤 법칙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패밀리레스토롱 'T.G.I FRiDAY'S'의 로고. ⓒ프레시안

어쨌거나 데닛은 'God'이 이런 비(非)유신론적 맥락에서 쓰일 수 있다고 해도 그 유신론적 함의가 너무 강하기에 이를 거부하고 싶었던 것 같네요. 그런데 혹시 데닛은 식구들이랑 T.G.I Friday's 패밀리 레스토랑에는 가지 않으시려나요? 참, 안 갈 것까지는 없겠군요. 이 상호의 'G'는 애초부터 'God'과 'Goodness'를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었으니까, 'Thank God It's Friday!'가 아닌 'Thank Goodness It's Friday!'로 받아들이면 그만일 테니까요. 참 요즘은 더 나아가 'Terribly Gleeful It's Friday!'(너무 좋아 금요일이야!) 이런 식으로 바꾸어 쓰기도 하니까요.

사실 'God'이라는 말을 'Goodness'처럼 다른 말로 바꾸어 쓰려는 시도는 데닛 이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지속되어온 것이기도 합니다. 꼭 데닛 같은 무신론자가 아니더라도 'God'이라는 표현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 어디에나 늘 있기 마련이니까요. 아무튼 약간의 장난기가 느껴지기는 합니다만, 진정한 무신론자라면 언어 자체를 바꾸려고 시도해 봄직도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언어라는 게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안에 기나긴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법인지라 이런 시도가 그리 순탄하지는 않을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다른 경우이기는 하지만 수천 년 동안 사용되어온 고질적인 가부장적 어휘들의 상당수가 페미니즘 덕분에 불과 몇 십 년 만에 양성 평등적 어휘로 대체되었다고 점을 생각하면 (예를 들어 불특정한 인간 주체를 가리키거나 3인칭 대명사를 쓸 때 예전에는 man이나 he만 썼지만, 이제는 man과 woman을, 또 he와 she를 동시에 쓰거나 human 같은 비교적 젠더 중립적인 단어를 사용합니다. 또 policeman 같은 단어는 police officer로 바뀌었죠), 종교적 함의가 담긴 기존의 용어를 바꾸려는 시도도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도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다양한 종교들이 있을 뿐더러 종교에 관련된 태도도 무척이나 다양합니다. 인격적 신을 믿는 종교에는 유일신교와 다신교를 비롯한 다양한 흐름이 있고, 이와 별도로 인격적 신과 그다지 상관이 없는 종교들도 있습니다. 게다가 무종교적이거나 비종교적인 사람들 중에는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특정 종교에 속하지는 않지만 명백한 종교적 성격의 신념을 지니고 그런 실천을 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현실의 이런 복잡성을 인정한다면 특정 종교에 뿌리를 둔 기존의 언어를 종교적으로 중립적이거나 종교적 함의가 없는 새로운 언어를 바꾸려는 시도는 분명 중요한 의의를 지니지 않을까 합니다.

기도나 기적은 효과가 아니라 의미의 문제다

쓰다 보니 좀 길어졌습니다. 장 선생님 편지에는 당장 제대로 답장을 쓰기는 힘들 것 같네요. 되는대로 적어 봅니다. 우선 기도나 기적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종교학자가 그렇듯이 저도 그 실제성이나 인과적 효과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물론 저와 생각이 다른 종교학자들도 있겠습니다만, 제 경우는 일단 장 선생님이 제시하신 통계적 결과들, 즉 기도와 그 효과에 대한 연구에서 양자 간에 아무런 인과적 연관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결과를 신뢰하는 편입니다.

이는 기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대 의학이 못 고친 병을 기도원에서 고쳤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당연히 그런 '기적적' 치유가 꼭 기도원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닙니다. 사찰이나 굿당이나 신종교 교당에서 병이 나은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지요. 물론 종교와 상관없이 모든 의학적 치료를 포기한 후에 그저 일상에서 자연적 과정에 의해 저절로 치유되는 경우도 있겠고요. 이에 대해 연구된 바는 보지 못했지만, 충분한 수의 표본이 확보된다면 여러 종교들의 특별 치유 사례의 빈도나 의료적 조치를 포기한 후의 일반적인 자연 치유 사례의 빈도에서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는 나타나지 않을 것 않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생각이 나네요. 기도의 효과에 대해 주일 학교 선생님에게서 아주 간단하면서도 명쾌한 답을 들었던 적이 있는데, 지금도 그 기억이 생생합니다. 초등학교 시절에 노회(개신교 교파인 장로교의 지역 조직) 대표로 뽑혀 전국 성경 시험 대회에 출전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요, 매년 장려상 아니면 낙방이었죠. 정말 열심히 준비했고, 꼭 일등상을 타게 해 달라고 기도도 열심히 했는데, 매번 실패하니 어린 마음에 실망이 이만저만 아니었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 선생님께 물었죠. '왜 하나님은 내 기도를 안 들어 주시는 거죠?' 그러자 선생님이 이렇게 답해 주셨습니다. '얘. 기도를 너만 하는 건 아니겠지? 하나님이 너만 사랑하실까? 다른 친구들도 똑같이 사랑하시겠지? 그렇다면 하나님이 누구 기도를 들어주실까? 조금이라도 더 많이 노력한 사람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게 당연하겠지? 그치?' 뒤통수를 한대 맞은 기분이었죠. 결국 중요한 건 순전히 내 노력이구나!

사실 제가 선생님께 질문을 했던 데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같은 교회 후배도 같이 출전해서 그 학년의 일등상을 탔는데, 그 다음 주에 전교인 앞에서 그 친구가 간증을 했죠. 기도를 열심히 했더니 답안지에 마치 누가 미리 써 놓은 것처럼 답이 선명하게 보여서 그대로 적었다고 하더군요. 모든 교인들이 '아멘!' 하는데, 저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죠. 시험 끝나고 같이 답안지를 맞춰 보면서 그 친구가 나보다 고작 몇 개만 덜 틀린 걸 보았는데, 정말 하나님이 그 친구에게 직접 정답을 알려주셨다면 왜 기왕이면 전부 다 가르쳐 주지 않고 굳이 몇 개는 틀리게 가르쳐 주셨을까 하는 의문도 들었고요. 어쩌면 그 후로 사춘기를 지나 오래도록 한편으로는 신앙심의 부족을 자책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성경의 내용이나 기도의 응답에 대한 풀리지 않는 의문들을 계속 키웠던 것도 이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습니다. 어쨌든 기도나 기적이 인과적 효과가 별로 없다는 과학적 연구 자체에 대해 저는 별로 토를 달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드네요. 그래서 그게 무어 그리 중요하지? 정작 중요한 건 기도가 효과가 정말 있느냐, 기도에 응답하는 신이 정말 존재하느냐, 이런 문제가 아니라, 그 대상이 누구든 또 무엇이든 사람들이 이런저런 이유에서 기도라는 행위를 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닐까?

일전의 편지에서 제가 결코 무신론자는 되지 못할 것 같다고 말씀드린 것 기억하시죠. 사실 제대로 기도를 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그래도 몇 년 전 기도 비슷한 걸 한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 크게 위독하셔서 의식을 잃으셨을 때였는데요, 그때 저는 병동 계단에서 서서 창밖 먼 하늘을 바라보며 정말로 오랜만에 '그분'에게 말을 걸었죠. '그분'이 내가 전에 알았던 기독교의 하나님인지 아니면 그저 막연한 알 수 없는 신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쨌거나 기도는 진심이었습니다.

신파조 같기는 하지만, 그동안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 번 제대로 못했다는 생각이 괴로웠던 데다가, 런던에서 이제 막 한국행 비행기를 탔을 막내아들과 며느리의 얼굴도 못 본 채 그렇게 가실까 봐 마음이 너무 아팠죠. 그런데 동생 내외가 도착한 후 아버지께서 갑자기 의식을 되찾아 미음도 한술 들고, 온 가족과 즐거운 대화도 나누고, 심지어 장차 태어날 손자손녀의 이름까지 미리 지어 주셨죠.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우리 모두에게는 말할 수 없이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어쨌거나 정신없이 장례를 치르고 났는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문득 깜빡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차창 밖으로 먼 하늘을 쳐다보았습니다. 그리고는 마음속으로 다시 막연히 '그분'에게 아버지의 의식이 잠시나마 돌아오게 해 주셔서 고맙다고 말했지요.

기도에 대한 장 선생님의 질문에 제가 할 수 있는 답은 당장은 이것뿐이네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순전히 통계적 연구만 놓고 본다면, 기도의 실질적 효과에 대한 증거는 전혀 없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닐 것 같습니다. 우리 인간의 삶이란 그런 통계 수치에 갇히지 않는 숱한 차원들이 있기 때문이지요.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던 당시에 제가 했던 그 어설픈 기도가, 기도하는 법조차 잊어버린 냉담한 회의주의자이자 모호한 불가지론자가 된 제 마음속 독백이 도대체 기도라고나 할 수 있을지 저도 잘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 그 순간 인간이나 의학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저 하늘 너머의 막연한 누군가를 향해 제 간절한 바람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아버지는 그동안의 꾸준한 의학적 치료가 있었던 덕분에 신체 기능이 잠시 회복된 것일 뿐일 수도 있겠지요. 또 모든 것이 그저 순전한 우연일 뿐일 수도 있을 테고요. 하지만 적어도 바로 그 시간에 간절히 바라던 일이 이루어진 것, 아버지가 눈을 뜨고 잠시나마 식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체로 우리 모두에게 기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적이 어떤 신적 존재 덕분이든 아니든, 제가 한 것이 기도라고 할 수 있든 없든, 저는 기적을 바라며 저 하늘의 막연한 '그분'에게 부탁을 했고, 장례 일로 경황이 없어 잠시 잊기는 했지만 결국 이 모든 일을 다시 떠올리면서 잊지 않고 '그분'에게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옆으로 새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 제 개인적 이야기만 하고 말았네요. 기도나 기적이 효과가 아니라 의미의 문제라는 많은 종교학자들의 논의가 있기는 하지만, 그런 논의를 일일이 소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고 또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였습니다. 저는 기도에 응답할 어떤 신적 존재가 있든 없든, 또 기적이 기도의 효과든 아니든, 이런 문제를 떠나 기도란 우리 인간이 삶에서 부딪히는 풀리지 않는 물음들과 문제들을 조금이나마 풀어내는 실마리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 ⓒ프레시안

인류학자 메리 더글러스(Mary Douglas)는 사물을 인격화하는 습성은 결코 미개한 사고가 아니라 인간이 주변 세계와 관계를 맺는 주된 방식 중의 하나이며, 이는 현대인에게도 여전히 생생히 살아 있는 사고라고 말합니다. 더글러스의 통찰은 기도에 대한 궁금증에 일말의 빛을 던져 줍니다.

제 연구실에는 화분이 여러 개 있는데 깜빡하고 며칠 물을 안 주어서 시들한 모습을 볼라치면 화들짝 놀라 화초들에게 미안해하면서 어서 기운차리라고 말하며 물을 주고는 합니다. 글쎄요. 이렇게 화초들에게조차 말을 걸 수 있다면, 비록 존재하는지 안 하는지 확인할 수도 없고, 또 설령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해도, 우리는 알 수 없는 그 누군가에게도 여전히 말을 걸 수는 있는 거겠지요. 그 누군가가 신이든 아니면 다른 무엇이든, 또 그런 존재가 있든 없든,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라 사람들의 기도하고 싶어 하는 마음, 기도를 하는 그 행위, 그리고 바라던 바의 성취나 실패를 나름의 해석 체계 속에서 받아들이려 하는 시도, 이런 것들이 아닐는지요. 아무튼 기도라는 것을 해 본 지 다시 또 한참의 시간이 흘렀지만, 언젠가 힘들거나 다급할 때면 저는 아마 다시 또 염치없이 '그분'에게 말을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제 인생 이력에 종교적 뿌리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면 딱히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도란 신앙의 유무나 종류를 떠나, 또 유신론자나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를 떠나, 누구든 마음속의 생각이나 바람을 저기 어딘가 실재한다고 여겨지는 대상을 향해 말하는 소박하고 진솔한 고백의 한 가지 형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과학적 설명의 진보와 고갈되지 않는 의미의 영역

종교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들에 대해 장 선생님이 써 주신 친절한 설명도 잘 읽었습니다. 그 다양한 설명의 시도들이 다 일정한 한계를 가지지만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면서 나선형을 그리듯 발전해 온 모습도 잘 보았고요. 아마도 그들은 더 많은 탐구가 이루어지면 결국 '믿음 엔진'을 순수한 과학의 언어로, 순전한 진화의 과정으로 다 설명해 낼 수 있으리라 생각하겠지요.

그게 우리 세대나 다음 세대에 당장 가능하지 않더라도 끝없는 물음과 탐구 자체는 정말이지 인간이 지닌 가장 소중한 측면들 중 하나임이 분명할 겁니다. 다만 저는 과학적 탐구가 아무리 멀리까지 깊이까지 나아가 많은 것을 밝혀낸다고 해도, 한편으로 과학과 다른 한편으로 종교나 시나 예술 사이에는 아킬레우스와 거북의 역설(제논의 역설 중 하나. 걸음이 몹시 빠르며 불사신이었던 그리스 신화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거북보다 늦게 출발하면 결코 거북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역설)이 여전히 남기 마련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과학이 무엇을 밝혀내든 과학적 설명에 소진되지 않는 의미의 영역은 언제나 계속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과학이 아무리 자연을 또 인간 마음의 구조와 기제를 아무리 낱낱이 밝혀낸다고 해도 시인들은 여전히 그들의 상상력으로 새로운 언어를 끊임없이 주조해 내겠지요. 물론 예술가들도 그럴 테고요.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경전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문자주의의 닫힌 신앙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신앙으로 이성을 뭉개 버리지 않는 건전한 마음을 지닌 종교인이라면,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경계로부터 다시금 끝없이 새로운 물음들을 빚어낼 겁니다. 새로운 물음은 곧 새로운 의미를 자아내기 마련일 테고요. 결국 과학과 더불어 종교와 시와 예술, 이 모두는 곧 우리가 흔히 '문화'라고 부르는 커다랗고 복잡한 덩어리의 일부들이 아닐는지요.

장 선생님께서는 또 종교를 형이상학적 신념이나 진리에 관련된 세계관의 일종으로 보셨지요. 하지만 제가 보기에 이는 종교를 너무 좁게 이해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물론 특정한 세계관에 근거한 신념은 분명 종교의 일부이고 가장 핵심적인 측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세계관이라는 요소만으로는 종교를 온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세계관에는 종교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라 비종교적이고 세속적인 세계관도 수두룩하고, 또 무엇보다도 종교가 단지 세계관이기만 한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세계관은 어디까지나 종교의 복잡하고 다양한 여러 측면들 중 하나일 뿐이지요.

종교에는 신념이나 세계관과 밀접히 연관되지만 결코 그런 것으로 환원되지 않는 몸짓 고유의 차원이 있습니다. 바로 의례적 실천이지요. 또 종교에는 공동체와 뗄 수 없이 결합되어있는 사회적 차원도 있습니다. 바로 제도의 영역이지요. 저는 이런 차원들 중 어느 하나라도 빠뜨려서는 종교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저는 종교란 인간 몸의 구체성과 인간 삶의 물질적 토대 위에 구축되는, 아니 그 물질적 토대와 뒤섞이며 직조되는 복잡한 덩어리인 문화의 일부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종교학도로서 문화 속의 종교적 요소나 층위가 과학이나 예술 같은 문화의 또 다른 층위나 요소와 관련되는 방식에 관심을 갖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물질성의 토대 위에서 솟아나는 의미의 영역, 그 영역은 과학적 탐구나 예술적 표현이나 종교적 언술로도 결코 고갈되지 않습니다. 의미란 처음부터 정해진 방식으로 있었던 어떤 실체 따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일 의미라는 것이 단지 우리가 발견하면 되는 고정된 실체였다면 그런 의미는 이미 오래 전에 소진되었거나 언젠가는 소진되고 말겠지요. 하지만 의미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의미란 우리가 삶의 과정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던지는 물음들에 의해 예기치 못했던 방식으로 계속 생성되는 효과일 뿐입니다. 종교와 과학에 관한 논의들에서는 이렇게 새로운 의미들이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생생하고 흥미진진한 과정이 드러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삶의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들을 생성해내기 위해 분투하는 우리 인간의 한 단면이기도 하겠고요. 이 점이 바로 제가 종교인이나 과학자가 아닌 종교학자의 입장, 그리고 유신론자나 무신론자가 아닌 불가지론자의 입장이라는 다소 모호한 제3의 자리에서 종교와 과학의 흥미진진한 만남에 관심을 갖는 주된 이유입니다.

쓰고픈 말은 많습니다만 정리도 잘 안 되고 어느새 날도 새고 있으니, 이만 적어야겠습니다. 동지가 지난 지 어느새 두 달이군요. 며칠 전만 해도 이 시간이면 새벽녘이 여전히 어두웠는데, 어느새 여명의 기운이 빨라졌습니다. 오랜만에 옥상에라도 올라 도심의 아파트 위로 떠오르는 태양이나마 한껏 누리고 싶어집니다.

남미의 지평선을 뚫고 오르는 장대한 일출이든, 동해 바다의 위용에 찬 일출이든, 도심의 소소한 일출이든, 모든 일출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의 설렘을 주죠. 어쨌거나 태양은 세상을 고루 비추는 빛이고 또 모든 존재에 생명을 불어넣는 근원적 에너지니까요. 고대 이집트인들이나 일본인들처럼 태양을 신으로 섬기지는 않더라도, 태양은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아름답고 위대한 신비이기만 할 겁니다.

여명이 아침으로 바뀌기 직전이네요. 어서 옥상에 올라가야겠습니다. 이만 줄입니다.

또 연락드리지요.

2007년 2월 20일 새벽,

오산에서
김윤성 드림,
독자 기고를 받습니다!

<프레시안>은 '종교와 과학의 대화'에 독자 여러분이 참여하길 희망합니다. 장대익, 신재식, 김윤성 교수가 주고받는 글을 보고 자신의 견해를 보내주십시오. 그렇게 보내준 견해는 한 달에 한 번씩 세 분 필자와 똑같은 비중으로 <프레시안>에 게재됩니다. (의견 보내실 곳 :
tyio@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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